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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 가발 Mar 20. 2024

모성과 돌봄 - 양귀자 <모순>

양귀자 <모순>에 나타난 돌봄 문제

코로나19는 우리 사회의 민낯을 보여주었고 인류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이와 비슷한 예가 유럽의 흑사병 창궐에 따른 새로운 시대의 등장이다. 


팬데믹은 우리에게 '돌봄'과 가치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사회는 돌봄을 중요시하는 사회인가?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코로나19가 돌봄의 문제를 새롭게 창조해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돌봄은 인간에게 언제나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서구사회가 르네상스 이후 종교개혁을 거쳐 근대화를 이끌 때 자유, 평등, 우애 정신이 핵심 기반이 되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돌봄은 인간과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주제였음을 알 수 있다. 최초의 살인자 가인의 말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는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돌봄의 중요성을 떠올리게하며 이 돌봄의 문제가 양귀자의 장편소설 <모순>에 잘 나타난다. 


<모순>은 25세 여성 ‘안진진’이 인생을 주체로서 꾸리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심리 변화는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솔직하게 기술된다.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 쌍둥이 이모 그리고 결혼할 두 남자인 김장우와 나영규는 안진진에게 중요한 인물로 그려지며 안진진과 이들 사이에서 돌봄이 나타난다. <모순>에는 금융화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여성의 일자리 투입, 모성 등 돌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여러 주제가 잘 녹아있다.  


