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완이란 무엇인가?
말차를 마실 때 사용하는 찻사발을 말한다. 우리의 차 문화는 잎차가 기본이 된 지금이나 예전에는 차를 갈아 마셨다.
찻잔에 대한 것은 우리의 기록보다 일본의 기록들이 더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남아 있는데 이는 센노리큐에 의한 다도의 역할이 컸다. 특히 사발전쟁이라고 불리우던 임진왜란의 영향이 크다.
일본에서는 '분로쿠(文祿)·케이죠(慶長)의 역(役)'이라 부르고 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사발을 탐내서 일으켰다고 해서 도자기전쟁이라고 하고 도자기 중에서 특히 찻사발이 목적이기에 일본식으로는 다완(茶碗)전쟁 즉 사발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임진왜란 전의 일본은 무로마치(室町)시대였다. 이때의 일본은 중국 차세계의 영향을 받아 서원차(書院茶)가 유행했다. 차의 본래 심성을 떠나 아주 호사스러운 차생활이었다. 찻사발은 중국에서 수입한 천목사발이었다. 조선사발은 중국사발보다 낮은 위치에 있었다.
이 시기에 일본 다도의 선구자들은 소박미 속에 감추어진 우리사발의 아름다움을 통해 진정한 차정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 사발에 의해 일본 역사의 장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서원차(書院茶)는 사라지고 와비차(화경청적(和敬淸寂)을 추구하는 일본 다도의 세계)가 등장한다.
시대적으로는 지방 영주들이 일본의 패권을 다투는 전국시대에 돌입 된다. 불안한 시대에 종교가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지방영주와 그 휘하의 사무라이들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 속에서도 다도에 몰두한다.
그때는 우리 사발을 구하기 위해 전쟁도 불사하는 시대였다. 그 당시 일화 중 하나는 풍신수길의 주군이었던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는 조선 찻사발을 이용해 가장 적대 세력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우리 사발의 위력을 일본에 대표적으로 선보인 경우이다. 이 사발은 시바타(井戶)라는 이름을 가진 제기용 진주 보시기였다.
오다노부나가의 부하였던 풍신수길은 일본의 패권을 잡자 미천한 신분 출신임을 숨기려는 듯 더욱 더 다도세계에 몰입한다. 여기서도 한 일화가 있다.
풍신수길이 일본의 패권을 잡기 직전 큰 전투가 있었다. 이때 승리하여 풍신수길이 일본의 대권을 쥐게 된다. 이 전투 중 어느 편에 들지 않고 기회만 엿보던 어느 성주는 풍신수길이 승리하자 목숨을 위태로운 것을 직감한다. 자기의 영지와 목숨을 지키기 위해 자기가 가진 가장 큰 보물인 진주큰사발을 풍신수길에게 상납해 용서를 빌어 자신의 영지와 목숨을 유지하게 된다. 이 사발의 이름이 일본식으로는 '筒井筒井戶'이다. 조선에서는 영남지방의 제기였다.
풍신수길의 조선침략 속내는 사실 자기 휘하의 지방 영주의 힘을 소진하게 하고 조선사발을 빼앗기 위해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면 임진왜란 중 '풍신수길의 칙령' 1호가 사기장을 납치해 오라는 것이었다.
한 이야기가 있다. 풍신수길이 조선 침략을 위해 일본 내에 차린 본진은 후쿠오카 부근의 나고야 성이었다. 조선에 교두보를 확보한 왜군이 가장 먼저 일본으로 보낸 전리품은 미학적 파격이 돋보이는 김해의 제기였다.
이 제기를 받은 풍신수길은 마치 조선을 완전히 정벌한 양 좋아 날뛰었다고 한다. 이 제기를 풍신수길은 자신의 최측근에게 전리품으로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이 제기를 본 일본의 영주인 '古田織部'라는 유명한 차인은 이 사발을 보고 지금도 유명한 일본의 도자기 중의 하나인 '古田織部야끼'를 창시하기도 했다.
풍신수길은 자신이 조선 땅에 입성할 때 타고 갈 배를 조성한다. 이 배의 이름을 고소마루(御所丸)라 한다. 풍신수길은 이 배를 타보지도 못하고 죽는다. 그 뒤에 풍신수길이 꿈에 그리던 조선사발을 상징하듯 조선에서 빚은 사발의 분류명이 고소마루라는 이 이름이 등장한다. 이것을 디자인하여 조선에 주문한 사람은 '古田織部'라고 알려져 있다.
임란 후 일본측과 교섭창구였던 동래부의 기록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왜인이 하도 차보시기를 만들어달라고 사정해 김해 사기장을 불러 양산의 산 속에서 빚어서 보냈다고 한다. 그 당시 기록에는 차보시기를 '茶器甫兒'라고 기록되어있다. 이 사발들은 양산 실타래 굽사발(일본명:도도야茶碗) 양산 토미사발(일본명:카키노헤타茶碗)이다. 양산실타래굽사발의 모델이 된 사발은 그 전에 '千利休'가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도도야는 千利休의 집안 직업을 의미하는 생선장수라는 뜻이다.
우리나라가 중앙집권제라면 일본은 지방분권제 였다. 그 당시 각 지방의 교역에서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것은 도자기였다. 이런 이유로 해서 일본은 납치한 조선의 사기장을 지역 요소마다 배치했다.
그리고 그 지방의 흙으로 사발을 빚게 하였다. 그 결과 일본은 각 지방마다 독특한 개성을 가진 도자기 마을이 형성되어 다양성 있는 도자문화가 형성되게 된다. 당시의 조선 사기장들은 대부분 사무라이 중에서도 높은 지위에 해당되는 신분을 보장 받았다. 또한 아리따에서는 이참평이라는 조선 사기장에 의해 백자 만드는 기술이 개발되어 일본에 자기시대를 열었으며 이 도자기는 전세계에 수출되어 일본이 경제대국이 되는 데 가장 큰 버팀목이었다.
임란 후 조선은 분청의 시대가 끝나고 관요인 분원가마를 필두로 해서 백자가 주로 빚어진다. 19세기말에 이르러 왜 사기의 직격탄을 맞고 한민족의 도자기는 더욱 더 우리 곁을 떠나갔다. 임진왜란에 이어 왜 사기는 두 번째 사발전쟁이었다.
임진왜란과 일본의 식민지 시대는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머리마저 세뇌시켰다.
우리는 우리사발을 막사발이라고 부르고 있다. 지금 우리들의 상황은 우리사발은 일본전문가의 눈을 통해 감정하려 하고 사발의 생산지를 일본전문가를 통해 확인하려 한다.
슬픈 일이다. 우리가 우리의 사발을 확실히 연구하고 분석하여 식민사관에서 기술된 우리사발의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임란 때 끌려간 사기장의 이야기도 일본인이 저술한 책에는 대부분 일본을 동경하여 스스로 왔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 당시의 시대상황을 무시한 일본인의 역사왜곡이다.
임진왜란은 분명 조선이 승리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을 도자기전쟁 아니 찻사발전쟁이라고 부르는 일본인의 속내를 알 것 같다. 조선은 정복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가장 원했던 도자기 즉 찻사발 전쟁은 이겼노라고.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우리 사발의 이름마저도 일본식이다. 과연 도자기 전쟁이 끝났는가? 잃어버린 우리사발의 역사와 그 속에 내재되어있는 미학적이고 철학적인 요소를 되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임진왜란 때 패배해 지금도 일본 식민사관에 중독된 민족이란 사실을 밝히고 싶다.
차를 마신 다음 찻사발을 감상할 때 찻사발을 정중하게 앞에 놓고 전체의 모양, 균형 잡힘, 앉음새 등과 총체적인 유약의 질감을 감상하게 된다. 그다음에는 손에 들고서 안과 밖의 유약의 발림, 그려져 있는 무늬 등을 보고 다시 뒤집어서 굽(고대)의 만들어진 모습을 자세히 관찰한 뒤에 다시 정면에 놓고서 그 전체를 본다.
바라보아서 막연하게 좋은 다완과 아름답게 보이는 다완이 있으나 각 부분을 검토하고 감상한 다음 다시 전체에 대하여 균형이 잡혀있는가 어느 모가 아름다운가의 맛을 느끼게 될 것이다. 다완이 손에 안기는 감촉과 무게나 크기 등은 어떠한지 감상한다.
