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단상

by Doc


차인 (茶人) 즉 말차를 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인 성향(性向)이 있다. 그것은 차(茶)를 좋아하고 즐긴다는 점이고 이것은 자신 스스로에 있어서의 단련(鍛鍊)이나 마찬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나는 이러한 단련을 보통 말차와 서신으로 풀어내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의 단련은 개개인에만 한하지 않는다. 내가 행(行)하는 모든일이 나에게로 다시 다가오기 때문이다. 행할 때의 자세 (姿勢)와 태도(態度)는 매우 중요하다.


나 자신도 그러하지만 사람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한다. 이 변화는 사람에게 있어서 즉 나 자신에 있어서 일종의 암시이자 한 길을 더 나아갈 수 있다는 긍정적인 신호라고 할 수 있다. 이 긍정적 신호를 발산하는 것은 나 자신의 마음이다.




마음이 어떠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가에 따라. 이 신호의 체계는 변화한다. 신호 체계의 변화는 첫째로는 자신 스스로 두 번째로는 타. 즉 상대방의 행동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에 따라 변화하게 된다. 타 즉 상대방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자기 자신의 내면 마음의 자세는 그 스스로의 격과 관련이 깊다.


태어나서부터의 일정한 학습과 배움은 살아가는 데 있어 자신의 홀로서기와 관련이 있다. 홀로서기라는 것은 어떠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 문제를 스스로 진단하고 평가. 이에 대한 문제점을 발견하고 해결할 수 있는 지식적 학습적 경험적인 자아의 상태를 이야기한다. 홀로서기를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마만큼의 격이 쌓여 있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홀로서기는 혼자 스스로가 이룩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 스스로가 아닌 타 즉 상대방과의 교류와 학습 그리고 배움의 경험의 성과물인 것이다. 이 성과물의 평가는 본인 스스로가 일정 부분을 담당할 수는 있겠으나. 전체적인 것은 타를 통하여 즉 상대방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된다. 즉, 타의 격과 자신의 격이 어울려 타인 상대방에게 인정을 받고 이것이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는 과정인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의 배움과 학습이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 힘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이 힘 즉 돌아온 격이 온전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마음으로 받아들여질 때 격의 소통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 이 홀로서기의 기본이 그 태가 과정이하나 하나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과정 속에서의 나이감과 배움은 이것과 같다. 이것을 다른 말로 풀이하면 처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과 퇴계(退溪) 이황 (李滉)의 서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아가는 의리에 대해서는 옛사람들이 비록 완전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 있습니다만,


시대거 다르고 일이 같지 않아 처신하는 방법이 아마도 이렇게 다른가 봅니다. 정밀한 의리와 그 쓰임에는 반드시 제대로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뵙고서 가르침을 받을 방법이 없으니, 간절히 바라는 마음만 날로 깊어 갑니다.


한 구절에서 한쪽 다리는 길고 한쪽은 짧다.라는 것은 저의 마음에 무언가 크게 느껴지게 합니다. 지난날 저의 견해도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평소 일을 대하고 사물을 접할 때 반드시 인과 밖 또는 이것과 저것을 자세히 헤아려. 서로 부합하여 막힘이 없게 된 뒤에야 순서를 따라 행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감히 멋대로 생각하거나 분수를 넘어 억지로 행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비롯된바 비록 뜻을 세운 것이 높지 못해 스스로를 제한하는 것 같지만 몸과 마음을 반성해 보아도 서로 크게 어글러 지지 않고, 차츰차츰 꾸준히 힘을 얻게 되는 데에 이르게 되니, 어쩌면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보건대. 이 뜻과 같으니 莊子(장자)가 아침저녁 사이에 만난다.라고 말한 것이 어찌 다시 굳이 천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위로되고 다행스러운 마음 더욱 그지없습니다. 아뢰고 싶은 것이 매우 많습니다만 번거로운 일로 바빠서 갖추지 못했습니다. 살펴 주십시오. 삼가 절하며 글을 올립니다.


계해 6월 28일 후학 대승은 잘하며 올립니다.



