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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크 Jan 22. 2024

전통을 만든 가족 CAFÉ Landtmann

커피부록(7)#오스트리아 ‘일부’ 카페

“네가 왜 거기서 나와”라는 노랫말이 오스트리아 빈의 카페에서 떠오를 줄은 몰랐다. 빈에서 가장 처음 찾은 카페 뮤지엄(Café Museum)에서다.

 카페 뮤지엄의 매장 안 팝업 안내판에서, 메뉴판에서 ‘Landtmann’, 란트만이란 단어가 툭 튀어나왔다.


 이 단어는 빈에 도착하기 전 오스트리아 관광청에서 봤다. 관광청이 가 볼 만한 카페로 꼽은 리스트에서 카페 란트만(CAFÉ Landtmann)은 카페 뮤지엄과 함께 있었다. 란트만의 이름을 어쩌면 경쟁의 대상인 다른 카페에서 본다는 게 언뜻 이해되지 않았다.

출처 : 오스트리아 관광청 홈페이지

 그리고 “네가 왜 거기서 나와”라는 경험은 두 번째 카페에서도 계속됐다. 알베르티나 박물관을 마주한 카페에서.


 “별이 탄생하다” 


 카페 모차르트(CAFÉ Mozart)는 200년 넘게 커피하우스 문화를 지켜나가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여기에 카페 앞 샤니가르텐에 있으면 알베르티나 박물관은 앞마당이 된다. 이런 매력들을 두고 카페 모차르트가 자랑하는 매력은 따로 있다. ‘편안함’이다.


 카페 모차르트 홈페이지를 보면 “웨이터는 단골손님의 눈에서 원하는 걸 본다”고 설명한다.

하루 두 번 카페 모차르트를 찾아 에스프레소를 마신다는 단골손님.

 실제 카페를 찾았을 때 단골손님에 대한 친근한 배려를 목격할 수 있었다. 웨이터는 홀로 카페를 찾은 콧수염이 멋진 노인에게 다가가 대화를 나눴다. 그 웨이터가 서빙을 위해 왔을 때 노인의 정체를 물었다. 


 그는 “하루에 두 번, 오전과 오후에 우리 카페를 찾으셔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단골”이라고 했다.

 웨이터의 설명을 듣는 순간 오랜 세월 사랑받는 카페로 자리한 이유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여기에 230여 년의 카페가 갖는 역사는 또 다른 매력이다.

 1794년 장사꾼이던 게오르그 폴라인은 시민병원 건물(Bürgerspitalzinshaus) 1층에 커피하우스를 열었다. 카페 모차르트는 홈페이지에 그 시작을 이렇게 표현했다. “별이 탄생하다”.

 당시 카페 맞은편 구시가지 요새 유적지 자리엔 1745년 세워진 타루카 궁전(Palais Taroucca, 오른쪽 사진 참조)이 있었다.


 이 성은 현재 세계적으로 중요한 예술 컬렉션을 소유한 알베르티나 박물관 및 모던이 됐다. 


 이후 커피하우스는 여러 차례 소유권이 변경됐고 이름도 달라졌다. 

 

 첫 번째 이름이 생긴 건 1825년 시몬 코라(Simon Corra)가 커피하우스를 인수한 뒤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면 서다. 카페를 개조하더니 1836년 카페 코라(Café Corra)라는 새 이름을 부여했다. 빈에서 중요한 커피하우스 중 하나가 된 주요 요인은 의자와 파라솔, 화분과 테이블이 있는 샤니가르텐이었다. 카페 모차르트에 따르면 ‘빈의 첫 번째 샤니가르텐(Vienna's first Schanigarten)’이었다. 카페와 가까운 곳, 지금은 호텔 자허가 자리한 케른트너토르극장(Kärntnertortheater)의 배우와 관객들은 샤니가르텐의 매력에 빠졌다.

1800년대 후반 카페 모차르트 주변 전경. 출처 : 카페 모차르트 홈페이지

  1840년 두 번째 변화가 찾아왔다. 카페 코라를 인수한 카츠마이어(Katzmayer)는 대리석과 적갈색 마호가니, 빨간색과 녹색 벨벳으로 실내를 장식하고 카페 카치마이어(Café Katzmayer)로 이름을 변경했다. 