굽 부근의 흙의 맛은 어떤지 소성 강도는 어떤지 관찰하여 딱딱한 맛과 부드러운 맛을 감지할 수 있으므로 소지의 선택도 중요하다. 또한 굽의 높낮이와 폭은 그릇의 조형미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굽의 폭이나 굽 내부의 깎음이 손의 촉감을 다르게 하며 작가의 심성과 수완도 현저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차는 오감(시각, 미각, 후각, 청각, 촉감)으로 마시기 때문이다. 또한 차는 오미(쓴맛, 단맛, 신맛, 짠맛, 떫은맛)를 맛보며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좋은 찻사발을 판단하는 기준은 한마디로 단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도다완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모든 도자기는 조형미를 좌우하는 성형 단계부터 마지막으로 불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소성 과정까지 제조공정이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특히 다완의 경우는 소지(태토)가 각기 다르므로 흙의 채도와 수비가 중요함은 물론 성형 기술과 장식기법 등의 테크닉과 도자기의 색상을 좌우하는 유약의 제조와 시유, 그리고 마지막으로 적정 온도와 소성 방법(환원염, 중성염, 산화염)에 따른 발색과 질감 등에 큰 차이가 있어, 이것들이 삼위일체가 되었을 때 명품이 탄생하게 된다.
다완의 명소는 정형상의 이유와 본질상의 경우에 따라서 명칭이 부쳐지게 되는데 여기서는 정형상의 경우를 먼저 밝혀 보기로 한다.
1 .형태
다완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생김새다. 그릇의 모양, 즉 형태에 따라 대부분 고유의 다완 이름이 붙여지고, 그 특유의 미를 좌우한다. 물레자국이나 손자국의 유무, 굴곡이나 요철에 따라서도 그 느낌이 달라지므로 가장 중요한 첫째 요소라 하겠다.
우물처럼 안쪽이 움푹한 이도형(井戶形)
펑퍼짐하게 벌어진 평형(平形)
아래위 넓이가 비슷한 통형(筒形)
역삼각형으로 퍼진 사발형(椀形)
그 다음으로 아오이도형(靑井戶)
윤형(輪形)
웅천형(熊川形)
삼형(杉形)
오기형(吳器形)
이도다완의 모든 부분을 꼼꼼히 감상하는데 특히 눈여겨 볼만한 곳을 게시키(景色)라 하여 약속 사항으로 규정해 두었다.
다완의 맨 위 끝에 해당하는 입술(구연, 전)을 경계로 하여 안과 밖으로 나뉘는데 안을 입술(구연) 내부라 하고 그 속을 차수건 자리(다건랍), 차솔 자리(다전랍), 차고임 자리(다유)라 하며, 밖을 입술(구연)의 외부라 하고 몸통(동), 허리(요), 굽 언저리(고대협), 굽(고대)으로 구분되고 굽은 굽안, 굽술(굽자리-접지부), 꼭지(굽 내부의 팽이 끝 모양)로 나뉘게 된다.
2. 다완의 전(입술, 구연부)
전은 차를 마실 때 입술이 닿는 자리이므로 형태 못지않게 매우 중요하며, 전의 젖힘, 삐침, 오그림 등에 따라 형태가 다른 느낌이 들뿐만 아니라 입술의 두께, 갈라짐이나 터짐 등에 따라서도 마시는 느낌 등이 다르다.
다완의 입술(구연,전,입) 빚음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보통 다완에는 약간 경사지게 보인 것도 있지만 입술(구연, 전)이 바르게 서 있는 것을 절립형(切立形) 또는 직립형(直立形)이라 하며 이 모습은 통형(筒形) 다완이나 반통형 다완에서 볼 수 있는 입술의 빚음이다.
입술(구연, 전)이 안쪽으로 기울게 빚어진 모습을 수구형(受口形, 안오금형)이라 하는데 보기에는 차를 마시기에 불편하게 보이지만 마실 때 차를 쏟을 염려가 없는 가장 안정된 입술(구연, 전)의 모습이다. 이와 반대로 입술이 바깥쪽으로 기울게 빚어진 모습을 외반형(外反形)이라 하며 고려다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대표적인 것은 웅천 다완이 있다.
이 모습을 한 다완으로 차를 마시면 입술 양쪽으로 쏟아질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천목 다완의 입술 빚음은 입술의 안 부분에 이중 턱이 지워져 있으므로 차를 마실 때 입가에 흘러온 차가 안쪽 턱에서 멈추어 한 번 숨을 죽인 다음에 부드러운 흐름으로 입 속으로 들어오도록 빚어진 입술(구연, 전)을 천목형이라 한다.
천목이란 말은 중국 천목산에서 제작된 자기에 붙여진 이름인데 여기에서 빚어진 다완은 입술 빚음의 특징뿐만 아니라 크기 유약의 상태 표면장식 등이 너무나도 완벽한 자기로 소성되었으므로 실용성과 유약의 변화된 경치라든가 질감이 부드럽고 따스한 맛은 없고 딱딱하고 차가우며 고고한 귀족적인 느낌을 주어서 함부로 취급할 수 없도록 보인다.
이에 반하여 완성된 것 같으면서도 미완성의 맺음으로 빚어진 이라보(伊羅保) 다완은 입술 맺음을 할 때 흙의 모자람을 보충하지 않고 끝맺음을 바로 해버리는 자국이 한두 곳 있는데 이것을 토절형(土切形)이라 한다. 대게의 경우는 충분한 흙을 빚어 올려 입술(구연, 전)을 바르게 맺음하게 마련인데 버릇에서 인지 아니면 성격에서 인지 부족한 흙으로 맺음을 하다 보니 그 맺음 자국이 바르지 못한 곳에서 나타내주는 미완성의 미를 찾도록 해 준 것인지 자연의 높고 낮음을 암시해 준 것인지 세상살이가 평탄하지 않음을 일깨워 주는 것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지만 어딘가 부족한 모습에서 미를 발견하도록 해주는 조상님들의 기지가 자랑스럽기만 하다.
특히 이라보다완의 특징스러운 입술 빚음이 이 토절에 있으므로 완벽한 편 보다는 한층 높은 미의 가치가 인정되고 있다. 아주 드문 경우이지만 소성시 서로 맞붙어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한쪽은 버리더라도 한쪽은 살려보려고 하면 붙었던 자국이 남게 된다. 이런 자국이 입술의 언저리에 있는 것을 화부형(火附形)이라 하며 이것 또한 하나의 볼거리가 된다. 전해지고 있는 고려다완 중에 화부형으로 유명한 것은 일문자오기(一文字五器) 다완이 있다.
다완을 빚을 때 입술(구연, 전)을 바르게 빚지 않고 높고 낮음을 주며 그 모습이 이어진 산의 다섯봉우리 같이 보이도록 빚어진 입술(구연, 전)을 오악형(五岳形)이라 하는 데 사람에 따라서는 파두(波頭)로 보는 경우도 있다. 다완을 만들 때 물레로 빚어 올린 맨 위 끝으로 이루어진 선이 입술(구연, 전)이므로 그 중요성은 당연한 것이며 이 입술 빚음의 교묘함과 서투름이 바로 다완 전체의 모습에 영향을 주게 된다.
물레 위에 적당량의 흙 반죽을 놓고 빚으면 다완의 일정 크기가 이루어 지지만 손가락의 놀림에 따라서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변화된 그릇이 나타나게 되고 그 입술(구연)은 손가락 끝으로 아름답게 손질된다. 이 입술(구연)의 변화는 품위 있게 되었다든가, 재미있게 되었다든가, 혹은 살의 두껍고 얇음에 달려 있게 마련이다. 물레에서 빚어지지 않는 다완의 입술(구연)은 손가락 끝의 놀림만으로 만들어지게 되어 자연히 높고 낮음이 산길과 같이 보여서 산도(山道)라 하며, 그 고저의 선을 바라보면서 즐기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입술(구연) 빚음에 가는 선이 파여 진 것도 있는데 이것을 통구(樋口)라고 한다. 이 작업은 잔손질이 다소 더해진 것일 뿐 결코 통구가 있다고 해서 좋은 작품의 다완이라고 할 수 없다. 입술(구연)에 흙을 두껍게 하여 둥글게 솟은 모양으로 빚은 다완이 있는데 이러한 입술(구연, 전)을 옥연(玉緣)이라고 한다. 무어라 해도 입술(구연) 빚음이 중요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다완 전체의 모습에 중대한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차를 마실 때 직접 입술이 접촉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구연(찻그릇의 입술)이 입술에 접촉되었을 때 다완의 감촉은 그 빚음에 따라서 크게 영향을 받게 된다. 그 교묘함과 서투름은 차체 하더라도 입술(구연) 빚음이 두꺼운가 얇은가에 따라서 차의 맛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얇을 경우 차 맛이 덜하게 되고 적당한 두께가 둥글게 솟은 모양의 것은 차 맛을 한층 더 맛있게 느껴지도록 한다. 부드럽게 둥근 모습을 지으며 탐스럽게 통통한 곳이 입술에 접촉되었을 때 어린아이의 볼에 입술이 닿는 감촉을 받게 되어서 먼저 마음이 끌리는가 하면 차가 혀끝에 흘러 들어오게 된다.
