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부록(10)#오스트리아 ‘일부’ 카페
이런 영어 속담이 있다.
“그의 마음으로 가는 방법은 그의 위를 통해서(The way to a man's heart is through his stomach).”
이 속담은 단순히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서 나아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최고의 방법은 음식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음식은 상대방과 더 나은 관계를 맺기 위한 부드러운 접근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외교무대에서도 음식이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오죽하면 음식 외교(Culinary diplomacy)라는 말이 있을까.
음식 외교의 힘을 보여준 인물은 ‘대포보다 냄비로 더 많은 것을 얻어냈다’는 말을 남긴 프랑스 외교관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Charles-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다.
탈레랑은 프랑스 혁명기부터 나폴레옹 전쟁을 거쳐 왕정복고 시기까지 활약한 프랑스의 정치인이자 외교관이다.
그의 외교력이 발휘된 건 1814년부터 1815년까지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이자 오스트리아 수도인 빈의 발하우스플라츠(Ballhausplatz)에서 열린 빈 회의에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유배 보낸 뒤 나폴레옹 전쟁의 승전국들이 전후 처리와 유럽의 세력 재편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유럽 90개 왕국, 53개 공국에서 400여 명이 각국을 대표했다. 패전국인 프랑스에선 탈레랑이 참석했다.
회의는 각국의 복잡한 이해관계 때문에 4주간 진행하려던 일정이 여덟 달로 늘어났다. 길어진 일정 탓에 매일 저녁이면 파티가 열렸고 파티는 물밑 외교의 장이 됐다.
이 같은 상황을 예견한 듯 탈레랑은 빈으로 떠나기 전 루이 18세에게 프랑스 최고의 요리사와 최고의 식재료를 요청했다. 그리고 탈레랑의 외교 감각이 발휘됐다. 파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을 외교 도구로 사용했다.
탈레랑의 여정에 함께 한 프랑스 최고의 셰프 앙토낭 카렘(Antonin Careme)이 음식을 내놨다. 푸아그라 등 진귀한 재료는 참석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달콤한 디저트는 경계심을 풀게 했다.
회의가 마무리될 때쯤 요리의 주인공은 프랑스 브리치즈가 차지했다. 사람들은 브리치즈를 ‘치즈의 왕’이라 칭했고 그 순간 프랑스는 패전국에서 유럽의 심장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승자들에 의해 토막 날 위기에 처했던 프랑스 영토는 지켜졌다.
탈레랑의 라이벌이자 빈 회의 의장을 맡았던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폰 메테르니히(Prince von Metternich) 왕자는 그로부터 17년 뒤 음식 외교를 활용했다. 자허 토르테(Sacher Torte)는 그렇게 탄생했다.
1832년 메테르니히 왕자는 외교적으로 중요한 손님들을 접대해야 했다. 중요한 그때, 하필 그의 요리사가 몸져누우면서 비상이 걸렸다.
요리사를 대신할 사람은 16세 소년 코헬레베 프란츠 자허(Kocheleve Franz Sacher) 뿐이었다.
“오늘 저녁, 나를 부끄럽게 만들지 마세요.”
2년 차 요리사인 자허가 요리를 시작하기 전 메테르니히 왕자에게 들은 말이었다. 부담이 될 법도 한 상황에서 소년 자허는 반죽에 초콜릿을 듬뿍 넣고 반죽 사이에 살구잼을 넣은 뒤 초콜릿 아이싱을 얹은 케잌을 내놨다.
디저트를 맛본 메테르니히 왕자의 손님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놀라운 맛과 경험을 선사한 이 디저트는 자허토르테(Sacher-Torte)의 시작이 됐다.
자허토르테를 세상에 알린 건 그의 아들 에두아르드 자허(Eduard Sacher)다. 제과점 데멜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던 에두아르드는 1873년 케른트너거리(Kärntner Straße)에 첫 번째 식당을 열었다.
그리고 베토벤이 교향곡 9번을 초연한 케른트너토르(Kärntnertor) 극장이 철거된 자리에 1876년 고급 호텔인 호텔 자허를 열었다.
국립 오페라극장(Wiener Staatsoper)과 호프부르크 궁전(Hofburg), 알베르티나 미술관(Albertina)과 인접한 곳이었다.
에두아르드 자허가 사망한 뒤 그의 아내 안나 자허(Anna Sacher)가 경영을 물려받았다. 이 시기 오스트리아는 문화적 격변기를 맞았다. 안나 자허의 상업적 기술과 기발함 덕에 호텔 자허는 정치 경제 예술 등 다양한 소재로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가 됐고 빠르게 명성을 쌓아갔다.
