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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크 Jan 26. 2024

그래서 중심 CAFÉ central

커피부록(8)#오스트리아 ‘일부’ 카페

맛집만 가면 괜한 고집, 괜한 자존심을 부렸다. 길게 늘어선 대기줄에 들어가면 왠지 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나마 예약이 되면 다행이었다. 예약조차 안 되는 맛집에 갔다가 대기줄을 본 뒤 맛집 옆 식당에 가는 일도 허다했다.

 그 ‘괜한’ 고집을 오스트리아 빈의 한 카페가 꺾었다.


 “이름에서 이미 알 수 있듯이 실제로 비엔나의 ‘중심’”이라며 빈의 중심은 성 슈테판 대성당이 아니라 ‘자신’들이라며 호기롭게 설명하는 이곳, 카페 센트럴(Café Central)에서다.


  이 자신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싶었다. 줄 서서 들어갈 만큼 가치 있는가에 대한 의문도 들었다. 궁금증은 커졌고 어느새 대기줄에 서게 됐다.

카페 센트럴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줄을 선채 기다리고 있다.

“성은 은행이 되고 카페가 되다”


 ‘발품 컨셉’이라는 타이틀에서 볼 수 있듯 개인적인 여행 스타일은 ‘걷기’다. 컨셉 있는 여행을 하는 지금도, 컨셉 없던 여행을 하던 과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 건 ‘걷기’였다. 보는 것, 듣는 것, 그리고 체험하는 건 속도와 비례한다는 판단에서다. 차량으로 이동할 때는 스쳐 지나가던 게 걷다 보면 보이고 들리면서 체험하는 경험을 했다.


 그걸 ‘얻어걸렸다’는 말로 표현했다. 그리고 카페 센트럴을 찾기 위해 골목을 걸을 때도 경험했다. ‘얻어걸리는 경험’ 말이다.


 로마 제국의 국경인 로만 라임스 로드(Roman Limes Road)에 속해 있던 비엔나 1구의 거리는 곳곳에 조명을 밝힌 멋진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건물 외관에 감탄하며 프레융(Freyung) 거리를 지나 ‘귀족의 거리’라는 뜻의 헤렌가세(Herrengasse)로 접어들었다.


 헤렌가세는 중세시대부터 호흐슈트라세(Hochstrasse)라 불렸다. 그러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거주지인 호프부르크와 가까운 탓에 귀족들이 선호하는 주거지가 되면서 1547년부터 새로운 이름, 헤렌가세로 불려지게 됐다.

팔레 페르스텔에 걸려 있는 현수막과 페르스텔로 들어가는 출입구. 출처 : 베르케흐르스부에 홈페이지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시선을 사로잡는 건물이 나타났다. 붉은색의 긴 천엔 ‘페르스텔 통로(Ferstel Passage)’라 적혀 있었다. 건물 안 통로를 이렇게까지 홍보하나 싶어 지나칠 수 없었다.


 육중해 보이면서도 정교하게 장식한 철문을 통과해 들어선 곳엔 고혹적인 여인상이 우뚝 선 분수가 보이고 분수대 위로는 유리 돔 천장이 보였다. 그리고 아케이드가 펼쳐졌다. 시대를 넘나든 듯한 고혹적인 아케이드이는 프레융 광장이 있는 길로 향했다.


 고백하건대 ‘얻어걸리는 경험’은 맹점이 있다. 정보를 모르니 얻어걸린 경험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뒤늦게 알게 된다는 점이다. 이 건축물도 그저 멋져 보여 들렀는데 여행이 끝나고 찾아보니 의미 있는 건축물이었다. 원래 목적지였던 카페 센트럴이 이 건축물 안에 함께 있다는 사실도.


 이처럼 모르고 봐도 눈길을 끈 건물은 1856년부터 건축을 시작해 1860년 완공됐다. 첫 입주자는 오스트리아 국립은행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산업화로 경제적 팽창기를 맞았고 화폐 거래와 은행업이 급속하게 발전했다. 국립은행도 새로운 공간이 필요했다.


 프란츠 폰 피피츠(Franz von Pipitz) 국립은행 총재는 건축가에게 새 건물에 대한 의견을 이렇게 전달했다.

  “견고함과 예술적, 기술적 완벽성을 바탕으로 건설돼야 하는 동시에 경제성을 엄격히 준수하고 쓸데없는 사치는 피해야 한다.”