차를 마실 때 그 차를 마시기에 적당한 다완인가 아닌가는 대체로 그 입술(구연) 빚음의 두껍고 얇음에 따라서 선정되게 마련이다. 차를 마실 때 얇게 빚어진 다완은 환영을 받지 못하게 되는 데 실제에 있어서 두꺼운 입술(구연)의 다완에 뜨거운 물을 부었을 때 열이 전도되는 속도가 느리게 되는 좋은 점이 있다. 차를 마실 때 얇게 빚어진 다완은 열이 잘 전도되어 손으로 받쳐 들기 어려우므로 즐겨 쓸 수가 없다.
3. 다완의 안쪽
다완을 위에서 본 안쪽의 전체를 안속(내면)이라 하는데 일본에서는 견입(見込)이라 한다. 차를 마시고 다완을 바르게 놓아두면 아주 작은 양의 차가 남아서 다완의 안쪽 벽을 타고 내려와서 안 속의 밑바닥에 고이게 된다. 이것을 차고임 자리라고 하는데 다완을 빚을 때 다완의 안벽을 적신 차가 고일 것을 의식하여 밑바닥에 둥글고 작은 차고임 자리를 만드는 경우와 무의식적으로 손 빚음의 습관에 의하여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도다완의 차고임 자리는 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전자의 경우는 안속의 거울 같다고 하여 <안속의 거울>이라고 한다. 차고임 자리 주위나 그 속에 모래의 둥근 눈이 있는데 이것을 눈자국(눈박이)이라 한다. 그릇과 그릇을 겹쳐 소성한 다음 때어 내기 좋도록 하기 위해서 그릇과 그릇 사이에 모래 뭉침을 끼웠던 자욱이 남게 된 것이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모래 대신 장석을 끼워 소성하고 들어내면 그곳이 자국이 남게 되는데 이것을 돌눈이라고 한다.
장석은 소성하면 모래의 경우와 같이 그릇을 들어내기가 쉽다. 빛깔이 좋고 조형이 단정한 고려청자에는 모두가 돌눈이 자국이 있다. 모래나 돌 대신에 도자기 흙으로 둥글고 작은 떡을 빚어 그릇과 그릇 사이에 놓고 소성한 다음 그릇을 들어내면 안속의 바닥에 눈이 남게 되는데 이것을 눈자국이라 한다.
조선조 때 제작되었던 대부분의 도자기에는 눈자국이 있다고 해서 눈박이라는 관칭이 붙게 되었다. 눈박이 대접, 눈박이 사발, 눈박이 접시, 눈박이 다완 등이 그 보기이다.
다완을 빚을 때 도공의 손가락 빚음에 의하여 자연적으로 물이 소용돌이쳐 바깥쪽으로 도는 모양의 자국이 생기게 된다. 이것을 물레 자국이라 하며 다완을 손에 들었을 때 먼저 찾게 되는 경치의 조건이 된다. 차를 타려고 할 때 향이나 맛이 조금이라도 발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입술 빚음 바로 안쪽을 부드러운 곡선으로 부풀게 빚은 것은 차솔 자리라고 한다.
다완을 감상할 때에는 여러 조건의 경치들을 살펴서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여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다완의 안쪽의 여러 부분을 좀 더 상세하게 나눈다면 차수건 자리(다건랍), 차솔 자리(다전랍), 차고임 자리(다유)의 셋으로 구분된다. 차수건 자리란 다완에 사용하는 행주를 가지고 다완을 행주질 할 때, 차 행주 위에 엄지손가락이 닿는 부분을 말한다.
환상적으로 적갈색의 차심이 물들어 있는 곳이 차수건 자리이다. 차솔 자리는 차를 탈 때 차솔(다전)의 끝이 닿게 되므로 이러한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차솔 자리는 다완에 따라서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 것도 있지만 차고임 자리(다유)와의 경계가 분명치 못한 것도 있다. 다완의 안쪽 바닥 부분을 차고임 자리(다유)라고 한다. 이곳은 대부분이 약간 오목하게 파여져서 차를 마신 다음에 남은 차가 자연히 이곳에 모이게 된다. 차고임 자리도 단지 바닥의 중심일 뿐 명확하게 표가 나도록 파여져 있지 않은 경우도 있고 둥글고 깊게 파여서 뚜렷이 나타난 것도 있다.
말차를 차선으로 저을 때 거품이 고르게 잘 나게 하기 위해서는 다완의 내면 기울기(경사도)가 중요하다. 내벽은 가급적 물레 손자국 등이 심하지 않고 매끈한 것이 좋다. 이는 차를 깔끔히 마시기 위함이나 차를 마사고 난 후 찌꺼기 차의 흐름을 좋게 하기 위해서도 또한 그러하다.
내면의 장식이나 유약 질감 등은 차의 색과 잘 어우러져야 한다. 또 다완 한가운데 바닥이 움푹 들어간 자리를 차고임 자리라 하는데, 그릇을 포개 구울 때 붙지 않도록 괸 눈박이가 오늘날에는 오히려 차인들이 선호하는 볼거리가 되고 있다. 눈박이를 만들 때는 규석이나, 알루미나 또는 샤모트 등을 풀에 이겨 콩알만 하게 3~5개 정도 받치면 소성 후 때어 내기가 용이하다.
눈박이 없는 것이 사실은 상품에 속하고 눈박이 자국이 거칠고 두꺼우면 차선으로 저을 때나 다건(茶巾)으로 닦을 때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내면 바닥 부분의 차고임 자리는 평평한 것. 물레 손자국이 와형(달팽이 모양)인 것, 거울 모양(동전 크기의 원으로 바닥을 1mm 정도 낮추어 눌러 준 것을 거울 모양이나 보름달이라 칭하기도 한다)이 된 것이 있으며 이 또한 다완에 따라 제각기 다르다.
4. 바깥쪽
입술(구연,전)에서 굽(고대)까지 사이에 몸통(동), 허리(요), 굽언저리(고대협)가 있는데 여기에는 대부분 물레 자국을 볼 수 있는 곳이며 무늬가 있는 다완일 때는 거의가 이곳에 그림을 그려 넣는 곳으로 되어 있다.
다완의 몸체에 나타나 있는 자연스런 손자국, 물레질로 인해 생긴 손자국은 노련한 도공의 솜씨가 빚어낸 선의 예술이다. 다완의 허리와 배 부분을 스쳐간 손자국에서 부드럽고 자유로운 선이 주는 고요함을 맛본다.
다완의 허리부터 굽 사이의 예리한 휘둘림을 지탱하는 날카로운 각도에서는 무사들의 단호한 결단과 행동철학이 느껴진다. 다완의 바깥쪽은 입술(구연)을 분수령으로 하여 바깥 부분을 따라서 몸통(동胴)은 다완의 몸체에 해당되는 부분이며 차수건 자리의 바깥쪽 부분이며 바로 그 아래가 허리 부분(요腰)이며 허리의 밑부분을 따라 내려가면 굽언저리(고대협)부에 다다르는데 그 안쪽이 차솔자리(다전랍)의 부분이 된다. 다완에서 굽(고대)을 빼놓고 유약이 발라있을 때 흙과 유약의 경계를 유제라고 하는데 이 유제의 대부분이 굽언저리(고대협)이다.
5 굽(高台)
굽은 다완의 바깥 밑바닥에서 별도로 튀어나온 굽으로서 전체를 안전하게 받침해 주는 부분이다. 물레로 빚어진 다완은 대게 밑을 실로 자른 다음 굽(고대)을 빚어내고 있으며 얼마간의 건조 후에 굽 내부를 깎아내기도 하며 때로는 굽을 별도로 만들어 붙이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붙임 고대라 한다.
고대에는 크고 작음, 높고 낮음, 둥근 것, 네모난 것 등 종류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굽이 없는 다완은 있을 수 없다. 굽은 다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잘 알아 두어야 한다. 누구나 다완을 손에 들면 먼저 뒤집어 보는 것이 일반적인 습관처럼 되어 있는데 이것은 먼저 굽과 흙을 보고서 다완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하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발동하고 있는 것이다. 굽은 다완에 있어서 지구의 축과 같은 받침대이므로 다완의 생명이요 다완의 바른 앉음은 굽에 달려있다.