그러나 1차 세계 대전 이후 호텔 자허는 기울기 시작했다. 명성에 도취된 안나 자허는 귀족에게는 지나치게 친절을 베풀었고 비귀족 혈통의 손님에겐 서비스를 거부했다. 결국 재정적 문제를 안게 됐다.
위기의 순간에도 호텔 자허는 오스트리아 사람들에게 호텔, 그 이상이었다. 1930년 안나 자허가 자신이 묵은 호텔 방에서 사망한 뒤 장례식에선 그 의미를 엿볼 수 있었다. 빈 시민 수만 명은 아우구스티누스 교회로 향하는 안나 자허의 운구 행렬에 경의를 표했다.
이후 재정 적자를 이기지 못한 호텔 자허는 파산을 신청했고 소유권을 변경해야 했다.
1934년 경영권을 인수한 한스 구르틀러와 조세프 실러다. 이들은 호텔 자허의 영광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영업이 중단되고 전쟁 후 경영권이 러시아인, 영국인의 손에 넘어가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구르틀러와 실러 가족은 경영권을 되찾으면서 영광을 이어갔다. 1962년부터 구르틀러 가족이 단독으로 운영하게 됐다
지금까지도 호텔 자허는 구르틀러 가족이 대를 이어가며 경영하고 있다. 사업을 확장해 잘츠부르크 인스부르크 등에서도 호텔을 운영하게 됐다.
세계적인 호텔을 찾은 이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물론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찾았고 모나코의 레이니어 3세 왕자와 아내인 미국 영화배우 출신 그레이스 켈리도 호텔 자허에서 묵었다.
국립 오페라극장과 가까워 음악가들의 사랑도 받았다. 역사상 최고의 지휘자로 꼽히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레너드 번스타인, 세계 3대 테너로 꼽히던 플라치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도 이곳을 찾았다.
1969년 3월 31일 존 레논과 오노 요코가 평화 캠페인인 배기즘(Bagism) 기자회견을 진행한 곳도 호텔 자허였고 샤론 스톤, 저스틴 비버 등도 호텔 자허의 손님이 됐다.
오스트리아 빈의 랜드마크가 된 호텔 자허와 함께 자허토르테는 호텔의 상징이 됐다.
자허토르테는 2009년부터 수출을 시작하면서 연간 36만 개가 전 세계로 배송되고 있다.
아티스트 컬렉션도 출시됐다. 매년 새로운 예술가가 자허토르테를 포장하는 나무 상자를 디자인했고 1000개씩 한정판으로 판매했다.
스페셜 에디선의 수익금은 선정된 단체에 기부됐다.
작업에는 현대미술가인 헤르만 니치(Hermann Nitsch), ‘아이로니우스’라는 가명으로 더 유명한 건축가이자 풍자만화가 구스타프 파이츨(Gustav Peichl), 화가이자 무대디자이너인 제니아 하우스너(Xenia Hausner) 등 세계적인 오스트리아 예술가들이 참여했다.
호텔과 자허토르테는 명성을 쌓아가면서 독특한 이력도 추가했다.
1939년 영화 ‘호텔 자허’가 개봉됐고 영국의 소설가인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 ‘제3의 사나이((The Third Man)’가 1948년 동명의 영화로 제작됐을 때 호텔 자허는 주요 장소로 나왔다.
1950년 1차 세계 대전을 다룬 영국 작가 데니스 예이츠 위틀리의 소설 ‘두 번째 봉인(The Second Seal)’에선 안나 자허와 호텔이 소개되기도 했다.
1973년엔 TV시리즈 ‘안녕, 호텔 자허.. 포티어(Hallo–Hotel Sacher… Portier)’, 2016년엔 역사드라마 ‘호텔 자허:좋은 회사에서(Das Sacher: In Bester Gesellschaft)’가 방영되기도 했다.
2022년엔 로맨틱 코미디 영화 ‘자허토르테’가 개봉됐다.
자허 토르테는 초콜릿, 살구잼과 휘핑크림의 3요소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디테일한 레시피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다. 지금도 원본 레시피는 일급비밀에 부쳐져 호텔 금고의 두꺼운 문 뒤에 숨겨져 있다.
자허토르테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비밀스런 레시피를 따라 하려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그러면서 예상치 못한 법정 다툼이 생기기도 했다. 일명 ‘원조’ 논쟁이다.
1934년 데멜 제과점은 ‘에두아르드 자허 토르테"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당시 호텔 자허가 ’오리지널 자허 토르테’를 판매할 때였다. 호텔 자허는 상표권 침해로 데멜을 고소했고 1938년 승소했다. 그러다 2차 세계대전으로 분쟁은 잠시 멈췄고, 전쟁이 끝난 뒤 데멜이 항소하면서 소송은 계속됐다.