하인리히 폰 페르스텔. 출처 : 빈 대학교 홈페이지

 튼튼하고 아름다운 데다 저렴하게 지어달라니. 무리에 가까운 건축 의뢰를 받은 사람은 건축가인 하인리히 폰 페르스텔(Heinrich von Ferstel )이었다.


 페르스텔은 1847년부터 비엔나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뒤 삼촌의 아틀리에에서 일하며 성 복원과 건설에 참여했다.


 자신만의 건축 스타일을 구축한 건 1854년 이탈리아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다.

 

 1400년대 후반 밀라노와 로마에 르네상스 스타일의 건축물을 알린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에 존경심을 갖게 된 뒤 그는 그라피토(이탈리아 그라피티, Graffito) 장식과 테라코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빈은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링스트라세(Ringstrasse) 등 도심을 중심으로 공공건물이 세워지면서 도시는 확장되고 있었다. 빈으로 돌아온 페르스텔도 시민들을 위한 건축에 나섰다.

1880년대 카페 센트럴이 보이는 헤렌가세 거리 풍경. 출처 : 비엔나 박물관

 그중 하나가 바로 카페 센트럴이 있는 이 건물이었다. 중앙은행과 증권 거래소, 상점이 있는 아케이드 등 의도된 목적에 따라 디자인하면서 베네치아와 피렌체의 초기 르네상스(트레첸토) 건축 양식을 접목했다. 19세기에 유행한 네오 르네상스 양식이었다.


 동시에 ‘재료 예술’도 구현했다.


 기둥과 계단은 오스트리아 연방주인 로여외스터라이히(Lower Austria)의 뵐러스도르프(Wöllersdorfer)에서 생산한 석재를 사용했다.


 발코니, 처마 장식, 석조 난간 등 외관엔 라이타산맥에 있던 황실 채석장인 카이저슈타인브루흐(Kaisersteinbruch)의 밀도 높은 흰색 석회암 카이저슈타인(Kaiserstein)을 썼다.

 

 벽면은 라이타산맥에서 나오는 천연석 세인트 마가레텐(St. Margarethen)으로 만들었다. 내부는 목재 패널, 가죽 벽지와 그림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은세공업자가 만든 둥근 아치형태의 거대한 연철문이 달리고, 스트라우흐가세(Strauchgasse)와 헤렌가세 모퉁이에 접한 2층 난간엔 오스트리아 출신의 조각가 한스 가세르의 12개 조각품이 자리했다.

도나우닉스 분수대와 아케이드.

 1860년 완공된 건물엔 국립은행과 증권거래소가 입주했다.

 이듬해 페르스텔이 디자인하고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한 조각가 안톤 폰 페른코른(Anton von Fernkorn)이 조각한 도나우닉스(도나우 인어, Donaunixen) 대리석 분수가 내부 안뜰에 설치됐다.


 그렇게 인테리어를 포함한 전체 건설 비용은 189만7600길더,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2500만 유로, 우리 돈으로는 363억 5850만 원에 달했다. 건축을 의뢰한 피피츠 총재가 쓸모없는 사치를 피해야 한다고 요구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놀라운 액수다.

한스 가세르의 12개 조각품 아래 카페 센트럴.

 완공 첫해 한스 가세르의 조각품 바로 아래 1층 공간에 개장한 건 비엔나 증권 거래소였다. 그리고 1876년 증권 거래소가 이전하면서 이 공간엔 새로운 주인이 나타났다. 카페 센트럴은 그렇게 시작됐다. 건축가의 이름에서 가져온 ‘페르스텔 성(Palais Ferstel)’에서.


“나는 ‘중앙주의자’다”


구스타프(Gustav)와 헤르만 파흐(Hermann Pach) 형제가 증권 거래소 자리에 문을 연 카페 센트럴은 시작과 함께  학자와 예술가들의 만남의 장소가 됐다.


 “카페 센트럴은 철학입니다.”

 빈의 극작가이자 수필가인 알프레드 폴가(Alfred Polgar)가 남긴 헌사다.


카페 센트럴의 입구 쪽 테이블에 앉은 피터 알텐버그의 피규어가 손님들을 바라보고 있다.

 또 다른 작가인 피터 알텐버그(Peter Altenberg)에겐 카페 센트럴이 작업실이자 거실이었다. 명함엔 집 주소 대신 카페 센트럴을 적었다. 지금도 실제 크기로 만든 그의 피규어가 카페 입구 테이블에 앉아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폴가나 알텐버그뿐만 아니었다.