 장소도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당시 빈은 도시 건축으로 변화를 거듭하고 있었다(커피부록 2편 참조). 1869년 비엔나궁정오페라(K & K Hofoper)가 문을 열었고 철거된 케른트너토르극장 자리는 공간을 확장한 호텔 자허가 차지했다. 카페 카츠마이어가 있던 시민병원 건물도 사라졌다. 

왕궁정원에 있는 모차르트 동상(석상)

 지금의 자리, 마이세더가세(Maysedergasse)와 알베르티나플라츠(Albertinaplatz)가 만나는 모퉁이 신축 건물에 문을 연 뒤 비엔나국정오페라(빈 국립극장) 관계자는 물론 언론인 지식인 예술가 등의 인기 모임 장소가 됐다. 


 지금의 카페 모차르트라는 이름을 갖게 된 건 1794년 문을 열고 135년이 지난 1929년이다. 

 

 새로운 카페 주인인 오스카 호니크(Oskar Hornik)와 그의 가족은 1869년부터 카페 앞 알베르티나플라츠에 있던 모차르트 기념비에서 지금의 이름을 가져왔다. 


 기념비는 현재 왕궁정원(Burggarten)에 있는 모차르트 동상(석상)이다.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루던 카페 모차르트도 전쟁의 화마는 피해 가지 못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38년 유대인이던 호니크는 독일 나치의 강요로 헐값에 카페를 매각했고 손님이 앉던 테이블도 그들이 차지했다.


 전쟁이 끝나고 카페 모차르트는 다시 호니크 가족에게 돌아왔지만, 전쟁이 남긴 상처는 컸다. 전쟁 막바지 대규모 공습을 받으면서 카페 모차르트와 함께 알베르티나플라츠 주변 지역의 역사적 건물들이 파괴됐다.

영화  ‘제3의 사나이’에서 미국인 홀리 마틴스가 친구인 커츠 남작과 만나려고 찾은 카페 모차르트. 출처 : UBC Theoretical Physics

 카페 재건에 힘을 보탠 건 가치를 추구하며 공유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영국의 소설가인 그레이엄 그린에게 카페 모차르트는 소설 ‘제3의 사나이((The Third Man)’를 집필하는 데 영감을 주는 공간이 됐다. 


 이 소설은 1948년 동명의 영화로 제작됐고 카페 모차르트는 영화 속 주요 장소로 등장했다. 실제 촬영지는 카페 모차르트가 아니라 노이어 마르크트(Neuer Markt)였지만.

 

 이후 빈의 전후 복구 작업과 함께 카페 모차르트도 복원됐고 수십 년간 호니크 가문이 운영했다.

카페 모차르트의 란트만 커피와 란트만 잡지(사진 위), 카페 뮤지엄에서 판매 중인 란트만 와인과 란트만 구겔호프.

 늘 북적이던 카페 모차르트도 경영 위기를 맞은 적이 있다. 1985년 일본의 백화점 기업인 미츠코시가 인수하면 서다. 카페 모차르트는 고급 카페로의 전환을 시도했지만, 이는 잘못된 선택이 됐다.


 카페 모차르트는 “빈의 커피하우스 특징은 모든 사람이 접근하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그 접근성을 그리워했던 거 같다”고 실패의 원인을 진단했다.


 카페 모차르트가 홈페이지에서 카페의 매력으로 '편안함'을 꼽은 이유도 이 때문일 듯하다. 


 그래서일까. 카페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 빈을 방문해 두 번째로 찾은 카페가 됐다. 


 그리고 매장 입구에서 다시 한번 “네가 왜 거기서 나와”라는 노랫말 가사가 떠올랐다. 

  손님들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하려고 마련한 테이블. 신문과 함께 자리한 ‘카페 란트만’ 잡지였다. 

  이젠 노랫말 가사를 넘어 영화 속 유명한 대사가 떠올랐다. 영화 ‘올드보이’ 속 최민식의 대사. 


  “누구냐 넌”. 


“중심이 되다”


 카페 뮤지엄과 카페 모차르트 덕에 카페 란트만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감은 증폭됐다.

카페 란트만에 걸린 프란츠 란트만의 초상. 출처 : 카페 란트만 홈페이지

 잔뜩 부푼 기대감과 달리 카페 란트만의 시작은 소소했다. 시작을 연 프란츠 란트만(Franz Landtmann)은 당초 역사를 쌓아갈 커피하우스를 열 생각이 없었다. 단지 도시에 가장 우아한 커피하우스를 만드는 게 목표였다.


