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아이

순수했던 때에, 나도 함께 빛나는 동경(同耿)을 경험했다.

by 지혜씨


초등학교 때였다. 우리 반에서 가장 조용한 아이는 마른 몸 위로 늘 깨끗한 옷을 입던 재원이였다. 지혜는 교실에서 재원이가 책을 읽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척'이라고 하기에는 빈도수는 꽤 잦았고, 꼬투리를 잡기에는 사실 청소년 책을 읽는 재원이를 동경하는 마음이 더 컸다. 그냥 누가봐도 책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지혜는 재원이만큼 수줍은 미소를 짓는 사람을 보지 못했는데, 책을 자주 읽는다는 사실 때문인지 왠지 납득이 갔다. 내가 가지지 못한 점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어두운 피부가 콤플렉스여서 선크림을 아침마다 바르던 지혜는 재원이가 웃을 때마다 하얀 얼굴에 찍힌 작은 점이 위로 올라가는 움직임을 좋아했다. 시간이 지나 재원이와 지혜는 많이 친해졌다. 그 시간동안 재원이는 또래의 아이들보다 허스키한 목소리를 가진 친구임도 알게 되었다. 쉬는 시간에 4명씩 둘러앉아 공기놀이, 우유곽으로 접은 딱지치기도 하면서는 그녀가 재치있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재원이는 내가 머리로 상상한 책을 좋아하는 사람 중 누구보다도 멋진 친구였다.


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왔다. 여름 방학이 지나고 다시 돌아온 2학기. 새 학기가 시작되고 며칠되지 않은 어느 날, 반 아이들 모두가 책상이 앉아있는 아침이었다. 선생님은 재원이를 앞으로 부르셨다. 걸어나온 키큰 재원이의 손에는 노란 표지의 종이 꾸러미가 안겨있었다. 선생님이 재원이의 어깨를 살포시 감싸자 재원이는 수줍은 얼굴을 아래로 내렸다. 앞으로 나오라고만 시켰는데 학생이 종이를 가지고 나오는 상황은 뭔가 낯설었다. 두 사람은 사전에 무슨 대화를 나눴던 걸까. 이게 무슨 일일까. 더 깊은 생각을 하기도 전에 선생님은 자랑스러운 말투로 입술을 떼셨다.


"재원이가 방학동안 짧은 소설 한편을 썼대. 반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해서 반 뒤 사물함에 올려놓을 건데 친구가 쓴 글이니 소중히 다루고, 소설은 사물함 위, 그 자리에서 읽는 걸로 하자".


선생님의 말에 나는 많이 놀랐고 치켜세운 눈썹 아래 커진 동공으로 재원이를 쳐다봤다.


"재원이,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 있니?"


선생님의 말에 재원이는 낮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몇 마디를 더하였고 말의 끝에는 옅은 미소를 띄었다.

나는 재원이가 자랑스러웠다.


"자 박수~ 재원이는 들어가".


아이들의 박수 속에 재원이는 자리로 돌아갔다. 고개를 떨구며 미소를 숨기는 재원이를 보며 나는 내심 반 친구들의 박수소리가 아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컸더라면 재원이는 더 부끄러워했겠지. 1교시가 시작되었지만 나는 재원이에게 너가 얼마나 멋진 친구인지, 내게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알려주고 싶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친구 몇명이 재원이 근처로 다가가 말을 걸었고 몇 아이들은 교실 뒤편 사물함으로 가 종이를 뒤적거렸다. 다음 쉬는 시간에는 그 종이가 글로 얼마나 채워졌는지 보기 위해 즉, 재원이가 얼마나 대단한 친구인지 보기 위해서 뒤로 갔다. A4 용지에 문단이 나눠진 글. 작은 글자. 꽤 많았던 페이지 수를 확인했다. 지혜는 종이를 일정한 리듬, 순서없이 엄지 손가락으로 촤르륵 펼쳤다. 지혜가 종이 옆에 오래 붙어있었던 까닭은 재원이에게 너의 글에 큰 관심을 가진 독자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알리는 나만의 노력이자 응원이었다. 책을 멀리하던 지혜지만 초반 한 두문장을 읽었던 까닭은 문장이 정말 단어로 이루어진 정상적인 문장임을 확인하는 과정으로, 재원이가 미래에 큰 사람이 될거라는 확신에 종지부를 찍는 마지막 단계였다. 집에 돌아간 나는 이런 멋진 아이가 같은 반 내 친구임을 엄마에게 자랑했다. 책을 읽을뿐만 아니라 쓸 줄 아는 친구가 내 친구라고.



재원이의 아버지가 출판사 사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내가 마치 신의 딸과 친구가 된 사실인 기분이 들었다. 지금이었다면 약간은 배아팠을지도 모르겠다. 환경부터 피부색, 키, 취미.... 재원이와 나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초등학생 지혜는 이를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신기하게도 그 차이점으로 재원이를 동경했다. 스스로가 비참해지는 동경 말고 그 옆의 나도 함께 빛나는 동경()을. 그런 재원이가 목소리만큼 또박또박한 자음과 몸만큼이나 길쭉한 모음으로 내게 친밀한 편지를 쓴다는 것은 더 완벽했다. 재원이의 아름다움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현재의 내가 그녀를 기억하며 깨달은 바이다. 수많은 연인들이 통상적으로 묻는 당신은 나의 어떤 부분이 좋냐며 묻는 그 질문이 순수하지 못한 질문임을 여기서 깨닫는다. 정말 순수한 사랑은 좋아하는 이유가 확실하지 않거나 너무도 사소한 것, 혹은 질투가 없는 사랑이리라.


오랜 세월이 지나 내가 글을 쓰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는 것은 오랜 기간의 나와 비교할 때 참 신기한 일이다. 글쓰기책을 읽던 중에 잠시 어릴 적 내가 튀어나와 집중력을 흐트렸고 페이지에 적힌 '글쓰기'라는 단어를 보며 재원이를 떠올렸다. 재원이. 순수했던 아이의 기간은 끝났지만 그때를 추억할 때 어린 나의 곁에 있던 재원이와 같은 주인공들에게 고마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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