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부록(11)#오스트리아 ‘일부’ 카페
‘한쌍’, ‘짝을 짓기’라는 뜻의 영어 단어 ‘페어링(pairing)’과 결혼을 뜻하는 프랑스어 ‘마리아주(Mariage)’.
다른 듯 같은 이 단어는 와인과 음식이 가진 서로 다른 맛과 향이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조화를 찾는 과정을 설명할 때 사용된다.
최근 들어 두 단어의 쓰임은 다양해졌다. 와인을 넘어 맥주, 전통주처럼 음료나 주류에 맞는 케미를 찾는 방식이다. 쇠고기와 메를로, 위스키와 칠리, 맥주와 구운 치즈 샌드위치처럼.
그리고 꿀조합을 찾는 페어링의 대상에서 빠질 수 없는 게 있다. 커피다. 쓰기도 한데 달기도 하고 시큼하기도 한데 고소하기도 한 커피 맛의 다양성은 단순히 마시는 데서 나아가 그에 어울리는 디저트를 찾는 재미까지 준다. 그 재미를 오스트리아 카페를 찾아다니는 내내 경험했다. 물론 사람마다 입맛도, 취향도 다른만큼 정답은 없다.
최고의 페어링은 스스로 가장 맛있다고 생각하는 조합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카페 자허에서 자허토르테를 먹는 순간 에스프레소의 조화를 떠올린 것처럼.
‘본말전도(本末顚倒).’
카페를 찾아갔는데, 카페 직원이 “메인은 커피가 아니라 디저트”라는 말을 했을 때의 당혹감을 응축해 표현한 단어였다.
커피를 파는 카페에서 커피가 메인이 아니라니. 더구나 커피와 곁들여 먹는 거라 여기던 디저트가 메인이라니. 본말이 전도된 느낌을 준 곳은 카페 오버라(Café Oberlaa)다.
오스트리아 관광청이 가볼 만한 카페라며 추천한 곳이라는 점에서 관광청에게 괜한 배신감마저 느꼈다.
카페의 역사를 아는 순간 메인이 달라진 게 아니라 정체성을 지키고 있음을 알게 됐다,
이 카페의 역사, 제법 재미있었다.
일단 어렸다. 1974년 문을 열었으니 반세기 넘는 역사를 가진 셈인데 ‘어리다'는 표현을 쓴 건, 1800년대가 아니면 명함도 꺼내기 어려운 오스트리아이기에 가능했다. 진짜 재미를 준 건 시작한 장소였다.
카페 이름인 오버라는 빈 중심부에서 지하철 U1선을 타고 남쪽으로 가면 도착하는 종착역이자 지역명에서 가져왔다.
이곳은 유황천이 나오는 온천 지역이다. 1934년 발견된 이 지역 온천은 지하 약 400~900m에서 54℃의 온천수가 초당 30L씩 뿜어져 나온다.
나트륨 칼슘 황산염 염화유황 등을 함유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유황 함유량이 60.1mg/kg, 용질성분이 3.7g/L인 유황천이다 보니 유럽에선 연골 생성을 촉진해 운동기능 장애나 질환, 류머티즘 등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좋다고 알려졌다.
카페 오버라는 이곳에서 ‘스파(온천) 페스트리 가게(Kurkonditorei)’라는 수식어를 붙여 쿠르콘디토레이 오버라로 출발했다. 마치 삶은 계란과 식혜 등 간식은 물론 식사류도 판매되는 찜질방 매점처럼 빵도 팔고 식사도 됐다.
사업은 성공적이었고 카페 오버라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 필요한 종잣돈(Seed money)을 마련했다.
1984년엔 빈 도심 중앙의 노이어마르크트(Neuer Markt)에 슈타트하우스(Stadthaus) 패스트리 매장을 열고 판매점으로 운영했다.
제과용품과 함께 매장에서 음식과 음료를 먹을 수 있게 된 건 1년 뒤 시청 앞에 문을 연 페스트리 카페부터다.
