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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루온 교수님의 런웨이

중력자 신입의 LHC 랩 생존기

by 수지

표준모형에는 다양한 입자가 존재한다.
이들은 네 가지 힘—중력, 전자기력, 약한 상호작용, 강한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 관계를 맺는다.


가장 약한 상호작용을 하는 입자는 중력자다.
다른 입자들과 멀찍이 떨어져 있어도 되며, 감지하려면 극도로 민감한 장비가 필요하다.
실제 입자 가속기(LHC)에서는 다른 입자들에 묻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다.

워낙 존재가 미미해, 배경에 일어난 작은 섭동(perturbation) 정도로 치부되고, 근사적으로 계산해도 문제가 없다.

나는 랩에서 중력자 포지션을 맡고 있다.

…그러니까, 존재감이 거의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와 정반대의 입자도 있다.

글루온.

강한 핵력을 매개하는 입지다.

원자핵 속에서 다른 입자들과 밀접하게 얽혀,
중력자보다 약 10^40배 강한 힘으로, LHC에서 가장 강한 신호를 남긴다.

근사 따위로는 계산이 안되고,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필수인 입지다.

랩실에도 그런 존재가 있다.
바로, 교수님.

건물에 들어서는 순간 공기 밀도가 바뀌고,

출장 중에도 채팅 하나로 랩실의 필드를 뒤흔드시는 분.
랩실에 강한 핵력장을 형성하시는, 진정한 '강한 상호작용(strong interaction)' 그 자체다.





나른한 평일 오후,

복도 어딘가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린다.

우리 교수님이다.

늘 그렇듯 텐션이 하늘을 찌른다.

꼭 랩에 도착하기도 전에 목소리가 먼저 도착한다.

대학원생들에게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배려인 걸까?


마치 런웨이를 걷듯 길게 늘어진 오피스를 쭉- 통과하신다.

물론 그냥 걷기만 하시는 건 아니다.

한 사람씩 멈춰 서서,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크고 빠르게, 끊임없이 말씀하신다.


'어~ 그때 그 문제는 해결했어?'

'고치라고 한 이 플랏은 다 고쳤니?!'

'네 논문은 언제쯤 완성될 것 같니?!!!'


순간 깨달았다.

방 세 개가 길게 이어져 있고, 모든 사람의 모니터가 입구에서 한눈에 보이도록 배치된 이 구조는....

의도된 거였구나.


첫 번째 방의 시찰이 끝나고, 교수님이 내가 있는 방으로 들어오셨다.

제일 먼저 포착된 건 내 슈퍼바이저였다,

유독 긴 질문들이 이어졌다.

아마 프로젝트 데드라인이 코앞이라 그런 거겠지.

그 모습을 보며, 근거 없는 평화주의적 사고가 떠올랐다.

'나는 신입이고... 급한 데드라인도 없으니, 그냥 지나가시겠지?'

나는 조용히 모니터의 로그 창을 응시하며, 평소보다도 더 중력자 같은 상태로 존재하기로 했다.


그때,

불쑥

등 뒤에서,

엄청난 데시벨이 내 뒤통수를 직격 했다.


"야!!!! 수지야!!!! 초반부터 코드 많이 써봐라!!!!!'

점진적 근사만 가능하던 내 간섭계에, 오래간만에 비섭동 시그널이 찍히는 순간이었다.


급히 미소를 장착한 채 뒤돌아보며 대답했다

"ㄴ..... 네..!!! 그럼요!! "

"원래 쓰면서 배우는 거다~~!!!!"

그 말을 뒤로, 교수님은 다음 방으로 향하셨다.


분명 계속 말을 한건 교수님이고, 나는 딱 한마디 밖에 안 했는데,

왜 체력은 내가 더 소모된 것 같지?

교수님이 지나간 뒤, 랩실 사람들은 한층 더 지쳐 보였다.

이론적으로는, 글루온 성향 교수님 한 명을 상대하려면, 중력자 성향 대학원생 10명 있어도 균형이 안 맞는다.


이 교수님은 내가 살면서 본 물리학과 교수님들 중 가장 글루온스러운 분이셨다.

LHC 연구를 너무 오래 하셔서 그런가.

아니면 내가 너무 중력자 같은 끈이론 교수님들만 봐서 그런 걸까.

이 랩에 온 뒤로 내 코드도, 멘탈도 조금 더 비섭동적으로 진화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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