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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크 Jan 30. 2024

공연장이 된 CAFÉ Frauenhuber

커피부록(9)#오스트리아 ‘일부’ 카페

'모든 곳이 커피 하우스(Everywhere is coffeehouse)’.


 오스트리아의 소설가이자 수필가, 저널리스트였던 프리드리히 칸토어(Friedrich Kantor)가 1975년 프리드리히 토르버그(Friedrich Torberg)라는 필명으로 발간한 책 ‘욜레쉬 아줌마’ 중 한 챕터의 제목이다.


출처 : Abe books

 이 책은 젊은 시절 작가가 경험한 빈의 커피하우스를 회상하며 쓴 책이다. 회상의 시점인 1900년대 초반 오스트리아는 커피하우스가 전역에 퍼지면서 또 하나의 기관이 됐다. 작가는 커피하우스와 그 안에 머물던 사람들을 정교하게 묘사하면서 커피하우스를 이렇게 정의한다.


 “커피하우스에서는 문학 학교와 스타일이 탄생하고 폐기됐으며 회화, 음악, 건축의 새로운 방향이 나타났습니다.”


모든 예술의 영역에 영향을 준 커피하우스. 이는 음악도 예외는 아니었다.


“목욕탕에서 시작된 카페”


빈 국립오페라극장에서 시작해 슈테판 성당까지 이어지는 오스트리아 빈의 명품거리 게른트너 거리. 그 거기를 따라 내려오다 옆길로 들어서니 보이는 카페.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문 옆 대리석 명판부터 보인다. 

 오스트리아 공용어인 독일어로 쓰인 이 글을 읽기 위해 번역기를 꺼내든다. 낯익은 이름들이 보인다. 모차르트… 베토벤…


 “1788년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의 개인 요리사인 프란츠 얀(Franz Jahn)은 이곳에 유명한 콘서트를 주최하는 고급 레스토랑을 설립했습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1788년에 헨델의 전원 음악 작품을 연주했고,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1797년에 피아노 포르테와 금관을 위한 5중주를 초연했습니다.”


 몇 줄 안 되는 짧은 설명에 세계적인 음악가 이름 두 명이 연달아 나오는 이곳.

 ‘빈에서 가장 오래된 커피하우스’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카페 프라우엔후버(Café Frauenhuber)다.


‘가장 오래’라는 표현이 알려주듯 카페는 홈페이지에 그 역사를 길게 설명하면서 시계를 1300년대로 돌려놓는다. 카페 프라우엔후버에 따르면 카페가 있는 지금의 자리는 원래 목욕탕 자리였다. 이 같은 내용이 처음 언급된 건 1314년이다.


  소유주는 빈의 스코틀랜드 수녀원이었다가 이발사이자 외과의사로 바뀐다. 그때는 이발사가 외과의사를 겸업하던 시대였다. 목욕탕에서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면도 서비스를 하던 이발사는 후에 마사지, 부항, 사혈은 물론 피부병과 궤양 및 상처까지 치료했다.

카페 역사를 소개한 PDF 문서의 표지와 이발소 간판. 출처 : 카페 프라우엔후버, 픽사베이

 이 같은 이유로 지금도 이발관 앞에 달린 빨강 파랑 흰색의 표시등은 동맥과 정맥, 붕대를 의미하고 있다.


 이발사이자 외과의사가 배턴 터치하듯 소유하던 건물의 역사를 마무리한 건 1717년 인 코스모스 데미안이다. 그 역시 이발사이자 외과의사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목욕탕은 폐쇄됐다. 바로크 양식의 4층짜리 건물이 새로 세워지면 서다. 건축된 시기는 1725년에서 1735년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목욕탕이던 이곳은 1795년 새 건물에 새로운 건물주인이 나타나면서 달라졌다. 건물을 인수한 사람은 헝가리 출신의 요리사로 명성을 떨친 이그나즈 얀(Ignaz Jahn)이다. 


 그는 28세였던 1773년 빈의 합스부르크 여름궁전인 쇤브룬(Schloss Schönbrunn)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의 요리사로 일했다. 이 시기 레오폴트슈타트(Leopoldstadt)의 아우가르텐(Augarten) 궁전에서도 요리사로 근무했다. 아우가르텐 궁전에서 얀은 사업감각을 익히는 동시에 사업을 성공적으로 구현할 기회를 잡았다.

아우가르텐 궁전과 정원. 작가 : C.Stadler/Bwag

  여기서 나온 아우가르텐 궁전은 요제프 2세(Joseph II)의 관저로 쓰였다. 지금은 대중에게 빈의 도자기 브랜드로 익숙하고 현지에선 시민들이 즐겨 찾는 정원이다. ‘빈 소년 합창단(Wiener Sängerknaben)’의 기숙사와 공연장도 있다.


 얀이 아우가르텐 궁전에서 일하던 시기 모차르트는 이곳에서 열리는 아침 공연(Morgenkonzerte)의 첫 공연자로 나섰다. 