찾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빈 주요 장소에 속속 오버라 매장이 생겼다. 빈의 가락시장으로 불릴 만한 쿠치커마르크트(Kutschkermarkt) 맞은편, 시민공원(Stadtparks)과 비엔나센터(Wien Mitte) 기차역 인근, 요제프스타트(Josefstadt) 극장 근처 그리고 박물관이 몰려있는 쇼핑 거리 마리아힐퍼 거리(Mariahilfer Straße)에 문을 열었다.
이 중에서도 눈길을 끌 만한 매장이 있었다. 1787년 식당을 겸한 숙박시설로 시작해 요한 스트라우스 부자가 연주한 공간으로 유명세를 타게 된 카페 돔마이어다. 2006년 오버라의 가족이 됐다.
카페 돔마이어를 포함해 빈의 11개 매장과 빈 인근 게라스도르프에 문을 연 패스트리 매장까지 12개의 오버라 매장이 운영되고 있다.
매장은 늘어났지만, 제과점이라는 정체성만큼은 잊지 않고 있다. 빈센트 보엘레(Vinzenz Bäuerle)가 이끄는 페스트리 셰프팀은 전통 레시피를 보존하는 동시에 창의적인 디저트를 개발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온천지역이자 본점이 있는 오버라엔 3400㎡ 규모의 현대적인 제과 생산 시설을 구축했다.
카페 오버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디저트 메뉴는 레몬 케이크, 라즈베리 케이크, 파리지앵 스피츠, 누가 스피츠, 오렌지 슬라이스 등이다. 2006년엔 최고급 마카롱이라 자부하는 라크로넨(LaaKronen)을 선보이기도 했다.
후진 양성에도 힘을 쏟고 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 상공회의소로부터 페스트리 셰프 견습을 위한 최고의 교육 회사로 선정됐고 2017년엔 스킬즈 오스트리아(Skills Austria) 상을 받기도 했다.
여행 중 방문한 오버라 매장은 여행객에게 가장 접근하기 편한 마리아힐퍼 거리의 카페 오버라였다. 그리고 카페의 정체성에 맞춰 주문의 순서도 바꿨다. 디저트, 그리고 커피.
웨이트리스는 초코무스케이크(Schoko-Mousse Torte)를 추천했다. 그에 맞춰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포크로 입안에 넣기 좋은 크기로 덜어내니 눅진하게 쪼개진다. 카페 자허의 자허토르테 속 살구잼이 없는 온전한 초코 케잌이다. 살구잼의 단맛을 덜어낸 케잌은 입안을 진한 초콜릿 풍미로 가득 채운다. 과하지 않은 달달함이다. 자연스럽게 에스프레소를 마시게 된다..
입맛은 개인 취향이다. 카페 자허에서 조각 케잌을 샀는데, 카페 오버라에선 맛이 좋아 홀케이크로 샀다. 아이싱한 초콜릿이 케잌 외관을 둘러싼 덕에 유통 기한은 길어졌다.
11월 초에 샀는데 웨이트리스는 “크리스마스 파티 때 드셔도 된다”는 말을 했다.
카페 오버라의 간판에 카페(cafe)나 커피하우스 대신 빵집(Konditorei)이 적혀 있는 이유다.
카페 오버라처럼 간판에 빵집, 컨디토레이라는 이름을 건 카페는 또 있다. 비엔나 1지구에 본사를 둔 카페 슬루카(Café Sluka)다.
경영 모토는 ‘오래된 것을 보존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라’다. 이 문구에서 전통을 지키면서도, 변화하는 시대를 읽어 내려는 노력이 느껴진다.
카페 슬루카는 1891년 빌헬름 J. 슬루카(Wilhelm J. Sluka)가 아내 조세핀(Josefine)과 함께 빈 1구 라트하우스광장(Rathausplatz)의 네오 바로크 또는 빌헬름식(Wilhelminian) 스타일의 아케이드에서 문을 열었다.