 신경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빈 모더니즘을 이끈 작가 중 한 명인 아르투어 슈니츨러( Arthur Schnitzler), 오스트리아 철학작가로 노벨 문학상 후보로도 올랐던 로버트 무실(Robert Musil)은 물론 볼셰비키 혁명가인 레프 트로츠키(Leon Trotsky)도 단골손님이었다.


 이들을 폴가는 ‘전설적인 중앙주의자(Legendary Centralists)’라고 표현했다. 그의 책 ‘카페 센트럴 이론(Theorie des Café Central)’은 이 카페의 단골 고객으로 알려진 중앙주의자의 본질과 본질에 대한 통찰력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에게 이곳은 평온함을 느끼는 장소였고 커피를 마시는 곳이었으며 시가를 태우고 체스와 당구를 즐기는 곳이었다.”

 한때 ‘체스 대학’이라 불리던 카페 센트럴에서 가장 강력한 체스 상대는 폴가와 트로츠키였다.

 정치적 이슈를 논할 때면 카페 안 테이블은 법정이 되기도 했다. 폴가는 그런 카페를 이렇게 표현했다.


 “카페 센트럴은 비엔나의 위도선 아래, 외로움의 자오선에 위치해 있었다. 그곳을 찾은 사람들(중앙주의자)은 혼자 있고 싶어 하면서도 함께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이었다.”

알텐버그(맨 위 왼쪽), 프로이트(맨 위 오른쪽)와 트로츠키(두 번째 줄 가운데) 등은 카페 센트럴의 중앙주의자로 불렸다. 출처 : 카페 센트럴 홈페이지

 인기를 유지하던 카페 센트럴은 1925년 카페를 카페-레스토랑으로 전환했고 1926년 50주년을 맞았다.


 1938년, 어두운 시대가 도래했다. 카페 센트럴도 어둠을 피하진 못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사회는 나치 용어인 아리안화(Aryanization) 돼 가면서 카페 센트럴의 이름은 ‘카페하우스(Kaffeehaus)’ 또는 ‘카페(Kaffee)’로 변경됐다.


 수많은 단골손님들은 사회주의 시스템과 2차 세계대전의 희생양이 됐다. 대규모 공습으로 빈의 주요 건물은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팔레 페르스텔도 다르지 않았다. 1943년 카페 센트럴은 문을 닫았다.


 전쟁 후 남은 건 높게 쌓인 잔해와 부서진 창문뿐이었다. 재건의 과정은 느리게 진행됐고 팔레 페르스텔은 오랜 세월 방치되다시피 했다. 그 사이 건물은 예상하지 못한 용도로 쓰였다. 공간을 개조한 농구 커뮤니티는 매일 농구 경기를 진행했다.


 낡고 우울한 건물의 특성을 살려 영화 촬영지로도 쓰였다.  미국의 스파이 영화인 리처드 위드마크 감독의  ‘비밀스러운 방법(Secret Ways, 1961)’와 자크 데레이 감독의 스파이 영화인 ‘다른 사람의 피부로(The Skin of the Other, 1966)’에 등장했다.


 빛바랜 카페 센트럴의 복원이 시작된 건 1958년 건설, 관리, 부동산 임대기업인  외라그(Österreichische Immobilienen-AG, ÖRAG)가 건물을 인수하고도 한참의 시간이 흐른 1970년 부터다. 오스트리아 기념물 보호 및 보존을 담당하는 연방 기념물청(BDA)의 월터 프로들 청장은 1971년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국립은행과 증권 거래소 건물 복원에 나서기로 했다.

 1982년까지 건물은 개조되는 중에 카페 센트럴은 1981년 지금의 자리가 아닌 아케이드 안뜰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

 원래 모습 그대로 기둥형 홀(Columned Hall)로 이전한 건 1986년이다.


  이후 팔레 페르스텔과 카페 센트럴의 운영주체는 바뀌어도 카페의 역사는 계속됐고 새로운 서비스는 추가됐다.



 “카페 센트럴을 즐기는 방법”


 빈에 가면 꼭 가야 할 3대 카페로 꼽힌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일단 커피와 디저트다.

카페 센트럴의 비엔나 멜랑즈와 카이저 슈마른.

