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에서 필요한 공변미분
사람마다 말투도, 표현도, 쓰는 단어도 다르다.
같은 말을 해도 어떤 사람은 직설적으로, 어떤 사람은 돌려 말한다.
물리학도 마찬가지다.
같은 현상을 설명하더라도, 어떤 기준점, 그러니까 '좌표계'를 쓰느냐에 따라 말이 달라진다.
특히 시공간이 구부러져 있는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서로 떨어진 두 지점에서 측정한 값을 그대로 비교하면 틀릴 수 있다.
공간의 휘어진 정도를 감안해 값을 '보정'해줘야 하는데, 이 계산법을 '공변미분'이라고 부른다.
복잡하게 보이지만, 핵심은 단순하다.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들이 사용하는 좌표계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
이건 내가 우리 랩실에서, 그 '휘어진 언어'를 처음 마주한 날의 이야기다.
랩인턴 3주 차
이제야 서버에서 실험 돌리는 게 손에 좀 익었다.
어제 제출하고 퇴근한 실험 결과를 조용히 확인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슈퍼바이저가 다가와 말했다.
"정규화(normalization) 계산을 좀 해줬으면 해."
여태 랩에서 들은 말 중에 가장 친숙한 단어였다.
'정규화야 뭐.. 학부 때 다 배운 거지'
그런데 이어진문장이 문제였다.
"그 계산은 네가 쓰던 GPU 클러스터가 아니라 CPU 클러스터에서 돌려야 하고, CPU 클러스터는 Slurm이 아니라 PBS 스크립트 써야 해"
...... 10초 만에 자신감이 곤두박질 쳤다.
'어떻게 문장이 모르는 단어들로만 구성될 수 있지...'
영국에서 학사 3년, 석사 1년. 그리고 독일에서 다시 석사 반년.
지난 5년간 내가 살아온 좌표계가 찌그러지는 느낌이었다.
'지금이라도 가서 Slurm, PBS가 뭐냐고 물어봐야 하나...'
'정규화 계산은 또 왜 CPU 클러스터에서만 돌려야 하는데...?'
내 좌표계가 찌그러지는 사이, 슈퍼바이저는 이미 자기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저 미지의 개념들이 이 랩의 일상 언어였다.
갑자기 나 혼자만 다른 시공간에 떨어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약 50번째로 이 생각을 했다.
'나.... 이 랩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날 나는 PBS 튜토리얼 페이지를 17번 읽었다.
그리고 약 세 시간 동안 챗지피티와 슈퍼바이저를 번갈아 귀찮게 한 끝에,
처음으로 내 정규화 계산을 CPU 클러스터에 제출할 수 있었다.
첫 실험은 파일을 찾을 수 없다며 시작도 못하고 죽었다.
세 번째 실험은 실행은 됐지만, 약 3분 만에 메모리 부족으로 죽었다.
한참 CPU 서버에서 삽질을 하던 중, 갑자기 내가 쓰던 노드에 접속할 수가 없었다.
'설마... 내가 서버를 죽인 건가...?'
식은땀이 났다.
내가 너무 이상한 스크립트를 연달아 제출해서 그런 걸까?
안 그래도 찌그러졌던 내 좌표계가 점점 더 뒤틀리는 것 같았다.
숨 쉬기가 힘들었다.
그때 오피스 옆자리 사람이 말했다.
"갑자기 실험이 큐에서 사라졌어. 나만 그래?"
"나도야....."
"서버 죽었나 봐"
진짜 나 때문이면 어떻게 하지......
이제는 아예 시간축과 공간축이 뒤섞이는 느낌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 멀미가 났다.
주변은 고요한데, 나 혼자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마치 블랙홀 내부처럼.
그날은 오후 내내 절절매다가,
퇴근하자마자 저녁도 못 먹고 기절하듯 쓰러졌다.
물론, 서버는 내가 죽인 게 아니었다.
그냥 원래 주기적으로 터지는 거였다.
찌그러졌던 좌표계는 다음 주에야 다시 펴졌다.
이번엔 GPU 여러 개가 동시에 죽었다.
내가 쓰던 데이터 파일에도 접근할 수 없었다.
사람들 불만이 터져 나왔다.
"요즘 대체 왜 이래?"
"아마 너무 더워서 서버가 과열됐나 봐. 이번 주에 수리기사가 온대."
그 말을 듣는 순간, 숨통이 트였다.
'아..... 내 잘못이 아니었구나...'
그제야 모든 게 명확해졌다.
처음부터 좌표계는 찌그러진 게 아니었다.
찌그러져 보였던 좌표계를 읽는 법을 몰랐던 거였다.
나와 다른 좌표계에 사는 사람들의 언어를 이해하는 방법은 하나다.
내 좌표계와 그 좌표계 사이의 보정 값, 즉 공변미분을 찾는 것.
그날 내가 찾아야 할 공변미분의 원소는 '클러스터', '스크립트', 'PBS'였다.
다행히 죄책감은 내가 일주일간 서버를 더 공부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여전히 스크립트를 쓰는 건 무섭다.
기존에 있던 걸 복사해 와서 파라미터만 고치는 식으로 어떻게든 때우고 있다...
그래도 이젠, 랩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내 시공간이 뒤틀리지 않을 정도의 공변미분은 슬쩍 계산할 수 있다.
.... 물론, 다음 주에 또 다른 좌표계가 등장하지 않는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