먼저 <모순>에 나타난 돌봄을 다루기 전에 우애(fraternity)를 다뤄야 한다.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와 같은 가르침은 프랑스 혁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자유, 평등, 우애가 바로 이 가르침 아래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스 윤리학에서 우애(philia)는 인간에게 필수라고 주장했다. 이것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으며 그중 세 번째가 수평적인 우애를 의미한다. 하지만 기독교가 전하는 가르침과 다르다. 여기서 우애는 시혜를 베푼다는 의미가 아니라 동등한 인간으로서 주장하는 권리이다. 기존에 억압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프랑스 혁명 주제가 된 자유, 평등, 우애에서 우애는 인간 전체의 동등한 관계에 근거한다. 이 우애는 모두가 인간으로서 하나로 연대하여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러한 정신을 기반으로 서구사회는 근대화를 이끌었으며 인간 이성은 빛을 발하게 되었다.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착취하며 물질 풍요를 이루는 동안 우애는 자유와 평등에 가려져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그 결과로 풍요는 곧 물질 축적을 의미하게 되었으며 많은 사람이 기계 부품 같은 존재가 되었다. 사회 부조리는 우애라는 이름으로 묵인되곤 했다. 잘못된 우애 이해는 기존 체제 질서 유지에 주로 인용되어 개인이 스스로 자유를 억압하는 익명의 권위를 만들었다. 이러한 문제에 Zigmunt Bauman은 “부자들은 단지 부자라는 이유로 부자가 되고 빈자들은 단지 가난하기 때문에 점점 더 가난해진다. 오늘날 불평등은 자체의 논리와 추진력에 의해 계속 심화된다.”라고 주장했다. 무분별한 자본축적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용인되기도 했다. Nancy Fraser는 이러한 자본주의 시스템을 “자신의 내장기관을 먹어치우는 ‘식인’ 자본주의”와 “a serpent that eats its own tail”로 비유했다. 무제한 축적을 향한 자본주의 경향은 자신이 의존하는 비경제 기반을 와해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본주의 체제는 사회재생산 위기를 부추기며 인간 전체를 위협한다. 이는 자유, 평등, 우애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어 그중 어느 하나도 배제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더욱 가치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분법적 태도는 분업화를 통해 과도한 자본축적을 이루었지만 사회 중요 기반을 와해시켰다. 인류 전체의 책임을 특정 집단에게 전가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금융화 자본주의는 여성을 일자리에 투입 시킴과 동시에 모성을 강요하는 식으로 사회재생산을 위태롭게 유지시킨다. 한국 사회는 고도압축성장 과정을 겪으며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빈부 격차와 사회 불평등 문제도 심화 되었다. <모순>에는 이러한 사회 문제가 잘 드러난다. 분업화로 강화된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을 동등한 인간이 아닌 남성의 삶에서 도구적인 존재로 만들었으며 안진진의 아버지를 소외된 인간으로 전락시켰다. 사업 실패와 실직을 거듭한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무능한 남성이었으며 이는 곧 사회에서 자격 없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안진진의 어머니는 술에 취한 아버지가 부숴버린 살림을 복구하기 위해 시장에서 양말 등을 판매하기 시작한다. 어머니가 시장에서 수익을 올릴 수록 아버지의 방황은 심해진다. 여성이 경제적 지위를 얻게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권력의 변화를 위협으로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아버지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소외되었지만 그 권위의식을 버리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무력감과 상실감은 어머니를 향한 물리적 폭력으로 표출된다. 결혼식 얼마 뒤에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안방 상에서 접시들 좀 날라 줘요”라고 말했을 때 아버지가 분노하여 접시들을 벽에 던져버리고 “앞치마 두른 간수에 휘둘리는 삶”에 공포를 느낀다고 말한다. 이는 이분법적 사고와 돌봄 불평등 문제가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안진진의 어머니는 아이들과 남편을 책임지는 모가장이다. 양말 판매가 어엿한 생계 수단이 될 때 아버지는 집을 나가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차 어머니는 결코 자식과 가정을 포기하지 않는다. 안진진은 어머니를 ‘불가사의한 활력’을 가진 존재로 여기며 이해할 수 없어 한다. 어머니의 이러한 모습이 안진진에게 지독한 무언가로 보여짐은 당연하다. 어머니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가난과 폭력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진진은 “어머니에 대해 연구할 것이 있다면 아마도 이것, 불가사의한 활력일 것이었다. 전혀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데도 어머니는 끊임없이 자신의 활력을 재생산해서 삶에 투자한다.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의 재생산 기능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라고 말하며 당시 사회가 만들어낸 여성을 보여준다. 그렇게 어머니는 “삶에의 모진 집착”을 얻게 된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동생 ‘안진모’는 불량하게 자란다. 철없는 남동생은 아버지 역할을 대신하며 안진진은 어머니 대신 동생을 돌보며 유년 시절을 보낸다. 진모는 방에서 ‘대부’를 보며 ‘조직’의 보스를 꿈꾼다. 진모의 ‘조직’ 집착은 자신을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가 아닌 소속된 존재로 느끼고자 하는 욕망이다. 이것은 진모의 자기돌봄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어머니에게도 나타나는데 어머니는 닥친 불행을 과장하여 자기돌봄을 이룬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진진은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안진진이 선택한 자기돌봄이라고 생각한다. 안진진은 “내 인생은 나의 것이지만, 그러나 진모에게는 누나의 인생이기도 하고 어머니에게는 딸의 인생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진모의 인생은 나의 남동생의 인생이다. 주체를 나로 놓고 보면, 그러면, 중요도가 확달라진다. 조용히 입 다물고 구경만 할 수는 없다. 내 인생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나의 남동생의 인생도 가끔씩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인간으로서 우애를 확인하기 시작한다. 인간은 서로에 대한 돌봄이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안진진은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며 아버지마저도 용서한다. “아버지는 상스러운 욕설을 하더라도 입술을 깨물며, 이마에 푸른 힘줄을 돋우면서, 온힘을 다해 자신도 지금 죽을 듯이 괴롭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알려 주었다. 오죽했으며 나와 진모는 물론이고 맞고 있던 어머니까지도 저토록 괴로운 일을 해야 하는 아버지에 대해 순간순간 동정심을 품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을까”에서는 가족 모두가 인간으로서 함께 고통을 공감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안진진은 동생에게 동지애를 느끼기도 한다. 안진진의 솔직한 속마음 “진모에게도 어머니는 피할 수 없는 숙제였다. 어머니에게는 아버지가 피할 수 없는 숙제였고 우리에게는 어머니가 그런 존재였다. 나는 처음으로 진모에게서 동지애를 느꼈다. 내 마음이 찡했던 것은 진모 때문이 아니라 동지애, 혹은 전우애 같은 것 때문이었다.”은 상호호혜적 돌봄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공감은 인간으로서 사회를 구성하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중요한 정신이 된다. 이 정신은 곧 인간성 회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안진진의 자기돌봄은 나영규와 김장우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경제력이 있는 나영규는 철저한 계획에 따라 살아가는 심심한 남자이다. 반면에 서민 김장우는 즉흥적이며 감성적인 남성이다. 안진진은 이 둘을 사이에 두고 누구와 결혼할지 고민한다. 안진진은 김장우를 사랑지만 나영규를 결혼 상대로 선택하게 된다. 안진진의 이러한 선택은 주체적으로 삶을 살겠다는 자신의 다짐과 반대되어 보인다. 하지만 이 결혼은 안진진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결혼이다. 비겁한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솔직한 자신의 선택이다. 경제적 위기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안진진의 자기돌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양귀자의 장편소설 <모순>에 나타난 돌봄과 사회 문제를 다뤘다. 분업화된 사회는 돌봄을 하찮게 여기며 이는 곧 사회 전체의 문제로 이어진다. 돌봄 불평등은 인간성 침해로 이어지며 사회를 야만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돌봄은 인류 모두를 포함하는 문제이다. 모두를 위한 공동체는 사회를 이루는 기본이며 우애는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인류 모두에게 주어진 문제를 특정 집단에게만 무책임하게 떠넘기는 것은 가치의 전환을 통하지 않고서는 변화되기 어렵다. 모성을 담보 잡아서 유지하는 사회는 모두를 위한 공동체가 아니다. 모두를 포함하지 않는 공동체는 야만적인 공동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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