손님들의 만족을 위해 빌헬름은 제빵 기술을 높이는 데 노력했다. 오스트리아에선 처음으로 제빵에 필요한 소형 기계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1898년엔 제2회 국제요리미술전람회에 출전해 금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맛이 좋으니 손님이 찾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제국 시절엔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아내로 지금도 ‘시시(SiSi)’ 애칭으로 불리며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엘리자베스 황후도 카페 슬루카의 단골이었다. 1900년 12월 14일부터 황실 및 왕실 납품업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귀족과 국회의원, 황실 장관과 시청 공무원, 호프부르크 극장의 배우와 직원도 자주 찾았고 공화국이 된 뒤엔 카를 레너 연방대통령, 쿠르트 발트하임, 연방수상 등 정치인이 손님이 됐다.
예술가들에게도 사랑받았다. 표현주의 운동에 영향을 준 화가이자 작가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는 카페 슬루카의 고객이었다.
독일어 문학 분야에서 최고의 문학상으로 꼽히는 게오르크 뷔히너상(Georg Büchner Prize)을 수상한 니콜라스 토마스 베른하르(Nicolaas Thomas Bernhard)는 카페 단골인 동시에 1988년 쓴 희곡 ‘헬덴플라츠(Heldenplatz)’의 마지막 막에서 카페 슬루카를 언급하기도 했다.
물론 시민들도 카페 슬루카의 귀한 손님이었다.
이후 자녀가 없던 슬루카 가문을 대신해 제빵에 힘을 쏟는 이들이 경영을 이어받으면서 역사를 이어갔다.
변화도 있었다. 슬루카 부부에 이어 예제니츠(Jeszenitz) 가문이 경영을 넘겨받았고 1960년 새로운 경영자가 된 베라네크(Beranek) 가문은 3주간의 개조공사를 진행했다. 빌헬름식 조명기구와 벽면의 치장은 그대로 둔 채 냉장 진열장 등 설비를 갖추면서 그해 8월 다시 문을 열었다. 이후 토넷 의자와 덮개를 씌운 벤치도 설치했다.
빵집 슬루카의 인기 디저트는 슬루카 토르테(Slukatorte)였고, 지금도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 판매되고 있다.
이 케잌은 다크초콜릿과 오렌지 등을 섞은 스펀지케이크에 녹인 다크초콜릿을 겉면에 정교하게 입힌 뒤 가장자리에 바삭한 견과류 조각을 뿌린 게 특징이다.
여전히 레시피가 비밀로 부쳐진 마리아테레지아 토르테(MariaTheresiatorte), 너트 수플러 또는 플로라 크라플러(Flora Krapfler)도 대표적인 메뉴다.
슬루카의 디저트는 외부 기관을 통해서도 인정받았다. 2000년 고미요(Gault-Millau)로부터 최고의 빈 커피 페이스트리 가게로 선정돼 ‘황금 커피콩(Golden Coffee Bean™)’을 받았다. 고미요는 프랑스 언론인인 앙리 고트(Henri Gault)와 크리스티안 밀라우(Christian Millau)가 만든 것으로 미슐랭 가이드와 함께 유럽에서 영향력 있는 레스토랑 가이드로 평가되고 있다.
2017년엔 빈의 대표적 중심거리인 케른트너슈트라세(Kärntner Straße)에 2호점도 열었다. 명품 매장의 화려한 조명이 비추고 슈테판 성당이 보이는 케른트너 거리 중앙에 놓인 카페 슬루카의 샤니가르텐에 앉으면 색다른 경험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여행객이 가기 쉬운 2호점을 찾았다. 희끗한 머리의 웨이터가 미소를 머금고 다가온다.
카페 자허도 아닌데, 추천 디저트로 자허토르테를 말해 준다. 오리지널에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없다면 불가능하리라 생각됐다.
살구잼에 적당히 젖은 빵은 눅눅하기보다는 촉촉함이 느껴졌다. 여기에 페어링해 준 커피는 아인슈페너였다. 오스트리아 관광청이 추천한 카페 리스트에 없다 보니 하마터면 놓칠 뻔했던 카페이자 빵집이었다.
핑크색 간판에 핑크색 유니폼, 핑크색 메뉴판에 핑크색 커피컵까지….
매장에 들어선 순간 온통 핑크색이다. 여기에 빈의 주요 장소에만 가면 찾아볼 수 있는 프랜차이즈 브랜드다.