일반적으로 차인들이 좋아하는 다완이라면 일그러지고 비틀리고 울퉁불퉁한 것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그것은 차인들의 각자 생각에 따른 것일 뿐이다. 오직 완전한 다완에서 아름다움이 찾아진다는 사실은 말한 나위도 없다. 하지만 불완전한 것에도 아름다움은 잠재하고 있다. 완전한 것의 아름다움은 규격적이므로 변화가 적지만 불완전한 것의 아름다움은 불규칙적인 변화가 풍부하게 담겨 져 있다. 여운이라든가 여정은 물체 속에 잠겨 있어서 그 존재를 발견하는 것이지 완성되어 있는 곳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비뚤어지거나 굽어진 것이 재미가 있고 멋이 있다 하더라도 그곳에 튼튼한 뿌리가 내려져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차를 마시는데 굽 부분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하겠지만, 다완에서의 굽은 가장 관심 있게 감상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다. 굽 부분은 차를 마실 때 한 손으로 받치므로 그릇의 촉감을 느낄 수 있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굽의 높낮이나 넓고 좁음에 따라 전체의 조형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며, 몸체를 지탱하는 곳이다. 굽 내부도 평평한 것, 둥근 것, 와형인 것, 꼭지가 있는 것 등 다양하다. 굽 안의 꼭지는 너무 뾰쪽하거나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도 촉감이나 미관에 좋지 않다. 꼭지의 크기나 상태는 손끝으로 만질 때 성감을 느낄 수 있으면 가장 이상적이다.
굽 자리에는 눈박이 자국, 모래 받침, 돌 받침 자국 등이 있다. 굽 언저리에 매화피가 있어야 한다든지 굽 부분을 전혀 시유를 하지 않아 흙 맛을 나게 하는 것 등 그 방법도 다양하고 각기 다르다. 굽의 형태 또한 다완 마다 제각기 다르므로 굽깎이 또한 그 다완의 특성에 따라 걸맞게 해줄 필요가 있으며, 이는 말차를 즐겨 마시고 찻사발을 늘 상대할 때 스스로 느끼게 될 것이다.
즉 다완은 안정감이 있어야 하는데 그 안정감을 가지고 다완 전체를 받쳐주는 것이 굽(고대)이다. 따라서 다완의 가치 평가에 크게 영향을 주게 되며 도공도 굽(고대)을 잘 빚을 수 있어야 만이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것이다.
굽의 모양을 만드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좋은 굽을 만들기는 참으로 어렵다. 다완은 무의식, 무아지경에서 빚어진 것이라야 그 굽이 좋기 마련이다.
차인들은 만들어진 굽이 의식적 것에 구애받지 않고 잘 되어 있는 굽의 다완을 좋아한다. 굽은 안정성이 있어야 한다. 좀 높더라도 안정감이 풍부한 것이 있는가 하면 낮더라도 불안한 느낌을 주는 것이 있다. 또 아주 장중한 느낌을 주는 것이 있으며 경쾌감이 들도록 하는 것이 있다.
다완 및 굽을 보는 눈은 보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 다완을 감상할 때 처음 그 조형을 살피고 유약의 색깔, 확산 상태, 유리질 형성의 골 고름을 살핀 다음 뒤집어 밑면을 살펴서 굽의 있고 없음과 소지의 소성 상태를 관찰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완을 들었을 때 조형과 유약 상태 및 갖추어야 할 여러 조건들을 살핀 다음 뒤집어 보았을 때 먼저 눈에 뜨이는 곳이 굽이고 그다음에 태토의 상태를 보고서 다완의 본질을 판정하게 된다. 다완의 앉음은 굽에 달려 있으므로 굽은 다완의 생명이라고 하리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다완을 빚을 때 굽이 가장 어려우며 그 모양새도 여러 가지가 있어서 다완의 모습에 알맞은 모양의 굽을 빚어주어야 조형의 균형이 잡히게 되고 다완의 조형미도 한층 더해지게 된다. 다완의 조형은 어디까지나 시각적인 느낌에서 주는 아름다움의 추구이고 보면 굽도 먼저 외형적인 면을 살펴보아야 한다. 다완을 들고 굽을 보았을 때 그 안이 전부 채워져 일직선으로 무 자르듯이 보이는 굽을 <뒤 막힘 굽>이라 한다.
이 굽은 조선조 때 만들어진 다완, 보시기, 대접 등에서 자주 볼 수 있으며 중국의 천목 다완의 대부분이 이 모습의 것인데 그다지 굽이 높지 않고 다완의 뒤 중앙에서 솟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굽을 바닥에서 빚어 올린 게 아니고 뒤 막힘 굽에서 안쪽을 파서 굽 안쪽을 어느 정도 높인 것 같은 느낌의 굽을 <안 올림 굽>이라고 하며 조선조에서 빚어진 다완에서그 예를 찾을 수 있다.
다완을 빚은 다음 뒷면에 대(竹)의 마디를 중심으로 위아래 부분의 한 쪽 끝을 꼽아 넣는 것 같은 모양을 <대마디 굽>이라 한다. 다완을 뒤집었을 때 그 중앙에 대가 솟아나서 마디를 지나서 잘라버린 것 같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서인지 다인들은 누구나 대나무 굽에 매료되기 마련이다. 굽의 맨 밑 부분의 바깥쪽의 모를 죽이면서 경사진 면이 생겨난 것을 <모죽임굽>이라 하며 이라보 다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굽이고 조선조 때 빚은 다완에서도 간혹 볼 수가 있다.
굽 안쪽의 중앙부에 뾰쪽하게 튀어 오른 것이 표고버섯과 같이 보인다 하여 <표고버섯 굽>이라 하며 조선조 때 빚어졌던 다완들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으며 다인들이 다완의 중요한 조건으로 여기고 있다.
굽의 바깥쪽으로 물레 자국이 깊게 남아 있는 것을 <물레 자국 굽>이라 한다. 조선조 때 다완에서는 아주 보기 드문 굽이며 일본에서 빚어진 다완에서 간혹 볼 수 있는 굽의 모양이다. 굽을 측면에서 보면 다완의 밑뿌리에 붙여져 있는 쪽은 가늘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지름이 커지는 모양을 <발굽>이라 하고 조선조 때 빚어오던 오기 다완의 굽이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6. 유약
유약의 선택과 시유 방법은 매우 중요하다. 찻사발의 태토와 그릇 위의 기법이나 그림에 따라 유약의 어우러진 발색도 달라질 뿐 아니라 가마의 불길에 따른 변화 또한 각양각색이다.
다완 마다의 특징을 잘 고려하여 각기의 특성을 잘 살려야 제맛이 나고 명품의 가치를 얻지 않을까? 그러나 욕심은 금물이다. 가장 소박하고 자연적인 것이 가장 아름다운 미의 극치가 아닐까?. 물론 불의 심판이 관건이기도 하다.
유약이 뭉친 채 엉겨 붙어 있는 부분, 장작불에 그을린 부분, 불기운이 덜 닿아 색깔이 흐리거나 어두운 부분, 주걱이 지나간 자리, 물레를 돌리는 과정에서 생긴 무늬까지 시선이 닿는 곳은 한 곳도 빼놓지 않고 감상한다. 다양하고 풍부한 상상력과 섬세한 미의식이 정신세계를 더욱 정교해지고 오묘해졌다.
다완의 결을 부드럽고 아름답게 표현하려면 그릇의 모습을 빚은 다음 건조한 후 그 위에 잿물(유약)을 씌우던지 칠하여 구어 주는데 이를 <생 씌움>이라고 한다. 생 씌움은 흙과 유약의 얽힘 효과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태토 속으로 유약의 흡수와 흡착이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약의 뭉침은 매화나무 껍질(가이라기)모양의 유약 변화를 일으키기도 하고 또 흘러내리는 유약의 끝맺음이 방울을 이루어 구슬 모양이 되기도 한다.
이도다완에서 볼 수 있듯이 다완의 허리에서 굽에 걸쳐 나타나 있는 유약의 변화라든가 몸체의 안팎에 나타나 있는 유약의 방울 끝맺음과 같은 아름다움을 나타내 주기도 한다. 유약의 생 씌움과는 달리 그릇을 빚어서 건조하고 일차로 600~700에서 구운 다음에 유약을 씌워서 구우면 유약이 태토 내로 흡착되어 태토와 잘 얽힘으로서 실패를 줄일 수 있고 유약도 잘 확산된다. 그러나 공정이 더해지고 생 씌움에 비해서 얻어지는 다완이 요구하는 깊은 맛이나 텁텁한 맛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다완의 경우 그릇을 빚어 유약을 씌울 때 굽까지 흘러내릴 것을 예상하여 입 빚음에서 허리까지만 씌웠는데 불의 조건에 따라서 아래로 흐르지 못하고 다완의 허리나 굽의 윗부분에서 멈추게 되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온몸에 유약이 씌워지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것을 <허리 씌움>이라 한다.
웅천다완의 특징 중에 가장 먼저 살펴야 할 부분이 다완의 허리에서 굽 사이에 유약이 씌워지지 않고 바닥이 드러나 있으며 그 바닥의 색깔이 갈색인가 황색인가에 따라서 다르게 이름이 붙여지고 있다.
유약을 씌운 다음 다완을 가마에 넣어서 구울 때 가마 속의 온도가 올라감에 따라서 유약이 흐르게 되는데 다완의 허리쯤에서 유약의 방울이 둥글게 맺어져 영롱하게 남게 된 것을 <유약 맺음>이라고 한다.