 ‘모차르트의 비엔나’(wien in Mozart)’란 이름의 홈페이지에 따르면 당시 모차르트는 피아니스트이자 연주자로 일하는 데 큰 관심을 보였다. 적절한 장소에서 다른 예술가들과 함께 아카데미를 열고 음악을 만드는 데 힘을 쏟고 싶어 했다. 


 음악가들의 노력에 힘을 보탠 건 젊은 기업가들이고 그중 한 명이 필립 자크 마틴(Philipp Jacques Martin)이었다. 새로운 형태의 공연을 고민하던 마틴은 요제프 2세에게 아우가르텐에서 12번의 콘서트를 여는 데 허가를 받았다. 

  마틴이 제시한 콘서트는 아침 7시에 열리는 아침 공연이었다. 이 음악회에서 최초로 지휘에 나선 사람이 모차르트였다.

모차르트가 아우가르텐에서 테레지아 황후와 요제프 2세를 만나는 장면. 출처 : wien in Mozart

 "이번 여름엔 매주 일요일 아우가르텐에서는 음악회가 열립니다".

 1782년 5월 8일 모차르트가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그리고 5월 26일 열린 첫 음악회에서 모차르트는 파리 심포니 (KV 297/300a)와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KV 365/316a) 등을 연주했다. 

 그의 연주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아우가르텐에서 모든 공연 중 최고가 됐다. 


 모차르트의 명성에 더해 청중을 모으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건 얀의 요리였다. 얀은 아침 식사로 커피, 초콜릿, 차, 아몬드 우유, 레모네이드 및 모든 종류의 다과를 제공했다. 점심에는 따뜻한 요리와 함께 주류나 물을, 저녁엔 계절 요리나 튀김 또는 구운 닭고기를 내놨다. 


 얀은 음식을 내놓을 때마다 가격을 정해야 했고 후에 자신의 접시에 이를 적용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모차르트가 콘서트 행사를 그만두면서 청중들이 떠났고 얀은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했다.


 얀은 그렇게 히멜포르트가세 6번지, 지금의 카페 프라우엔후버가 있는 건물을 인수해 레스토랑을 열고 빈 최고의 장소로 만드는 데 집중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음악 문학 과학 무용과 결합한 흥미로운 이벤트를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음악가들에게 얀의 식당은 공연장이 됐다. 모차르트도 그곳에서 연주한 음악가 중 한 명이었다.

 이전까지 모차르트는 연주회를 귀족의 저택이나 궁전에서 진행했다. 그러나 1787년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오스만 튀르크와의 전쟁으로 경제 상황이 좋지 않으면서 귀족들의 연주회 개최는 줄어들었다. 평소 커피를 마시거나 음식을 먹기 위해 드나들던 얀의 식당에서 모차르트는 연주회를 열기로 했다.


 모차르트는 1788년 11월 헨델의 곡을 연주했다. 헨델의 ‘메시아(Messiah: Pastoral Symphony)’였다.


 1790년 11월 말 카페 바로 앞인 라우헨슈타인가세 8번지로 이사한 뒤엔 이곳에서 더 자주 연주회를 가졌다. 그가 얀의 식당에서 마지막으로 악기를 든 건 1791년 4월 3일이다. 그가 연주한 곡은 피아노 협주곡 KV595였다.


 1797년 베토벤은 ‘네 개의 뿔이 달린 포르테피아노를 위한 퀸텟(5중주, Quintett for fortepiano with four horns’을 초연했다. 

카페 프라우엔후버에 베토벤 피규어가 자리한 테이블과 피아노. 

 카페 프라우엔후버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연주한 장소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카페의 자부심은 카페 안에서도 찾을 수 있다. 베토벤이 앉았던 자리엔 베토벤의 피규어를 세워뒀고 그 옆 자리엔 피아노가 있다.


빨간색 유니폼과 황금색 머리띠를 한 하우스 밴드 피케니크(Piqueniques)는 1층에서 열리는 결혼식 기념일 등 모든 축제 때 함께했다. 


 음악가들의 연주만 있었던 건 아니다. 독일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August Wilhelm von Schlegel)은 1808년 15번의 강의를 이곳에서 가졌다. 


 얀이 사망한 뒤 그의 아들 프란츠(Franz)가 레스토랑을 운영했지만 아버지의 명성을 이어가진 못했고 1812년 사업을 접었다. 새로운 주인은 당시 빈 1구의 고기시장인 플라이시마르크트(Fleischmarkt)에서 카페 하니쉬를 운영하던 알로이스 하니쉬(Alois Hänisch)였다. 1824년 얀의 식당에서 카페를 시작한 그는 대화를 나누는 장소를 만들기 위해 공을 들였다. 


 먼저 1827년 세워진 간판부터 이목을 끌었다. 역사 화가 에라스무스 엥거스(Erasmus Engerth)가 실물 크기로 그린 2명의 인물이었다. 그중 하나는 오스트리아에 카페 문화를 연 콜시츠키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카페는 군 장교와 공무원들의 쉼터가 됐다. 이들에게 카페는 체스나 카드놀이 중 하나인 휘스트를 즐기거나 대화하는 장소였다. 축제가 열리는 기간이면 맛있는 계란 펀치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후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면서 이름도 달라졌다. 1877년엔 건물 전체를 리모델링하기도 했다.