핑크색에 프랜차이즈.
한없이 가벼운 데다, 상업적이라는 편견부터 만드는 조합인데 카페 아이다(Café AIDA)는 ‘편견은 깨라고 있는 것’이라는 걸 알려줬다.
그리고 편견을 깨는 건 카페(Café)가 아닌 빵(Konditorei)이었다.
1883년 오스트리아 북부 보헤미아에서 태어난 요제프 프루섹은 고교 졸업 후 제과업자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다. 설탕 제빵사(Zuckerbäcker)라는 별칭이 붙은 그는 빈에서 1912년 아내 로사(Rosa)와 결혼하면서 과자 가게 ‘본생 & 죄네(Bonsaing & Söhne)’를 인수했다.
카페 아이다의 시작이었다. 부부는 1921년 포르첼랑가세(Porzellangasse)에 제과 생산 설비를 갖추고 본격적인 생산에 나섰다. 포르첼랑가세에 만들어진 제빵 시스템은 1974년까지 가동됐고 53년간 빈 시민들에게 슈트루델과 토르테의 기분 좋은 추억을 만들어줬다.
빈을 중심으로 매장도 확장했다. 1931년과 32년 각각 마리아힐퍼 슈트라세(Mariahilfer Straße)와 보그너가세(Bognergasse)에 매장 문을 열었다. 1939년까지 빈에 만들어진 카페 아이다 매장은 11개로 늘었다.
2018년 현재 매장은 29개가 됐고 인스부르크에도 매장을 열었다. 1974년 빈 쇤탈러가세(Schönthalergasse)에 현대적인 생산 설비를 갖추면서 하루 최대 3t에 달하는 디저트가 수제로 생산되고 있다.
아들 펠릭스(Felix)도 부모님이 가는 길을 따랐다. 후손을 위해 모든 요리법도 기록했다. 기록된 요리법 중 가장 오래된 제조법은 1943년에 기록된 아이다 크림 슬라이스다.
빵집 간판에 카페를 넣게 된 건 1946년부터다. 제과만 판매하던 매장에서 소수의 손님들이 은밀하게 직원에게 커피를 요청했다. 이들의 요청이 계속되자 케잌과 페이스트리의 달콤한 맛을 보완하기 위한 커피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펠릭스가 떠오른 건 당시 이탈리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패스트 커피, 에스프레소였다.
카페 아이다는 홈페이지에 “오스트리아 최초의 에스프레소 머신은 1946년 빈 1구 볼차일레(Wollzeile)의 아이다 지점에서 처음 작동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후 커피 소비는 급증했고, 카페 아이다는 전 지점에 에스프레소 머신을 설치했다.
디저트 맛에 진심인 만큼 커피에도 진심으로 접근했다. 1958년부터 브라질, 과테말라,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등 최고의 커피 재배 지역에서 원두를 수입했다. 디저트 맛을 즐길 수 있도록 커피는 5가지 고품질 아라비카 원두로 블랜딩해 빈에서 부드럽게 로스팅했다.
카페 아이다는 “거칠고 매운 이탈리아의 로부스터 커피 원두와는 구별된다. 아이다 커피는 자연적으로 온화한 아라비카 원두의 다층적인 향과 섬세하고 미묘한 산미로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했다. 블랜딩 원두는 극비에 부쳐지고 있다.
60년간 커피 로스팅에 공을 들인 덕에 카페 아이다의 커피는 2006년 고미요로부터 황금 커피빈을 수상하기도 했다.
카페 아이다가 두 번째로 연 마리아힐퍼 슈트라세의 매장을 찾았다. 핑크색과 화려한 색상의 디저트 덕에 분위기는 다른 커피하우스와 달리 가볍지는 않지만, 캐주얼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카페를, 빵집을 찾는 사람들은 어디나 같았다. 커피를 마시고, 디저트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읽었다. 웨이터의 추천을 받아 휘핑크림이 올라간 비엔나 멜란즈와 페이스트리를 주문했다. 편견을 깬 바로 그 맛이었다.
제과점으로 시작된 카페는 또 있었다. 그것도 빈의 3대 카페가.
