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1열

by 시노

그 시절, 집집마다 TV는 있었지만

선명하게 나오는 집은 많지 않았다.

비라도 세차게 쏟아지면 안테나는 금세 삐딱해졌고,

그럴 때면 친구 아버지는 지붕 위에서

“거기야! 그대로 있어!” 하고 소리쳤다.


신호가 ‘탁’ 하고 맞는 순간,

작은 브라운관 속으로 멀고 낯선 도시의 불빛이 스며들었다.

손바닥만 한 화면이었지만

그 안의 세계는 끝없이 넓어 보였다.


해가 지면 동네 아이들은

약속하지 않아도 한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따라 화면이 덜 흔들리고 소리가 잘 들리는 집,

우리에게 그 집은 잠시 빌린 극장이었다.


현관 앞엔 신발이 엉켜 있었고,

작은 방에는 숨을 죽인 아이들이 둥그렇게 앉았다.

누구는 책가방을 멘 채로,

누구는 아직 숙제도 못 마친 얼굴로

그저 TV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날 우리의 관심사는 수학 문제도, 단어 시험도 아니었다.

곧 시작될 외화 한 편이면 충분했다.

맥가이버는 볼펜 하나로 위기를 넘겼고,

A특공대는 낡은 트럭으로 악당을 몰아냈다.

기동순찰대는 어둠을 가르며 달렸고,

머나먼 정글의 병사들은

지도에도 없는 전쟁터를 헤맸다.


우리는 영어를 몰랐지만

성우의 목소리는 모든 장면을 이해하게 만들어주었다.

굵은 저음으로 울리던

“이제 우리의 임무가 시작이야.”

그 한마디면 됐다.

단단한데도 이상하게 따뜻한 목소리가

장면과 장면 사이의 빈틈을 메워주었다.


자막은 몰라도 마음은 다 알아들었다.

그게 우리 세대가 처음 만난 교실이었다.


화면 속 세계는 멀고 낯설었지만,

그 안의 자유와 유머, 용기의 온도는

왠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어딘가로 갈 수 있을지도 몰라.’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무도 모르는 사이 마음 한쪽에서 자라나던 시절이다.


외화가 끝나면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 밖으로 뛰어나갔다.


“오늘은 내가 A특공대 할게!”

자전거는 키트가 되었고,

까만 쓰레기통 뚜껑은 방패가 됐다.

누가 봐도 어설픈 흉내였지만

그 흉내 속에서 우리는

세상의 모양을 하나씩 따라 그려보고 있었다.


주말이 되면 공기의 결이 달라졌다.

‘주말의 명화’, ‘명화극장’ 음악이 흐르면

친구 집 작은 거실은

순식간에 동네 유일의 영화관이 되었다.


검은 화면 위에 흰 글씨가 떠오르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말했다.


“지금부터 명화극장을 시작하겠습니다.”


어른들은 말없이 자리를 잡고 앉았고,

아이들은 그 옆에서 조용히 숨을 죽였다.

리모컨도, 다시보기 버튼도 없던 시절이라

한 장면이라도 놓치면 다시 볼 수 없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시간만큼은

누구도 일어나지 않았고,

누구도 괜히 말을 섞지 않았다.


평일의 외화는 세상의 넓이를 알려주었고,

주말의 영화는 사람의 마음을 가르쳐주었다.

말보다 표정으로, 자막보다 목소리로

우리는 세상을 배웠다.

느렸지만 오래 남는 배움이었다.


밤이 깊어 방송이 모두 끝나면

화면 한가운데 작은 흰 점이 남았다.

그 점이 사라질 때까지

아이도, 어른도 쉽게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 잔광이 유난히 오래 남았다.

아마 그게 꿈의 잔상이었을 것이다.

친구 집 작은 거실,

방 안 가득 모여 앉아 브라운관을 바라보던 그 시간은

어느새 내 어린 시절의 한가운데가 되어 있었다.

그땐 몰랐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서로 다른 학교로,

다른 도시로, 다른 방구석으로 흩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그날그날이 마지막 방학처럼

조금 더 소중했을 거라는 걸.


TV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었다.

세상을 조금 더 믿게 만들어준

작고 조용한 등불이었다.


세상은 훨씬 더 밝아졌지만

그때보다 덜 따뜻하다.

한 화면을 사이에 두고

같은 장면을 함께 바라보던 방구석 1열은 사라지고,

이제는 각자의 손안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본다.


그럼에도 우리 안 어딘가에는

아직 남아 있을 것이다.

브라운관의 미약한 떨림,

자막 없이도 모든 이야기를 알아들었던

그 밤의 감각이.


그리고 그 감각이,

중학교까지의 시간을 마감하던

나의 마지막 방구석 1열을

조용히 비추고 있다.


나는 그 불빛을 따라

다음 장으로 넘어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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