 더구나 커피하우스를 세우려던 부지 주변엔 아무것도 없던 시절이었다. 빈은 1858, 59년 옛 도시 요새들이 철거된 뒤 건축 도시로 변화를 시도하던 중이었다(커피부록 2편 참조)

 그런 곳에 란트만은 1873년 10월 1일 카페 란트만(CAFÉ Landtmann)의 문을 열었고 시민들은 열광했다.


이후 란트만의 운영자는 여러 번 바뀌었다. 1881년 빌헬름과 루돌프 케일 형제가 인수해 35년간 운영했고 1916년부터 칼 크라우스가 5년간 카페 란트만을 운영했다.

1880년경 카페 란트만(왼쪽)과 현재까지 남아 있는 한스 샤이브너의 나무기둥. 출처 : 란트만 아카이브

 란트만이 전환기를 맞이한 건 1926년 콘라드와 안젤라 자우너가 카페를 매입하면 서다. 

 

 3년 뒤인 1929년엔 오스트리아 유명 건축가인 에른스트 멜러(Ernst Meller) 교수에게 내부 디자인을 의뢰했고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면서 빈의 최고 커피하우스로 입지를 세웠다. 그때 입구에 세워진 한스 샤이브너(Hans Scheibner)가 조각한 4개의 나무 기둥은 지금도 남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49년 콘라드 자우너는 아들 에아빈 자우너에게 경영권을 넘겨줬고 성공은 계속됐다. 잘 나가던 카페 란트만에도 위기가 있었다. 1970년대 자우너 가문이 카페 란트만 매각을 시도하면서 카페 자리에 은행 지점이 세워질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위기의 순간 카페 란트만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됐다. 1976년 카페 란트만을 인수한 허버트와 아니타 퀘르펠트였다.


 “가족을 만든 퀘르펠트 가족”


카페 뮤지엄을 비롯해 카페 모차르트, 카페 란트만은 긴 세월을 이어온 역사를 설명하면서 비슷한 전개를 보인다. 시작과 흥행, 위기 그리고 부활. 

 

 부활의 시작은 카페 란트만이었고, 그 부활을 이끈 건 퀘르펠트 가족이다. 사실 1976년 3월 1일 카페 란트만을 인수했을 당시 퀘르펠트 부부의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퀘르펠트 부부의 아들이자 현재 카페 란트만의 사장인 베른트 퀘르펠트가 2023년 10월 오스트리아 현지 신문인 데어슈탄다르트(derstandard)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은 이렇다.


 “종전 후 아버지는 전기 그룹인 일렉트로퀘르펠트(Elektro Querfeld)를 설립해 성공한 사업가였습니다. 그러다 실수로 모든 걸 잃었고 남은 건 아내와 네 명의 어린 자녀뿐이었습니다. 직장 동료가 ‘허버트, 여기 아무도 원하지 않는 카페가 있다’고 말했고, 우리 부모님은 카페 란트만에 정착하셨습니다.”

1970년대 카페 란트만. 출처 : 란트만 아카이브

 퀘르펠트 부부가 정착한 카페 란트만의 상황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인프라와 시설 모두 좋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때 빈의 대다수 전통 있는 커피하우스가 어려웠다. 

 데어슈탄다르트에 따르면 커피하우스는 1929년부터 세계대공황, 다음은 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전쟁이 끝난 뒤엔 그냥 그렇게 세월을 보냈다. 커피하우스의 바닥은 갈라지고 환기 장치는 깨졌으며 차양은 넝마처럼 됐다.


 카페 란트만을 비롯해 전통을 이끈 커피하우스들은 링스트라베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퀘르펠트 부부는 카페 란트만의 활기찬 미래를 만들자는 목표를 세웠고 빈의 예술가를 비롯해 시민들은 응원을 보냈다. 1982년부터는 오스트리아 정부도 커피하우스의 역사적 가치와 경쟁력을 인정하며 손을 내밀었다. 정부 지원에 앞장선 인물은 언론인 출신 사회민주당 소속으로 문화담당 의원을 역임하고 후에 빈 시장을 역임한 헬무트 질크 의원이다. 연방 문화유산부와 역사보존기금에서도 도움을 줬다. 카페 란트만은 사랑스러운 커피하우스 모습을 찾아갔다.