바로 카페 센트럴(Café Central), 카페 자허(Café Sacher)와 함께 빈에 오면 꼭 가야 할 카페 데멜(Café Demel)이었다. 그런 이유로 커피에 집중하기 위해 카페 데멜은 방문해야 할 카페 리스트에서 과감히 지웠다.
그런데, 이 카페는 빈을 한 번 더 가야 할 또 다른 이유가 될 듯하다. 여행을 마치고 카페 홈페이지에서 본 자신감 넘치는 멘트 때문이다.
“데멜은 단순한 커피 하우스가 아니라 수세기에 걸쳐 장인의 베이킹 지식을 보유한 문화 기관입니다.
비엔나의 중심부에서 과거 시대로 이동하여 한때 오스트리아의 가장 상징적인 역사적 인물들이 즐겼던 별미를 맛보세요.”
얼마나 매력적인 문구인가. 더구나 카페 자허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방문의 이유는 더 명확해졌다.
바로 아버지 프란츠 자허가 개발한 자허토르테를 세상에 알린 에두아르드 자허가 견습생으로 일한 곳이 카페 데멜, 엄밀히 말해 데멜 제과점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가보지 않은 그 카페 데멜, 언젠가 가 봐야 할 카페를 예습하는 차원에서 자료를 찾아 정리해 봤다.
카페 데멜은 루트비히 데네(Ludwig Dehne)가 1786년 로열&임페리얼 호프부르크 극장(Royal & Imperial Hofburgtheatre) 건너편 미카엘러플라츠(Michaelerplatz)에 제과점을 연 데서 출발했다.
이어 아들인 아우그스트 데네가 사업을 이어받으며 성공적으로 관리했다.
그러다 아우그스트의 아들이 사업보다 학업에 뜻을 보이면서 1857년 그는 자신의 첫 번째 견습생이자 수제자였던 크리스토퍼 데멜에게 사업권을 넘겨줬다.
이때부터 데네의 과자점은 데멜의 과자점이 됐다.
10년 뒤 크리스토퍼 데멜의 두 아들 조셉과 칼이 경영을 담당하게 됐고 1874년 합스부르크 법원을 통해 황실 납품 자격도 부여받게 됐다.
장소도 지금의 카페 데멜이 있는 곳, 팔레 암 콜마르크트(Palais am Kohlmarkt)로 옮겼다. 당시 빈은 재개발 사업이 한창이었고 미카엘러플라츠도 전체 보수에 들어가게 되면서 이전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커피부록 2편 참조).
데멜 제과점 주요 고객의 면면도 화려했다. 엘리자베스 황후가 대표적이었다. 황실 납품 자격을 준 것도 그의 남편인 프란츠 요제프 황제였다.
형제가 사망한 뒤 칼의 아내인, 마리아 데멜이 20년 넘게 데멜의 명성을 이어갔고 이후 그의 아들인 칼 주니어 데멜이 동생의 아내인 안나 데멜과 함께 공동 운영체제를 갖췄다.
특히 안나 데멜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그 전통이 유지되도록 노력했다. 1918년 공화국이 된 뒤에도 처벌의 위험을 감수하고 ‘왕으로 임명된(ROYALLY APPOINTED)’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K.u.K.’ 명칭을 지켜나가려고 했다. K.u.K.는 ‘Kaierlich und Koeniglich’의 약자인데, 이는 제국과 왕실(Imperial and royal)을 의미한다.
2차 세계대전 중엔 반갑지 않은 단골도 있었다. 히틀러 측근 중 막내로 전범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발두어 베네딕트 폰 시라흐(Baldur Benedikt von Schirach)와 그의 아내였다.
어려움 가운데도 전통을 이어가던 카페 데멜은 1972년 스위스회사에 매각되면서 데멜 가문과의 인연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럼에도 카페 데멜에 가면 데멜 가문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안나토르테(ANNA TORTE)는 여성으로는 첫 ‘상무위원’ 자격을 갖게 된 안나 데멜의 선구자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개발된 디저트다.