다완을 빚어 유약을 씌울 때 세모꼴이나 일정하게 정해진 모양이 없이 유약이 발리지 않고 맨살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구우면 그 부분이 붉게 타서 창과 같이 되는데 이것을 <불의 창>이라고 한다. 다완에서는 이것을 감상의 조건인 경치로 여겨지는데 조선조 초기에 제작된 분청 다완에서 볼 수 있다. 유약을 묽게, 짙게 씌워 구운 경우와 서로 다른 종류의 유약을 다완의 표면 양쪽에 씌워 구운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씌움나눔>이라 한다.
앞의 경우는 이라보 다완의 대표적인 특징의 하나라고 하겠으며 뒤의 경우는 일본의 당진요에서 구어 진 조선 당진 다완이 있는데 한쪽은 흰색이고 다른 쪽은 검은색 유약을 씌워 구어 진다. 다완을 빚을 때 허리 부분과 굽 부분을 주걱으로 거칠게 긁어 버리면 표면이 터실터실하게 되는데 그 위에 유약을 씌우면 바닥의 흙과 융화가 잘 되지 않아서 유약이 말린다든가 구슬과 같이 맺히게 되어 매화껍질과 같이 보이게 되는데 이것을 유약의 <매화껍질 변화(가이라기)>라고 한다.
이 변화는 인위적인 것보다는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야 하며 이도다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약을 씌울 때 다른 유약으로 겹쳐 씌운 것을 <겹씌우기>라고 한다.
유약의 색깔에 깊은 맛을 주려고 한 작업이다. 다완에 있어서 피부의 유약 색이 비파의 열매 색을 띠는 것을 비파색이라고 하는데 다완을 소성했을 때 비파색을 띠는 것과 소성된 다완을 사용해 감에 따라서 자연적으로 변화를 일으켜 비파색을 띠는 것이 있다.
대게의 경우는 가마 속에서 산화염으로 소성을 하다가 환원염으로 바꾸면 고운 비파색이나 연한 주홍빛을 띠게 되며 이러한 피부색의 대표적인 다완이 이도다완이다.
이 색상은 다완의 피부를 아름답게 보이도록 할 뿐 아니라 색감도 따뜻하게 느껴지도록 한다. 또 태토에 따라서 다완의 피부색이 푸른색을 띠게 되는 것이 있는데 이 색깔의 이도다완을 청이도 다완이라고 한다. 선명하고 고아한 맛은 있으나 차가운 느낌을 주게 된다. 덤벙다완(粉引茶碗)은 다완을 빚어서 말린 다음 그 위에 부드러운 백토를 물에 잘 걸러서 안팍 전체의 면에 칠하고 다시 그 위에 유약을 씌워 소성하게 된 것이다. 조선조 초기에 고흥 가마, 보성 가마에서 구어진 덤벙 다완이 그 보기가 된다.
허리 부분까지만 적시되 허리부터 굽까지는 유약을 씌운 다음 소성한 것을 반 덤벙이라 한다. 반 덤벙의 다완은 조선조 초기에 무안지방에서 많이 제작되었던 것으로 다인들의 기호를 충족시킬 만한 다완이 더러 보인다. 다완을 빚어 백토의 물을 귀얄(刷毛)에 묻혀서 다완의 안팍을 칠하면 귀얄의 자국이 남게 되는데 그 위에 유약을 씌워 구운 것을 귀얄문 다완이라 한다.
귀얄문 다완은 바닥이 밝은 회색 위에 흰 귀얄무늬가 있는 것은 대게가 무안지방의 제작이라 하는데 좀 차가운 느낌이 나므로 정감이 쉬 가지 않고 짙은 회색 바닥 위에 흰 귀얄무늬의 다완은 김해 가마에서 구어진 것인데 색감이 따뜻한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살이 두꺼워서 후덕한 맛을 주기 때문에 마음이 끌리게 된다. 또 장식이 좋기로는 계룡산 가마에서 제작되었던 다갈색 바닥 위에 흰 귀얄무늬가 있는 다완이 있으며 그 위에 철사로 무늬를 그려 넣는 다완들도 있어서 다인들은 새로운 다완의 기법에 감탄해 마지 않는다.
쓰지미(土味흙맛): 도공이 가장 고심하는 유약의 상태와 흙의 성질을 감상하는 쓰지미(土味)는 단순한 다완의 감상을 넘어 전문적인 식견을 갖게 해준다.
도공이 그릇 전체에 골고루 유약을 입혔지만 유약이 묻지 않은 부분이 생길 수도 있다. 그 부분은 매우 추상적인 무늬로 남게 되는데 그릇의 태토(胎土)가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손의 촉감으로 흙의 질감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좋은 찻사발의 요건은 첫째가 흙의 선택이다. 태토의 뒷받침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유약이나 소성 조건으로도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같은 소지라도 환원염, 산화염, 중성염에 따라 발색이 완연히 다르므로 소성 조건도 잘 선택하여야 한다.
흙 색깔은 오랜 세월 차를 마시게 되면 찻물도 스며들고 산화현상 등으로 변하기 때문에 본래 흙색을 가늠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아무리 감추고 가리려고 해도 드러나는 진실이 있음을 깨달아 삶이 항상 하늘과 인간 앞에서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느끼게 해 주는 데, 이를 쓰지미세(土見)라 한다.
7. 이시하제
이도다완 중에는 다완의 표면에 작은 돌이 박혀 있는 것도 있다. 수비를 생략한 채 거칠게 기물을 만들었기 때문이며 흙 속에 들어 있는 작은 돌멩이가 불 속에서 굽히면서 겉으로 불거져 나온 것이다. 이 돌 박힌 부분을 이시하제라 이름 붙여놓고 감상한다.
인간의 삶이 평탄치만은 않은 것이고 살다 보면 뜻하지 않게 엉뚱한 행동을 하거나 세상과의 불화 속에서 고독하게 살 수도 있음을 이시하제에서 보게 된다. 그런 이단적인 삶도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는 자연의 손길임을 알게 된다.
8. 스나메(砂見눈박이)
그릇을 여러 층으로 포개어 구을 때 유약이 녹아 그릇이 서로 붙어버리는 것을 막아주기 위해서 그릇 안쪽 바닥에 깔아놓은 모래가 있다. 이 유착 방지용 모래는 가마 속의 온도가 높아지면 그릇 굽에 달라붙는데 이 모래 녹은 흔적을 스나메(砂見)라 한다.
이와 같은 목적으로 점토를 동그랗게 말아 그릇 안에 여러 개씩 놓고 그 위에 다른 그릇의 굽이 닿도록 포갠다. 소성이 후 익은 그릇을 떼어내고 나면 자국이 남는다. 이것을 눈박이라고 하며, 눈박이 감상을 메아도(目跡)라 한다.
다완의 미학
복사꽃이 활짝 피어 있는 풍광, 벚꽃이 만개한 아름다움이 다완의 잿물 바닥에서 은은하게 비치어 왔을 때 따스한 봄의 느낌을 전해주는 살결의 다완이 있는가 하면 가을 단풍이 불타고 있는 오색 창연한 빛깔의 살결을 가진 다완이 있어서 다인들은 빛깔이 주는 아름다움에 흡수되어 버리곤 한다.
다완을 오래도록 사용해 가면 차가 유약 속의 기포나 균열 사이로 스며 들어가 다갈색의 농담 변화에 의해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이를 차심이라 한다. 차를 즐기는 사람들이 모이면 다완의 표면이 차 색깔에 따라 변화되어 가는 경치를 보고서 그 다완을 품평하게 된다. 다완이 가지고 있는 색깔에 대한 감각적이고 심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다 보면 그 자체의 크기와 모습에 따른 실용성은 망각 되기 마련인데 다완은 실용성을 저버릴 수 없는 것이 특징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
다완의 크기에 따라 너무 커서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과거 농차용(濃茶用)은 좀 큼직한 다완이 많이 쓰여졌든 때도 있었다. 또 중간 크기의 것은 박차(薄茶)에 쓰기 좋다고 하였고 작은 다완 일때는 이것을 다상자용(대로 만든 상자 모양의 다도구)혹은 다롱(휴대 용구)용으로 적당하다고 하나 이는 용도를 구별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쓰는 사람들이 임의로 구별하여 썼다고 본다.
다완은 차를 마시며 예를 갖추고 아름다움을 즐기는데 사용되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므로 어느 조건에 구애를 받을 필요는 없다. 이도다완에서 절정을 이룬 다완의 미학은 다른 고려 다완들 즉 미시마, 하게메, 와리고다이, 긴카이, 고쇼마루, 고히키, 이라보, 고키, 한시, 힛센 등의 다완 감상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이 같은 이도다완의 미학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센노리큐 와비차의 영향이었다. 하나의 찻사발을 앞에 놓고 오른쪽에서 보고, 왼쪽에서 바라보며, 위에서 내려다보고, 아래에서 쳐다 본 사람은 일본 차인들을 제외하고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형형색색의 온갖 그릇들이 있어왔다. 그중에서 차를 마시는 데 쓰인 이도다완처럼 정밀하게 감상되고 극도의 호강을 누리며 진귀하게 대접받는 그릇은 없었을 것이다.