퀘르펠트 부부와 자녀는 350여 명의 직원과 함께 10개 카페와 베이커리를 관리하고 있다. 출처 : 파밀리아 퀘르펠트 홈페이지

 퀘르펠트 부부의 아들인 베른트 퀘르펠트는 1988년 사업에 합류해 고전적인 비엔나 커피하우스 문화를 구현하는 ‘란트만 스타일’을 완성해 나갔다.


 퀘르펠트 가족은 카페 모차르트의 위기도 놓치지 않았다. 1993년 카페 모차르트는 퀘르펠트의 가족이 됐고 아니타와 그의 딸 안드레아 윙클러(Andrea Winkler)는 커피하우스의 전통을 살리기 위해 내부를 개조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2010년엔 카페 뮤지엄도 일원이 됐다. 퀘르펠트 가족은 카페 뮤지엄의 공간이 갖고 있는 독특한 역사에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인테리어 디자인을 맡은 건축가 한스 피터 슈바르츠는 은구 모양의 아름다운 조명기구 등을 부활시켰다. 

카페 뮤지엄에 홍보용으로 게시된 파밀리에 퀘르펠트 카드(사진 위)와 카페 란트만의 가족이 된 카페 명단.

 그해 10월 카페 뮤지엄이 재개장한 뒤 떠났던 단골손님들이 돌아왔다


 이후 쇤부른 궁의 카페 레지던스(Café Residenz), 올드 다뉴브의 다스 부트하우스(Das Bootshaus), 카그란의 나폴레옹(Napoleon) 등도 가족이 됐다.  

 가족이 된 이들 카페에선 파밀리에 퀘르펠트(familie Querfeld) 카드를 사용할 수 있다. 

 2006년 세워진 ‘란트만즈 오리지널 베이커리(Landtmann’s Original Bakery)’는 이들 카페에 베이커리 제품을 공급하면서 ‘빈 페이스트리 문화’를 이식하고 있다.



“커피는 수많은 방문 이유 중 하나”


가족이 된 카페 란트만과 카페 모차르트, 카페 뮤지엄은 빈의 커피하우스 문화가 박물관에 박제되지 않도록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먼저 커피하우스답게 커피 맛에 공을 들인다.

카페 모차르트와 커피 뮤지엄은 손님에게 ‘당신은 무엇을 가질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에스프레소와 필터커피, 터키식 커피인 체즈베를 소개한다.

 추천 커피는 비엔나 멜랑지와 함께 우베르스튀르츠터 노이만(Überstürzter Neumann)이다. 카페 모차르트는 이탈리아의 커피 전문 로스팅 기업인 헤르만 하우스브란트 원두를 사용한다고 알렸다.


 “터키식 커피는 아라비카 커피 원두로 만들어집니다. 중미와 브라질을 블렌딩하여 정성스럽게 로스팅하고 분쇄한 것입니다. 특별한 동양적 풍미와 짙은 갈색의 시럽 같은 일관성이 있습니다. 에스프레소에 사용하는 원두는 헤이즐넛과 코코아 향, 과일향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게 특징입니다.”(카페 모차르트 메뉴판에서)


 디저트도 놓쳐서는 안 된다. 퀘르펠트와 가족인 카페들은 카페 란트만에서 시작한 란트만즈 오리지널 베이커리에서 만든 디저트를 제공하고 있다. 디저트를 제공하는 곳은 같지만 카페마다 강조하는 디저트는 따로 있다.  

 카페 란트만의 자랑은 사과 슈트루델이다. 웨이터의 추천 디저트도 사과 슈트루델이다. 여기에 연유를 부으면 더 맛있다는 꿀팁도 알려줬다. 한 입 베어무니 ‘겉바 속촉’이 느껴진다. 겉은 바삭한데 속은 부드럽다. 바닐라 향도 난다. 


  “신맛과 단 맛이 있는 잘게 다진 사과, 팬에 부드럽게 튀겨낸 버터 그리고 계피와 건포도를 얇은 반죽에 정성껏 채워 넣는다. 한 입 먹을 때마다 이 요리 유산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맛볼 수 있다”는 카페 란트만의 설명엔 자랑스러움마저 느껴진다.

카페 란트만의 사과 슈트루델(왼쪽)과 카페 모차르트의 모차르트 토르테.

 사과 슈트루델은 허버트가 커피와 함께 맛있는 빈 만의 페이스트리를 제공하고 싶은 데서 시작됐다. 아내 아니타가 고전적인 재료와 전통적 조리법으로 슈트루델을 만들었다. 사과 슈트루델을 찾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카페 란트만은 페이스트리 요리사를 고용했고 지금은 란트만즈 오리지널 베이커리와 카페 레지던스의 베이커리에서 아니타의 레시피대로 매일매일 구워지고 있다.