K.u.K.의 정신도 지켜나가고 있다. 홈페이지는 물론 카페 매장 간판에도 KUK HOFZUCKERBEKER가 적혀 있다. ‘hof'는 호프부르크 왕궁, ‘zucker’,는 설탕 또는 과자, ‘baecker’는 베이커리 또는 요리사다.
디저트나 커피 외에도 카페 데멜을 찾아야 할 매력은 또 있다.
스위스회사로 매각되기 전 마지막 데멜 가문의 경영자인 안나 데멜의 딸 클라라와 그녀의 남편 프리드리히 루드비히 베르제비치(Friedrich Ludwig Berzeviczy)의 흔적을 지금도 만날 수 있어서다. 엄밀히 말하면 베르제비치의 흔적이다.
헝가리-이탈리아의 가난한 귀족 가문 출신인 베르제비치는 빈에서 디자인을 공부했다. 1930년대 초 저명한 20세기 건축가로 꼽히는 요제프 호프먼은 그의 예술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며 디자이너 콜로만 모저와 함께 설립한 빈 공방(Wiener Werkstätte)에 영입하고 카페 데멜로 이끌었다. 호프먼은 젊은 예술가 베르제비치의 감각적인 인테리어 디자인을 보고 ‘마지막 낭만주의자’라는 극찬도 아끼지 않았다.
아내와 함께 데멜을 운영하게 된 베르제비치는 동화 같은 매장 디스플레이에 나섰다. 다소 보수적이던 오스트리아 사회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듯 혁신적인 디자인을 선보였다. 카페 데멜은 홈페이지에 “그의 유쾌한 미학은 이후 데멜의 장식과 포장의 기초가 됐다”고 설명했다.
이후 카페 데멜을 매각할 때까지 그는 계절이나 축제에 맞춰 정교한 재료와 디자인으로 동화같은 디스플레이를 선보였다. 그에게 매장 디스플레이는 '거리의 극장'이었고, 데멜을 방문할 여유가 없는 행인들에게도 즐거움을 선사했다.
지금도 그의 일러스트는 카페 데멜의 1층 벽을 장식하고 포장 디자인도 만나볼 수 있다.
카페 데멜의 또 다른 매력은 로코코 양식으로 꾸며진 실내 장식이다. 조셉과 칼 데멜 형제가 1874년 지금의 장소로 옮기면서 꾸민 장식이다. 당시 형제는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주요 가구 제조업체이자 인테리어 장식 업체인 포르토이스 앤 픽스(PORTOIS & FIX) 데코레이터에 설계를 맡기며 로코코 스타일로 장식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회사는 1881년 비엔나의 데코레이터 안톤 픽스 (Anton fix)와 아우구스트 포리토이스(August protois)가 설립했다. 이 회사는 카페 데멜 내부를 네오 바로크 양식으로 만들었다.
지금도 200년 전부터 사용한 장식장이나 샹들리에, 화려한 천장 패턴 등 클래식한 인테리어 장식을 만날 수 있다.
이 밖에도 카페 슈페를(Café Sperl)의 ‘슈페를 케이크’(SperlSchnitte), 카페 알트 빈(Café Alt-Wien)의 케이크는 별미로 꼽힌다.
독특한 1950년대 가구로 사랑받는 카페 코르브(Café Korb)에서는 비엔나 최고의 압펠스트루델(Apfelstrudel)을 맛볼 수 있고 어두운 빛깔에 그윽한 멋이 있는 목재에 아르누보풍 장식을 자랑하는
카페 하벨카(Café Hawelka)의 자두 잼을 넣은 빵 ‘부흐텔른 미트 포비들'(Buchteln mit Powidl)’도 추천할 만하다.
빵집으로 시작한 카페나 커피하우스의 디저트만 맛있는 건 아니다.
커피하우스로 시작한 카페들도 디저트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퀘르펠트 패밀리인 카페들은 카페 란트만에서 시작한 란트만즈 오리지널 베이커리에서 만든 디저트를 제공하고 있다(커피부록 7편 참조).
자허토르테에 ‘원조’를 붙이는 카페 자허도 마찬가지다.
마지막으로 와카커피가 알려주는 커피와 디저트 페어링 방법을 공유해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