왜 이도라고 부르는가
이도다완이란 말이 처음 쓰인 것은 1578년 10월 25일이었다. 센노리큐 연보에 의하면 그날 열린 야부노우치 종화회에서 이도다완이란 명칭이 처음 쓰였고, 센노리큐도 그 찻잔을 그날 그곳에서 처음 보았다고 한다.
이날 이후부터는 고려다완이 아니라 이도다완이란 명칭으로 불리어졌다. 그러나 일본의 어느 기록에도 그 이유를 적어 놓지는 않았고 어떤 이론가도 그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하찮은 일에 까지도 시비를 가리고 진위를 다투는 일본인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대목이다. 바로 여기에 많은 비밀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도라는 말의 어원으로 내세워온 주장들은 매우 복잡하다. 먼저 그릇의 속이 깊은 우물 모양을 연상시킨다하여 이도라고 불렀다는 형태설이 있다. 이 설에는 우물 속에서 발견되었다는 주장도 포함되어 있다. 일본에서 가장 유력한 것으로 주장되는 것은 이도(井戶)라는 성씨를 가진 사람이 가지고 있던 그릇이라는 소지자 설이다. 이 설은 다시 몇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이도 와가사노가미(井戶若狹守)라는 자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병하였다가 막사발을 모아 일본으로 가져왔다는 주장이다. 이도다완이라는 공식 명칭으로 쓰인 년 대가 일본 다도의 집대성자 센노리큐의 연표, 센노리큐 사전에 의하면 1578년 10월 25일 야부노우치 종화회에서 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4년 전이어서 일치하지 않는다.
임진왜란과 조선 도자기에 관해서는 오노 겐이치로(小野賢一朗)가 한 유명한 말이 있다. 그는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불렀다. 임진왜란이란 1598년에 끝난 정유재란까지를 일컸는다. 정유재란 때 일본군 지휘관이었던 시마즈는 조선 침략의 주된 목표를 도공의 수색, 체포, 강제 납치에 두었던 인물이다. 그는 임진년에도 출병하여 조선 도자기와 도공 체포에 혈안이 되었던 자로도 유명하다.
두 번째는 이도(井戶)라는 성씨를 가진 대마도 사람이 조선에서 사발을 구하여 일본에 전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성을 따서 이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대마도 사람 이도의 성을 따서 붙였다거나, 흥복사 심부름꾼인 이도의 성씨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을 포함한 이도 관련설 모두가 1900년 이후의 기록이라면, 이도다완의 어원으로 주장하는 이도 설은 믿기 어렵다.
세 번째는 나라(奈良)에 있는 흥복사의 심부름꾼인 이도라는 자가 소장하고 있던 그릇인데 우연하게 세상에 알려졌다는 설이다. 당시 유명한 무사였던 쓰쓰이 준케가 이 그릇을 탐내기 시작했으며, 이도는 결국 이 그릇을 쓰쓰이 준케에게 넘겼는데 뒷날 준케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다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헌상했다는 설이다.
네 번째는 아라이 하쿠세키가 쓴 신서(紳書)라는 책에 기록되어 전하는 주장이다. 이도 산쥬로(정호삼십랑)라는 자가 조선에서 가져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진상했고, 히데요시는 이것을 소중하게 여겨 항상 이 찻사발로 차를 마셨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찻사발들을 이도다완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갖게 된 사발들은 대부분 그에게 진상한 사람 이름과 원인 시기가 기록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그릇의 이름이 지어진 까닭을 자상하게 남기고 있어서 히데요시와 관련된 찻사발들은 그 시대의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익한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이도 산쥬로가 진상했다는 그 사발은 히데요시가 다른 사람한테서 진상 받은 다완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히데요시와 관련된 이도다완 중에는 산쥬로가 진상한 다완이라던가 다완의 이름은 무엇이며 어떤 계기로 진상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진 것은 없다.
의심이 생기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도의 어원을 이도 산쥬로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관계에서 추론을 내려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이 설을 강한 의혹의 눈길로 볼 수 밖에 없는 것은 당대 최고 영웅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모든 가치 기준의 정점에다 놓고 이도다완의 역사까지 히데요시의 개인적인 취향을 극찬하기 위한 보조 장식품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또 다른 설은 경상도 지명설이다.
경상도에 있던 위등(韋登), 위도(爲度), 위동(爲東) 등의 땅이름이 일본어로 이도로 발음되어 이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이 설득력을 잃게 되자 이도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 그릇을 만든 곳이 우물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도(井戶)라는 일본말은 새미, 샘, 우물 등을 듯한다. 따라서 사발을 만들던 동네이름이 새미, 우물, 등과 관련된 지명이므로 이도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인데 이른바 새미골 설이다. 새미골이란 이름을 가진 곳에서 이도다완이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추론은 이도의 어원에 관한 주장보다 훨씬 큰 설득력을 얻고 있지만, 문제점도 적지 않다. 그릇을 굽는 가마 주위에는 크든 작든 우물이 있어야만 한다. 흙의 불순물을 걸러내기 위한 수비(水飛), 유약 만들기, 흙을 짓이겨 찰기를 생기게 하는 고막 뜨기와 물레질에는 반드시 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마터가 있고 우물이 있다는 것 만으로는 이도의 어원이 되기 어렵다. 만약 그래야 한다면 한국의 모든 가마터가 이도의 고향이 된다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도다완을 생산한 곳은 경남 진주를 포함하여 진주 동남쪽 해안지대라는 것은 일치된 견해다. 비록 안전한 이도다완과는 약간의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완전한 이도다완이 만들어지기 위한 전단계로서 이도다완의 제반 특성을 비교적 고루 갖추고 있는 파편들이 이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이도다완이 다른 다완 종류와 확연하게 구분 짓는 특징인 비파색 유약이 묻은 파편이 발견되었다는 보고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이곳을 이도다완과 계속 관련시키고 있는 이유는 굽 부근의 매화피 유약 변화를 중요한 근거로 삼기 때문인 것 같다. 굽 부분의 매화피 유약 변화가 이도다완의 중요한 특징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점을 중심으로 이도다완의 생산지를 찾는다면 백연리 새미골 보다 더 분명한 형태와 흔적을 지닌 곳이 두 곳 더 있다.
그중 한 곳은 사천시 곤명면 일대의 속칭 점골 가마터들이며, 다른 한 곳은 사천시 구룡요지이다. 또한 이도다완을 생산한 가마는 관요가 아니고 민요였을 것이라고 본다. 이 그릇의 만드는 모든 제작 과정과 태토의 사용, 유약의 결정, 도공의 물레질 하는 방법 등이 관요의 산물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16세기 이전 14세기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세 가지 전제 아래서 이도다완이 생산했을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지목할 수 있는 지역으로는 고령, 합천, 경주, 언양, 밀양, 창원, 양산, 진주, 진해(웅천), 김해, 사천, 하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도다완이란 이름으로 한국인 앞에 나타난 것은 일제 때이었다.
일본의 식민지로 치욕의 나날을 보낼 때 불쑥 나타난 이도다완은 엄청난 가격의 골동품으로 변해 있었다. 일본의 수집가들은 한국의 고분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가야는 물론 청동기 유물과 그 전 역사까지 도굴되었지만 정작 조선의 사발인 이도다완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옛 절터와 가마터를 찾아내어 파헤쳤다. 마침내 옛 가마터에서 막사발을 닮은 파편들이 발견되었다. 그 첫 지역이 웅천 부근이었다. 진해시 웅동면 두동리에 있었던 금곡요지(金谷窯趾)가 바로 그곳이다.
1930년 이전에 벌어진 이도다완의 흔적을 찾기 위한 이 광란은 진주, 경주, 김해, 고령, 합천, 하동, 고성, 사천 지역까지 샅샅이 훑고 지나갔다. 그러나 이 사발의 흔적은 없었다. 그러던 중 1938년 무렵 진주에서 완전한 모양의 사발 몇 점이 일본 수집상에게 발견되었다. 그 발견자가 <이토 마키오:伊東縝雄>였고 이도다완 생산지가 진주 부근일 것이라는 말도 그의 말이었다. 그 사발은 현재 야나기 무네요시가 세운 민예관(民藝館)에 보관되어 있다.
