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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팡이 필 집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Zwieschen

by 수지

내가 독일에서의 첫 학기에 살던 집은 산등성이에 자리 잡은 작은 빌라였다. 출입구 기준으로 보면 3층 (2nd floor)였지만, 뒷문 쪽으로 보면 거의 지면과 맞닿아있는 구조였다.


개강 첫 주 토요일 아침.

긴장되었던 몸을 풀기 위해 가볍게 5Km 조깅을 하고 돌아왔다.

기분 좋게 샤워를 마치고, 집주인이 당부한대로, '스퀴지 (squeegee)'로 샤워실의 물기를 바로 닦아냈다.


아마도 수돗물에 석회가 많아서 그런 것 같았다.

이전에 영국에서 몇 달간 굳어진 석회를 한 번에 제거하려다가 고생한 적이 있어서, 이번엔 애초에 쌓이지 않게 관리할 작정이었다.


물기를 다 정리하고 스퀴지를 걸어놓으려는 순간, 화장실 천장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흰색으로 페인트가 덕지덕지 칠해진 창틀 위로, 검은색 점들이 군데군데 퍼져있었다.

마치 누군가 검은깨를 뿌려둔 것 같은 모양이었다.

'내가 여태 미처 못 봤던 때인가...?'

잠시 고민했지만, 아니었다. 저 검은 것들과는 분명 초면이었다.



자취 전문가 친구에게 SOS를 쳤다. 사진과 함께 물었다.

'이거.... 내가 생각하는 그거 아니지...?'

1분 만에 답장이 왔다.

'곰팡이 맞아. 당장 집주인한테 연락해.'


그날부터 곰팡이와의 전쟁이 시작됐다.

우선, 입주한 지 일주일 만에 곰팡이가 생기는 게 말이 되냐며 집주인에게 항의했다.

그리고 당장 곰팡이 제거제를 사러 생활용품 판매점 '데엠 (DM)'으로 향했다.


문제는.... 일단 곰팡이란 독일어 단어부터 알아야 했다.

- 곰팡이 - der Schimmel

- 곰팡이 제거제 - der Schimmelentferner


제거제를 준비하고 보니, 천장까지 손이 닿지 않았다. 긴 막대걸래(der teleskopstiel)도 함께 구매했다.

독한 화학약품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한 마스크, 고무장갑 (der Gummihandschuhe)도 챙겼다.


그렇게 나의 토요일은 천장에 곰팡이 제거제를 적신 걸레를 천장에 마구 문지르는 것으로 지나갔다.

위를 올려다보니, 뒷목이 점점 더 뻐근해졌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그릴 때도 이랬으려나...'



개강 3주 차.

입주 일주일 만에 발견한 화장실 천장 곰팡이와의 전쟁에서 서서히 패배해가고 있었다.

곰팡이 생각에 하루 종일 우울했다.

'오늘 집에 가면, 또 얼마나 번져 있을까.'

'내일은 비까지 온다는데, 습도가 올라가면 더 심해지겠지..'


수업에 집중이 될 리 없었다.

오전 수업이 끝나자마자, 근처 쇼핑몰로 향했다.

'오늘은 더 독한 곰팡이 제거제를 써야 하나...'

익숙해진 독일 마트의 'Reinigen (청소용품)' 코너.


그때 누군가 다가왔다.

"너 여기서 뭐 해?"

개강 첫 주에 수업이 겹쳐 잠깐 이야기 나눴던 과 친구였다.

그 후로 수업에서 보이지 않아 자퇴한건가 했는데, 여기서 마주치다니.


"아... 집에 곰팡이가 피어서..."

"우웩.... 그렇구나."

"근데 너는 왜 요즘 수업에 안 나와?"

"아..... 그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친구는

한 달째 집을 구하고 있다고 했다.

매일 뷰잉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독일에서 월세 계약이 어렵다던데.... 진짜구나.'

순간, 내 곰팡이 고민이 한참 뒤로 밀려났다.


"그럼 너 지금은 어디서 살아?"

"Zwischen. 오늘도 새 집으로 짐 옮기느라 학교를 못 갔어."


친구는 한 달째 '쯔비쉔 (Zwischen = 사이)'이라 불리는 단기 임대 숙소를 전전하고 있었다.

벌써 다섯 번째 이사라고 했다.

마침 그 친구가 오늘 새로 이사한 쯔비쉔은 내 집 바로 다음 정거장이라고 해서 함께 트램을 탔다.

트램 안에서 친구의 숙소 구하기 대장정을 들으며 생각했다.

'곰팡이 필 집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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