 비엔나 멜랑즈의 하얀 우유 거품은 커피 잔을 가득 채웠다. 웨이터가 추천한 디저트는 황제의 디저트라 불리는 ‘카이저 슈마른(Kaiserschmarrn)’이었다.


 웨이터는 “오스트리아, 그것도 빈에서만 먹을 수 있는 디저트”라고 추천 이유를 설명했다.


 카이저 슈마른이란 단어의 뜻풀이는 ‘황제의 엉망진창’이다. 말 그대로 바닐라 향이 나는 팬케이크를 한 입 크기로 찢어 내니, 보기에는 ‘엉망진창’이 맞다.

 

 그 위에 입자가 고운 설탕을 뿌렸다. 여기에 뭉근하게 끓인 자두잼과 함께 먹으면 그 맛이 배가됐다.


 다만 카페 센트럴에서 카이저 슈마른을 주문할 때 고려할 게 있었다. 시간이다. 메뉴판에는 ‘준비하는 데 20분 정도 걸린다’는 표시가 있다.


 커피와 디저트를 먹는 데서 그치면 안 된다. 카페 센트럴 안에선 보고 듣고 즐길 만한 게 많다.

카페 센트럴에서 볼 수 있는 신문과 책.

 스크랩된 10여 종의 신문은 물론 누구나 가져갈 수 있도록 책도 진열해 두고 있다. 카페 센트럴에 방문했을 때는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Der Vorleser)’가 진열돼 있었다.


 이 책은 2008년 미국의 할리우드에서 영화화 됐고 주연을 맡은 케이트 윈슬렛은 2009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피아노의 연주도 라이브로 들을 수 있다. 화요일을 제외하고 오후 4시 30분부터 9시 30분까지 피아니스트는 카페 안 그랜드 피아노 앞에서 연주한다.

카페 센트럴 안에선 다양한 안내를 전하는 미스터 장의 캐리커처를 만날 수 있고 피아노 연주도 들을 수 있다. 출처 : 카페 센트럴 홈페이지

 미스터 장(Mr. Jean)을 만나는 재미도 있다. 카페 센트럴은 카페의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웨이터(Herr) 장을 꼽았다. 그는 중앙주의 손님들의 모든 걸 알고 있지만, 그들의 비밀을 지켜주며 침묵했다. 그리고 단골인 중앙주의자들 중에서도 선택된 소수에게만 외상을 허용했다. 외상과는 별개로 돈을 빌려주는 유일한 단골손님은 폴가였다.

카페 센트럴의 부티크로 가면 카페 센트럴 책을 비롯해 다양한 상품을 만날 수 있다.

 지금도 미스터 장은 카페 센트럴 곳곳에서 손님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카페 안 부티크를 안내하는 미스터 장을 따라 들어가 보면 색다른 볼거리도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선 카페 센트럴에서 맛볼 수 있는 잼과 과자, 리큐어 제품은 물론 ‘카페 센트럴’이란 제목의 책을 볼 수 있고 구매도 가능하다.


 책은 카페 센트럴의 역사는 물론 빈의 커피하우스 문화를 현대적 시각으로 풀어내고 있다. 여기에 베이커리와 요리에 대한 조리법을 그림과 함께 소개한다.


 20명 이상의 대규모 그룹은 카페 센트럴의 아케이드 안뜰을 이용할 수 있다. 웅장한 대리석 계단, 유리 지붕은 페르스텔이 네오 르네상스 형식으로 지은 팔리 페르스텔의 건축 형태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대규모 그룹은 카페 센트럴의 안뜰을 이용할 수 있다. 출처 : 카페 센트럴 홈페이지

 이 같은 서비스는 팔리 페르스텔을 포함해 팔라이스비어테(Palaisviertel)에 있는 팔레 페르스텔 그로세르 페스트잘, 팔레 다운킨스키 등 다른 성에서도 받을 수 있다.  


‘팔리 이벤츠(Palais Events)’라 불리는 이 서비스는 팔레 페르스텔과 카페 센트럴을 운영하는 오스트리아 관광 그룹 베르케흐르스부에(VERKEHRSBUERO)가 제공하고 있다.


 이런 자신감 때문일까. 카페 센트럴은 지금도 카페를 찾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IamCentralist(나는 중앙주의자)라고 말하는 중앙주의자들이 21세기에 도래했습니다.”



*메인 사진 출처 : 카페 센트럴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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