그 사발이 웅천 금곡요에서 만든 것인지 진주 부근 어느 가마에서 제작된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결국 고분에서는 사발이 발견되지 않았고 웅천과 진주에서 사발 파편과 완제품이 발견된 사실을 근거로 사발은 왕이나 지배계층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과 사발을 만든 가마가 한반도 남쪽 지역이라는 것, 관요가 아닌 민요에서 빚어졌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사발이 하층민의 그릇이라는 증거도 없고, 진주와 웅천에서 만들었다는 기록도 없으며, 관요로 지정된 지명에 없다는 것만으로 민요라고 주장하는 것도 여전히 성급한 생각들이다.
1537년 9월 12일부터 일본 차회 기록에 나타나기 시작한 고려다완 중에서 순수한 고려청자 찻사발을 제외한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그릇들의 경우 조선에서 불린 고유한 명칭이 무엇이었는지를 기록한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미시마:三島>,<하게메:刷毛目>,<긴카이:金海>,<운가쿠:雲鶴>,<고비키:粉引>,<이라보:伊羅保>,<힛센:筆洗>등 처음부터 일본 차인들의 도안까지 곁들이 주문으로 생산되었기 때문에 그릇의 이름 또한 그들의 뜻대로 붙인 조선 그릇도 있었다.
이도다완이라는 말이 최초로 쓰인 것은 1578년 10월 25일로 되어 있다. <센노리큐 연보>에 의하면 오다 노부나가가 주체한 차도회인 <야부노우찌:藪內> 종화회(宗和會)에서 이도다완이란 말이 처음 쓰였고 센노리큐도 그 찻잔을 그날 그곳에서 처음 보았다고 한다. 센노리큐는 그때 이미 노부나가의 차도 스승으로 존경받고 있었다. 1578년 훨씬 이전부터 고려다완이라고 불리며 사용되어 온 사발이 왜 이때부터 이도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을까? 그때 히데요시는 1577년부터 노부나가의 명을 받고 산인·산요 지방으로 정벌을 나가 있었다. 1578년 10월 15일 노부나가가 주최한 차도회가 열리기 10일 전에 히데요시와 센노리큐는 처음 만난다.
1581년 6월 12일 하리마 구니의 히메지성을 공략한 다음 센노리큐에게 <아와레가마:霰釜>라는 찻잔을 선물로 보냈다. 같은 해 12월 23일 노부나가는 히데요시 전공을 포상하는 성대한 잔치를 베풀면서 <고아와레가마:小霰釜>라는 찻잔을 상으로 내린다.
그로부터 여섯 달 뒤인 1582년 6월 2일 불만을 품은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의 반란으로 혼노지에서 불을 지르고 불 속에서 노래를 부르며 죽었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미쓰히데 군을 격파하고 1582년 11월 7일 센노리큐는 제자들과 함께 정식으로 히데요시가 초청한 다도회에 참석하여 히데요시의 차도 스승이 되었다.
이도 다완의 제작과 가마터
분청사기(粉靑沙器),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라는 용어를 1963년 그의 유명한 논문 <고려자기와 이조자기> 글에서 처음으로 붙여준 사람은 고유섭이다. 퇴락해 가던 14세기 상감청자가 큰 변화를 겪으면서 서서히 탈바꿈한 그릇이다. 약 200년간 생산되었던 분청사기는 한국 도자기 역사상 가장 순박하고 정감 어린 토속성이 강렬하게 풍기는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이도다완의 제작 시기를 분청사기가 유행했던 시기와 같다고 보는 것은 이도다완의 형태, 태토, 유약, 제작 기법 등이 고려청자와 조선백자와는 판이하고 분청사기와 유사한 면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만 하지만 분청사기의 제작 기법을 아무리 살펴봐도 이도 다완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형태와 유약의 기법, 색채와 희소성 등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어찌 된 이유인지 일본이 소장하고 있는 이도다완의 전체 수는 약 200점 남짓이고 한국에서 발견되고 있는 수 또한 일본보다 결코 많지 않는 실정이고 보면 밥그릇이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억지일 가능성이 크다.
설령 분청사기와 같은 시기에 제작되었다 하더라도 이도다완의 오묘한 기법은 분청사기와는 다른 차원에 속하는 특별한 것일 수 있다. 임진왜란 이전에 어느 일본인이 조선에서 가져간 것이 분명한 그릇 이도다완. 일단 진주의 동남쪽인 것은 거의 확실한데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현재 일본에 남아있는 이도다완은 오직 한 곳의 가마에서 만들어졌고 비슷한 시기에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견해가 유력하다는 것이다. 일본 차인들은 이도를 크게 오이도(大井戶), 고이도(小井戶), 아오이도(靑井戶)로 구분했다. 무엇보다 그릇의 크기로 구분 지었지만 크기에 못지않게 색깔과 형태 또한 중요한 분류 기준이었다.
1. 오이도(大井戶)
전체적인 크기가 크고, 굽도 높으며, 한마디로 당당하고 호쾌한 자태의 다완이다. 소지는 철분이 많고 내화도가 강한 사토질이며 가벼운 흙이 좋다. 즉 빚어진 것은 두툼하고 무거워 보이나 정작 들어 보면 보기보다 가벼운 느낌이 드는 흙이 좋다. 시유는 얇게 하여 태토의 발색이 잘 나타나는 것이 바람직하며 산화 소성을 하여 비파색 일수록 정감 있고 더욱 진중하게 여긴다. 그릇의 깊이는 우물처럼 깊고 차고임 자리가 와형(渦形)으로 있으며 깊은 느낌을 주기 위해 내면의 경사도를 급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적절한 기울기에 유의하여야 한다. 외면(바깥면)에 굵고 강한 물레 손자국을 몸통 가슴 부위까지 4~5단 자연스럽게 주어 강한 인상을 갖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차를 마실 때 네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물레 자국과 조화를 이루어 기분 좋은 촉감을 느끼게도 한다.
이때 물레 자국을 내면에는 생기지 않고 매끄럽게 하는 것은 차 마심의 흐름을 좋게 하기 위함이다. 특히 농차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굽의 폭과 높이는 그릇의 조형미를 좌우하는 요소가 되므로 각별히 유의하여 굽을 깎아야 한다. 굽의 외면은 대나무 마디로 당당함이 돋보이고 굽 언저리에는 유약 말림 현상이 있어야 하는 것이 이도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이를 매화피(가이라기)라고 부르는데 그 당시 일본의 차인들은 지배계층의 상인들이거나, 무사 계급이 우월적 지위에 있었던 시대로 일본 무사들의 도검에 있는 손잡이 부분의 철갑상어 가죽 느낌과 흡사하여 더욱 더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매화피의 주원인은 굽 칼로 깎은 부분이 까슬까슬하여 시유를 하면 유약 말림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매화피 발생을 위하여 고의적인 방법이나 이중 시유 등을 할 수도 있으나 굽을 깎는 상태가 좋으면 자연히 매화피가 일어난다. 적정 온도의 불 속에서 자연스럽게 피어난 매화피가 더욱 자연스럽고 정감이 가므로 인위적인 분위기가 아닌 있는 그대로 자연미가 나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다.
기자에몬이도
2. 츠츠이츠츠(筒井筒)이도
<쓰츠이츠츠:筒井筒>라는 이도다완이 있다. 이 다완은 <쓰츠이 준케:筒井順慶>가 히데요시에게 바친 것이다. 쓰츠이 준케는 <다이와군산:大和郡山>의 성주였다. 히데요시가 야마자키(山岐) 전투를 시작하면서 <쓰츠이 준케>에게도 함께 참전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중도 관망파인 <쓰츠이 준케>는 전세를 지켜보다가 강한 쪽에 붙어 살아남겠다는 속내로 히데요시의 명령에 불응했다. 그런데 히데요시가 전투에서 이겼다. 참전하지 않았던 <쓰츠이 준케>는 사죄하는 뜻으로 이도다완을 헌상했다. 히데요시는 매우 기뻐하면서 그를 용서해 주었다.
1588년 10월 기타노(北野)에서 열렸던 차회에서 히데요시는 직접 차를 달여 이 다완에 담아서 농차로 마시기도 했다. 그날 차회가 무르익었을 때 초대된 한 손님이 이 다완을 떨어뜨려 다섯 조각으로 깨졌다. <센노리큐>에 의해서 수리된 이 다완에 대한 히데요시의 마음은 더욱 각별했다. 격조와 중후함에서 기자에몬과 쌍벽을 이루는 명물이다. 오히려 찻잔이 지녀야 하는 높은 격조로는 기자에몬을 능가한다는 평을 들어왔다.
3. 호소가와(細川)이도
호소가와 산사이(細川三濟)가 소지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매화피가 일품이다. 크기는 큰 편이며 매우 단정하면서도 부드러워 품격이 높은 사발이다. 호소가와는 무사이자 차인이었으며, 후에 입학다완(立鶴茶碗:다찌츠루)을 만들게 되는 장본인이다. 서 있는 학의 그림을 견본으로 조선에 주문하여 입학다완을 만들게 했다고 한다.