 카페 모차르트에선 모차르트 케이크(Mozart Torte)를 추천한다. 피스타치오 크림으로 만든 초콜릿 무스 케이크다. 초콜릿은 독일 뤼베크(Lubeck) 산 고급 다크 초콜릿에 오스트리아 고산지대 우유와 크림을 넣고 정성스럽게 녹여 만들었다.


 물론 카페들을 방문할 이유가 단순히 커피와 디저트 때문만은 아니다. 공간과 사람이다.

 카페 란트만도 홈페이지에서 “커피 한 잔을 즐기는 것은 란트만을 방문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라고 단언했다. 이는 카페 모차르트, 카페 뮤지엄에도 적용된다.


 손님들을 환영하는 우아한 공간,  제국 시대의 토네트 의자나 문화유산으로 보호되는 아늑한 의자, 덮개를 씌운 벤치에 앉을 수 있다. 샹들리에와 거울, 친밀감을 주는 동시에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는 작은 테이블과 칸막이도 있다.

카페 란트만이 설립 150주년을 기념해 발간한 잡지 속 폴 매카트니의 사인.

 이런 이유로 시대의 지식인과 정치인 예술인들이 카페 란트만의 단골이 됐다. 신경학자이자 정신분석학의 선구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란트만의 소중한 고객이었다.


 카페 란트만은 메뉴판에 “(작가인) 카를 크라우스와의 대화를 위해서든, 단순히 사과 슈트루델과 커피를 즐기기 위해서든 프로이트는 카페 란트만을 좋아했다. 우리는 당신이 그 사람(프로이트)처럼 편안하고 여유로운 기분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적었다.


 빈에서 태어난 독일과 프랑스 국적의 배우 로미 슈나이더, 전 미국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 비틀즈 핵심멤버로 수많은 명곡을 만든 폴 매카트니도 란트만을 찾았다.


 카페 뮤지엄도 모두가 알 만한 유명인사들의 단골 카페였다. 에곤 쉴레가 구스타브 클림트를 처음 만난 장소였고 노벨 문학상 후보에 세 번이나 지명된 카를 크라우스, 프란츠 카프카와 프리드리히 니체의 영향을 받은 로베르트 무질이 글을 쓰는 공간이 되기도 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카페 란트만은 미국의 소설가 제임스 미치너(James A. Michener)의 소설 ‘폴란드’, 영국의 작가 에바 입보스턴(Eva Ibbotson)의 작품 ‘아침 선물(The Morning Gift)’의 주요 장소로 쓰였다.


 카페 모차르트는 영국의 작가 그레이엄 그린은 물론 그의 소설 ‘제3의 사나이’를 영화로 만든 감독 캐롤 리드에게도 영감을 줬다. 리드 감독은 주연 배우인 오슨 웰스, 조셉 코튼과 함께 호텔 자허에 머물면서도 가장 많은 시간을 카페 모차르트에서 보냈다. 카페 모차르트의 매력에 빠진 그는 영화 속에 나오기를 바랐고 실제 영화에선 주인공 해리와 그의 친구가 비밀스런 만남을 가진 장소 중 하나로 등장했다.

안톤 카라스 앨범 표지. 헨크 글로드반스 유튜브 채널 캡처

 이 영화의 OST 작업에 참여한 오스트리아의 치터 연주가인 안톤 카라스에게도 영감을 준 게 카페 모차르트였다. 치터는 골무로 줄을 뜯어 음을 내는 독일 남부와 오스트리아의 전통 현악기다.


 그는  ‘해리 라임 테마(The Harry Lime Theme)’와 함께 영화 속 샤니가르텐 장면을 부각하는 '카페 모차르트 왈츠(The Cafe Mozart Waltz)'를 작곡했다.  


 이는 가족임에도 카페 란트만과 카페 모차르트 그리고 카페 뮤지엄을 모두 가 봐야 할 이유가 됐다.


*참고 자료 : burgen-austria / 오스트리아 관광청 / CAFÉ Mozart / CAFÉ Landtmann / CAFÉ museum / familie Querfeld 홈페이지, 오스트리아 현지 언론 데어슈탄다르트

**메인 사진 출처 : CAFÉ Mozart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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