이 서신에서는 처신이라는 말로 표현했으나 이것은 의사 처리의 절차와 시행과정이 어떠해야 한다는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서로 부합하여 막힘이 없게 된 뒤에야 순사를 파라 행한다는 것은 의사처리를 수행함에 있어 의견의 조합과 순서 과정의 수순이 명확해야 한다는 것과 이 기본의 문제가 결과에 중요한 반증이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의사처리는 방향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어떠한 방향성으로 나아갈 것인가는 어떠한 결과를 가져다줄 것인가를 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하기에 이에 부합할 수 있는 토론은 방향성을 제시하는 이에 대한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감히 멋대로 생각하거나 분수를 넘어 의지로 행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은 어느 한쪽의 의견이 아닌 서로의 관점을 부합한 것이 힘이 되고 절충된 의견만이 효율성이 가미된 결과를 가져다줄 수 있다는 지혜의 경험을 말하고 있으며, 이를 얻지 못하면 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할 수 있다.


비록 뜻을 세운 것이 높지 못해 스스로를 제한하는 것 같지만 몸과 마음을 반성해 보아도 크게 어그러지지 않고 차츰차츰 꾸준히 힘을 얻게 되는 데에 이르게 되니. 아찌면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된다라는 의미는 서로가 시로간에 몸을 낮추고 겸손하고 꾸준하게 건강을 지키며 배려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결과를 얻어내는 것에 대한 최상의 효율성과 결과를 가져와 줄 수 있다는 의미로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고봉과 퇴계는 이러한 격의 대화를 서신을 통해 소통함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가 되어 주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결과를 도출한다는 것은 서로 다를 수 있는 가치관 그리고 생각과 경험의 다름이 아울러서 형상이 된다 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바라보는 시각, 이 시선의 차이가 다른 결과를 즉, 서로 다른 결과가 아닌 동일한 하나의 목표에 대한 결과를 가져다줄 수 있도록 협력해서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의 나아감이라고 생각한다. 이 나아감이 올바른 나아감으로 형성이 되려면 서로가 서로에게 더 많은 부딪침 그리고 조율의 과정이 필수 불가결이다. 이를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서로 간의 신뢰와 공감을 통한 합치된 결과일 것이다.


조선시대의 시대상에서 고봉과 퇴계의 13년간의 이 서신들은 그러한 선비이자 학자가 바라보는 서로 간의 무언의 대화이자 끊임없는 무한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서로가 서로 간의 현명한 의사소통의 방법 그리고 이를 통한 격(格)의 교환과 공감 그리고 소통의 의미가 차를 하는 나에게 있어 타인 상대방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의 태(態)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해 주는 서신이 아니었나 싶다..


공간 속의 시간 시간 속의 공간에서의 연결 그리고 그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격의 의미를 잊지 않았으면 한다.


꾸준하게 향기를 품은 말차 한 사발의 미학과 더불어 오늘도 日日是好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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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1558년 11월 2일 과거에 합격한 후, 서울에 와 있던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찾아 뵙고 사단칠정론(四端七情)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1559년~1566년 8년간에 걸친 퇴계·고봉의 사칠이기논쟁(四七理氣論爭)은 조선 유학사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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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退溪) 이황(李滉)


기대승과의 사단칠정논변은 한마디로 이황의 사상을 만들어 낸 세기의 논쟁이다. 이황의 전성기. 이때 이황은 58세의 대사성, 기대승은 갓 과거에 급제한 32세의 신출내기였다. 대사성은 바로 성균관의 우두머리로서, 이황은 요즘으로 치면 국립대학교 총장쯤 되는 셈인데 이는 의전에서 국무위원(장관)급에 해당한다. 이제 갓 시험에 합격해 부서 배치를 받은 5급 사무관이나 7급 주무관과 토론을 벌인 것이다.


거기다 이황은 선조 임금의 스승이었다. 임금도 어려워하는 대학자였음에도 기대승은 정말 겁없이 대든 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 13년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치열한 철학적 논쟁을 이어나갔고, 이황은 기대승의 견해를 자신의 학설에 일부 수용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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