법정 다툼의 결론은 호텔 자허의 승리였다. 해당 버전 앞에 원본을 뜻하는 오리지널(Original)을 붙일 수 있는 독점권을 부여받게 됐다.
그럼에도 자허토르테의 조리법을 모방하려는 시도는 계속됐다. 덕분에 빈을 포함해 오스트리아 곳곳에서 ‘오리지널’이 빠진 자허토르테를 만날 수 있다.
호텔 자허는 “원본 레시피를 둘러싼 비밀이 (오스트리아) 디저트의 성공과 성장에 기여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레시피에 따라 계란을 휘젓는 것부터 우아한 나무 상자에 포장하는 것까지 34개의 모든 단계를 손으로 작업하는 오리지널 자허토르테(Original Sacher-Torte)를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카페 자허를 찾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굳이 차이를 찾자면 오리지널 자허토르테는 초콜릿 아이싱 바깥층과 스펀지 베이스 사이에 두 겹의 살구잼이 들어간다. 데멜의 자허토르테는 한 겹이다. 레드커런트 잼과 마지팬을 사용하는 카페도 있다.
카페에 가지 않아도 오리지널 자허토르테를 구매하는 방법이 있다. 호텔 자허의 빈, 잘츠부르크 지점과 카페 자허, 인스부르크와 그라츠의 카페 자허 지점, 볼차노의 자허 매장, 비엔나 공항의 면세구역이다. 호텔에서 운영하는 컨피저리 숍(과자점)이나 온라인에서도 구매할 수 있다.
참고로 '귀족과 유사한 전통 엘리트(Nobility and Analogous Traditional Elites)'란 이름을 가진 사이트(Nobility.org)에선 ‘안나 자허의 호의를 통해 얻은 원본 레시피’라며 자허토르테 재료와 베이킹 방식을 알려준다.
카페 자허에 들어가려면 적어도 30분은 대기해야 한다는 글을 보고 아침 일찍 움직인 덕일까.
대기줄은 없었고 매장 안엔 빈자리가 많았다. 참고로 줄을 서고 싶지 않다면 미리 예약하는 게 좋다. 예약을 못 했다면, 3개의 출입구 중 줄이 가장 짧은 쪽 입구에 서면 된다.
실내는 세계 최고의 호텔에서 운영하는 명성에 걸맞게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다.
안내해 준 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니 호텔 자허와 카페 자허를 상징하는 명도 낮은 붉은색과 황금색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하얀 천장과 벽엔 금색 테두리를 얹거나 붉은색 벨벳을 덧입혔다. 의자와 바닥도 붉은색으로 꾸몄다. 샹들리에 조명은 따뜻함을 배가시킨다.
2층의 실내 장식도 다르지 않다.
곳곳에 걸려 있는 안나 자허 등 호텔 자허와 카페 자허의 역사를 만든 이들, 이곳을 찾은 유명인사들의 초상화는 고전미를 끌어올려준다.
여느 때와 같이 주문은 웨이터에게 맡겼다. 커피와 아침을 대신할 메뉴 추천을 요청했다.
오리지널 자허토르테를 추천하리라 기대했는데, 막상 제시한 건 오믈렛이었다. 웨이터의 자신감을 믿고 제시한 메뉴를 주문했다. 에스프레소와 자허멜란즈 등 커피 두 잔, 그리고 오믈렛.
배를 채우니 자허토르테에 대한 아쉬움이 슬슬 밀려왔다. 원조 집에 와서 원조를 먹지 않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추가로 자허토르테를 주문하면서 웨이터에게 질문했다.
“다른 카페엔 입구 쪽에 디저트 쇼케이스가 있는데 여기는 없는 거 같다. 왜 그런가.”
웨이터가 싱긋 미소를 짓더니 답을 준다.
“우리는 손님과 대화하며 손님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늘 생각하고 고민한다. 아침을 대신할 메뉴를 물었을 때 (내가) 오믈렛을 추천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제 아침 식사를 마쳤으니 자허토르테를 먹어도 좋을 거 같다.”
진한 초콜릿을 덮은 자허토르테를 입에 넣는 순간, 풍성한 초콜릿 맛이 나더니 얇게 펴 바른 살구잼의 달콤함이 들어온다. 에스프레소 잔을 자연스럽게 들었다.
짭조름한 오믈렛이 달콤한 자허멜란지와 ‘단짠’의 조화를 보였다면, 달콤한 자허토르테는 쌉싸름한 에스프레소와 들어맞는 듯하다. 커피가 음식과 디저트의 맛을 배가시키는 순간이었다.
카페 자허의 디저트 부심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나가는 길, 오리지널 자허토르테 한 조각을 포장해 달라고 요청했다. 상징색인 붉은색과 황금색으로 꾸민 쇼핑백, 조각케잌 포장지는 자허의 정체성을 한껏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