4. 고이도(小井戶)
고이도는 글자 그대로 오이도 보다는 크기가 좀 작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굳이 비교한다면 오이도에 비해 기벽이 얇고 물레 자국이 가늘고 약하며, 총체적으로 기교미가 있어 온아하고 화사하며 보다 정숙한 맛이 있다고 하겠다. 태토, 유약, 작풍, 균열, 매화피 등이 오이도와 동일하여 같은 시대, 같은 가마에서 같은 사람이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 사람의 도공에 의해 빚어지고 한 군데의 가마에서 한꺼번에 구워졌다는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5. 아오이도(靑井戶)
소지에 철분 함유량이 오이도나 고이도 보다 많아 청회색의 유조를 띤다. 중성염의 수성 탓도 있을 것이다. 오이도와 고이도의 식별 구분은 애매한 곳이 많지만, 아오이도는 확연히 구별된다. 유약의 질감이 비파색과 대비하여 푸른기가 감도는 부분이 있을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넓게 바라진 형태이며, 상대적으로 굽 높이는 낮은 편이다. 아오이도의 소지는 오이도와 다르므로 동일한 가마에서 제작된 것은 아닌 듯하다. 이들 다완 중에서 가장 공통점이 많은 것으로 지적되어 온 것은 아오이도(靑井戶)다. 실제로 마노이이도(山井井戶), 구모이이도 (雲征井戶), 우지이도(宇治井戶), 호주안이도(寶樹庵井戶)는 서로 매우 닮아 한 도공의 작품으로 보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 가마 안에서도 땔감의 종류, 바람의 세기, 화염의 성질 등으로 색깔과 모양이 변하는 요변이 생겨서 조금씩 다른 개성을 지니게 된다. 이와 같은 그릇의 특성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것은 유약이며, 유약에 사용된 장석의 성질이 예민한 경우와 그렇지 않는 경우에 따라 요변의 폭은 더욱 커진다. 이도다완을 생산한 가마는 관요가 아니라 민요였을 것이라고 본다. 이 그릇을 만드는 모든 제작 과정과 태토의 사용, 유약의 결정, 도공의 물레질 방법 등이 관요의 산물로는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이도다완을 생산한 곳은 경남 진주를 기준으로 볼 때 진주를 포함하여 진주 동남쪽 해안지대라는 것이 일치된 견해이다. 그리고 16세기 이전 14세기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견해다. 이 전제하에서 이도다완을 생산했을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고령, 창원, 진주, 진해 웅천, 김해, 사천, 하동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도다완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14~16세기까지 이곳들은 모두 관요지 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천만을 사이에 두고 서쪽과 동쪽으로 나뉘어 있는 사천은 곤명, 곤양, 서포, 진교, 나아가 하동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 모두가 관요 체제로 운영되었고 동쪽의 구암도 고려 때부터 전형적인 관요였다. 진주 동남쪽 민요이면서 14~16세기에 그릇을 구웠던 가마는 어디에 있을까? 이도다완을 만든 가마가 있기 위한 세 가지 추정 조건을 갖춘 곳은 다섯 곳이다. 진주, 사천, 하동, 김해, 웅천, 이 다섯 곳에 모두 유서 깊은 가마터가 있다. 이 중에서 1965년 이후 줄곧 이도다완 생산과 관련하여 거론되어 온 곳은 세 곳이다. 진해시 웅동면 두동리 보배산 계곡 압박골의 금곡요지(金谷窯趾), 하동군 진교면 백연리 사기마을 일명 새미골, 진주시 수곡면 효자리 가마터이다. 금곡요지에서는 이도다완의 특징을 지닌 파편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하동군 진교면 백연리 새미골에서 수집된 도자기 파편들 속에는 귀얄무늬 분청, 상감분청, 인화문 분청, 순백자가 있었다. 그리고 분청류 굽 부근에 매화피 형상의 유약 변화가 있었다. 이도다완을 다른 다완과 확연히 구분 짓는 비파색 유약이 묻은 파편이 발견되었다는 보고는 아직 없다. 그런데도 이곳을 이도다완과 계속 관련시키고 있는 이유는 굽 부근의 매화피 유약 변화를 중요한 근거로 삼기 때문이다. 굽 부분의 매화피 유약 변화가 이도다완의 중요한 특징인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점을 중심으로 이도다완의 생산지를 찾는다면 한 곳은 사천시 곤명면 일대의 속칭 점골 가마터들이고, 다른 한 곳은 사천시 사남면 구룡리 구룡요지(九龍窯趾)다. 이곳에는 이도다완의 특징을 지닌 파편들과 일제 치하 때 발굴된 완제품도 몇 점 남아있다. 분류하기 몹시 애매하다는 나라이도(奈良井戶)의 태토처럼 철분이 많이 섞인 거친 흙, 이시미즈이도(石淸水井戶), 호주안이도(寶樹庵井戶), 구모이이도(雲征井戶), 가스가노이도(春日野井戶), 다나카이도(田中井戶) 등 아오이도(靑井戶)의 태토와 동일한 흙과 비파색 바탕 위에 푸른색과 붉은색을 은은하게 내뿜는 유약과 유사한 흙은 진주 동남쪽 남해안을 낀 몇몇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일본이 끌고 간 대표적인 사기장은 조선 전역의 명인들이었다. 충청도의 이삼평(李參平), 사천의 전계(奠階), 고령의 하루산(八山), 남원의 종전(宗傳)과 백파선(百婆仙), 김해의 신무신(申武信), 남원의 박평의(朴平意), 변방중(卞芳中), 웅천의 이작광(李勺光) 등이었다. 이도 다완을 광적으로 수집했던 히데요시가 죽은 뒤 등장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 사기장을 이용하여 일본의 국익을 늘리는데 더 세심한 정책을 구사했다. 1600년대로 접어들자 조선 사기장들은 가라쓰 시대를 끝내고 이른바 일본 천하의 7대요 시대로 접어들면서 재편성되었다. 사가 나베시마번의 가라쓰야키와 이마리야키, 후쿠오카 구로다번의 다카도리야키, 부젠 호소가와번의 아가노야키, 사쓰마 시마쓰번의 사쓰마야키, 히젠 오무라번의 하사미야키, 히라도 마쓰우라번의 나가노야키, 나가도 모리번의 하기야키가 그것이다. 7대 요 중에서 센노리큐의 제자이자 당대 최고의 차인이었던 고호리 엔슈, 호가와 산사이,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세 사람은 끌려온 조선 사기장들 중에서 이미 솜씨를 인정받은 세 명의 사기장을 맨 먼저 손에 넣었다. 고호리 엔슈는 고령에서 끌려온 하루산을 데려가 다카도리야키(高取燒)를 열었다. 호소가와 산사이는 사천에서 끌려온 전계를 데려가 아가노야키(上野燒)를 열고 모리 데루모토는 이작광을 선택하여 하기야키를 열었다. 조선에서 끌려가 일본 귀족들의 차 생활을 위한 도자기를 만든 대표적인 세 가마가 시작되었다.
이도다완의 신비
이도다완의 태토와 유약은 서로 화응하는 관계에 있다. 분청사기처럼 백토 분장이란 과정을 거치지도 않았으며 여러 종류의 재료를 섞어 만든 유약을 사용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흙인데도 마를 때 밑바닥이 갈라지거나 굽는 과정에서 터지고 불거지지도 않는 태토였으며 유약도 태토가 있는 근처의 장석과 나무 재로만 만들어 썼던 것 같다. 태토와 유약의 평이함과 단순함이 곧 이도다완의 비밀 아닌 비밀인 것 같다. 따라서 태토의 조합성, 유약 제조의 어려움, 문양 만들기의 전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삼는 분청사기와 지극한 단순함을 비결로 하는 이도다완의 세계는 동일하지 않다. 각각의 그릇이 지닌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태토 유약 기물 만들기에서도 다르다. 특히 그릇의 양식으로 살펴볼 때 분청사기와 이도다완은 전혀 다른 기원에서 비롯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분청사기의 양식은 상감청자를 그 모체로 삼고 있다. 상감청자의 기본 양식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으면서 세부적 기법과 문양 색채에 변화가 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양식 면에서도 얼마간의 변화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기본 양식을 유지하는 범위 안에서 그러한 변화가 이루어졌다. 변화의 주된 원인은 그릇의 실용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불필요한 장식을 단순화 시키거나 크기와 높낮이를 조절한 것이다. 분청사기 이후 17~19세기 그릇의 양식도 분청사기나 상감청자의 기본 양식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발달했다. 따라서 이도다완은 분청사기와는 전혀 다른 그릇이다. 그 연원이 다르고 유약과 문양 색채와 양식도 다르다. 더욱이 이도다완은 분명 서민들의 생활 잡기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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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동주 조선 막사발 천년의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