 ‘자비로운 여성 수녀회’라는 뜻을 가진 지금의 이름, 카페 프라우엔후버를 사용하게 된 건 1891년부터다.



“전형적인 커피하우스”


 화려한 조명을 받는 상점, 샤니가르텐의 테이블까지 꽉 찬 레스토랑과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게른트너 거리에서 슈테판 대성당 옆 길로 들어서는 순간 딴 세상이 펼쳐졌다. 이른 저녁임에도 어스름해진 골목엔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곳, 카페 프라우벤후버다. 

카페 프라우엔후버 출입문과 이미지로 만든 출입문. 출처 : 카페 프라우엔후버 홈페이지

 세월이 느껴지는 카페 프라우벤후버의 육중한 나무 문 손잡이를 잡는 순간 마치 영화 ‘나니아 연대기’ 속 신비한 나라, 나니아로 들어가는 옷장이 떠오른다. 


 카페 문을 열면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만 같다.


 오래된 옷장처럼 보이는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니 ‘다른 세계’는 아니지만, 다른 세계에 온 듯 생경한 기분을 준다. 


 영업 마감을 30분 남겨두고 찾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로 복작거릴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텅 빈 것부터 이질적이다. 


 하얗고 두꺼운 아치형태의 다소 낮은 천장, 붉은 벨벳을 씌운 의자, 구부러진 나무 의자에 쭉 뻗은 나무 모자 스탠드, 따뜻한 빛을 내는 샹들리에는 시간이 멈춘 느낌을 들게 한다.


 덕분에 붉은 상의와 화려한 귀걸이로 치장한 채 홀로 테이블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노인마저 신비롭게 느껴진다. 순간 '관리가 잘 안 돼 사람이 별로 없다’는 일부 평판은 잊게 된다.


 분위기 만으로도 이곳에서 커피를 마실 이유는 분명해진다. 주문을 마치고 카페 직원에게 베토벤이 앉았던 자리를 물었다. 자리에 앉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베토벤 피규어를 마주하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꺼내 ‘네 개의 뿔이 달린 포르테피아노를 위한 퀸텟’을 재생했다.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음악이 들려오는 오는 순간 베토벤이 앉은 테이블 바로 옆 피아노마저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카페 프라우엔후버는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럼에도 커피는 양보할 수 없다. 메뉴판에는 사용하는 원두에 대해 자신 있게 설명하고 있다. 율리어스 마이늘의 UTZ인증을 받은 원두를 사용하고 있다. 마야어로 ‘좋다(Good)’라는 뜻을 가진 UTZ는 네덜란드에 본사를 두고 있는 유럽의 인증 기관이다. 


 커피는 물론 코코아, 차에 관해 월드 와이드 인증 프로그램을 실시하면서 전 세계 커피와 코코아, 차 생산을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116개국 이상에서 1만개 이상의 제품 패키지에 UTZ라벨이 표시돼 있다. 


 UTZ는 농장의 기술적 지원을 하는 채널 역할도 하고 있다. 농업경제학자들로 구성된 전문팀은 농장에 기술 컨설턴트를 하고 농장이 UTZ인증을 받도록 조언을 해 주고 있다. 농장 경영의 능률을 향상하기 위한 방향도 제시해 준다.

 참고로  UTZ인증에 필요한 체크리스트는 농장관리, 농업관행, 사회 및 생활조건, 환경 등 네 개 카테고리, 총 215개 항목이 있다.


 커피 맛도 좋지만 빈의 전통적인 디저트 카이저슈마른, 사과 슈트르델은 물론 비너 슈니첼 등 빈의 특선 요리도 먹을 수 있다. 



“빈을 한 번 더 찾아야 할 이유”


 카페 프라우엔후버만 음악가들의 공연장이 된 건 아니다. 빈 13구에 있는 카페 돔마이어(Café Dommayer)는 요한 슈트라우스 부자가 공연한 곳이다. 여행자의 한계였다. 시간적인 이유로 찾지 못했고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카페 돔마이어 전경. 출처 : 오버라 비엔(oberlaa-wien) 홈페이지

 아쉬움을 달래며 인터넷에 올라온 정보를 정리해 보자면, 이곳은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가 콘서트 하고 그의 아들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데뷔한 장소로 유명하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라이벌로 왈츠를 개혁한 음악가 유제프 라너(Josef Franz Karl Lanner)도 이곳에서 지휘했다.


 카페가 있는 장소는 1814년부터 1848년 사이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중부 유럽에서 발전한 비더마이어 스타일의 장식과 낮은 집들이 모여 있는 조용한 교외 분위기 덕에 쾌적함을 주는 곳이다.


 전형적인 오스트리아 커피하우스 형태를 따르며 물 한 잔과 커피, 다양한 페이스트리, 각국의 신문이 제공되고 있다. 여기에 샤니가르텐에 앉으면 히칭거 광장(Hietzinger Platz)이 내려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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