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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뛰르 Oct 15. 2024

조수미 음반 파손 책임

─ by Ms. Go




  책방. 이렇게 부르더라고. 책의 방, 이라고 바꿔서 불러봤어. 말 그대로 책이 주인인 방이란 의미로 이름을 붙인 공간.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미스터 초이가 가장 오래 머무르는 방이야. 보편적으로 가장 큰 방을 침실로 선택하지 않나? 웃기게도 책한테 밀리고 만 거지. 실은 나도 이곳을 좋아해. 널찍한 편이라 답답하지 않고 햇빛도 잘 들어오고. 게다가 책장 타고 오르내리기로 내 취미생활을 계발할 수도 있고 말이야. 또 숨을 곳은 얼마나 많은지, 숨바꼭질하기 딱 좋은 장소야.     


  창가도 빠뜨릴 수 없는 장점이야. 행인을 내려다보는 재미도 쏠쏠해. 생각이 다른 생각을 불러와서 시간 가는 줄 모르지. 저 사람들은 다들 집으로 가는 걸까. 다들 왜 집에 있지 않고 돌아다니는 걸까. 하긴 미스터 초이도 거의 매일 밖으로 나가지. 돈을 벌어야 내 사료와 모래도, 참치 캔도 살 수 있으니까. 저들도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을까. 엄청나게 많은 고양이가 나처럼 지금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진 않을까.     


  무엇보다 창문의 매력은 창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을 씻어준다는 거야. 이 상쾌함은 좀처럼 질리지 않아. 이에 그치지 않고 온몸 구석구석, 털 사이사이까지 그루밍을 해주지. 바람의 혀가 핥고 지나간 자리에서 음악이 태어나는 느낌을 과연 내가 설명할 수 있을까.     


  책방도 내 영역이야. 정기 순찰 지역에 포함되긴 하지. 그렇지만 온전히 내 것이라고는 할 수 없어. 미스터 초이가 입장할 때만 출입이 가능하다는 규칙을 준수해야 하거든. 집에 들어오면 바로 개방하고 주로 이곳에 머무니까 비교적 자유롭긴 하지만 독차지할 순 없지.     


  고양이 지능지수 측정 실험은 난제야. 우리는 개처럼 반응하지 않아. 시켜서 하는 건 시시해. 모든 행동은 자발적 동기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지. 제시한 과제를 수행한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건 인지와 의지가 우연성과 만났기 때문이야. 하기 싫은 짓은 죽어도 안 하는 동물이 고양이야. 대신 관찰 실험 결과는 얻을 수 있어. 주관적이긴 하지만 논리력·추리력 부문에서는 아마 최고 평가를 받을걸.     


  내 잠재적인 능력을 과시하는 것을 보니, 뭔가 엄청난 짓을 저지를 것 같지? 딩동댕! 책방 접수하기 계획을 세웠다는 말씀. 미스터 초이의 행동 패턴 분석을 통해 주도면밀하게 실행할 예정이야. 디데이는 내일.     


  4시 50분, 일어난다. 세수한다. 물을 끓인다. 커피 원두를 간다. 뜨거운 물을 붓는다. 식빵 두 쪽을 굽는다. 사이에 치즈를 껴서 접시에 담는다. 머그잔과 함께 책상으로 이동한다. 책장을 넘기며 커피를 마신다.   

  

  5시 50분, 나의 화장실을 살피고 응가를 치운다. 화장실에 간다. 응가를 눈다. 면도 및 샤워를 한다. 스킨, 로션을 바른다. 옷을 입는다. 내 밥그릇과 물그릇을 채운다. 가방을 메고 거울을 본다.   


  6시 20분, 마지막으로 책방을 한 바퀴 돌아보고 문을 닫는다. 그리고 출근.     


  루틴이 일정한 사람이야. 책방을 확인하는 이유야 뻔하지, 내가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마지막 단계에서 허점을 발견하고 쾌재를 불렀지. 미스터 초이가 가방을 챙길 때 내가 책방 밖에 있음을 큰 동작이나 울음으로 알려주어 방심하게 만든 다음, 발소리를 죽여가며 동선을 졸졸 따라다니는 거야.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움직임이라서 어렵지 않을 듯싶어. 책방 문을 닫기 직전이 중요해. 그림자처럼 뒤에 붙어 있다가 재빨리 문 뒤에 숨어야 해. 그러면 성공!     


  아침부터 창가라니, 호사를 맘껏 누려야지. 햇볕 아래에서 몸부터 덥혀볼까. 한참 해바라기를 하고 나서 기지개를 켰어. 그러자 겨우내 움츠렸던 호기심도 두 팔을 치뻗는 거야. 봄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한 아찔함이란.     


  몸도 풀었겠다, 본격적으로 책방 탐험 시작해 볼까. 책장 꼭대기에 올라오니까 다 보인다, 보여! 전망대가 따로 없네. 이건 뭐야? 거북이 인형이 왜 낭떠러지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니? 네게도 행운을 나눠줄게. 탈출이다! 저건? 컵 같은데 왜 주방이 아니라 여기에 있지? 너도 탈출! 얘, 기껏 도와줬더니 박살이 나버리면 난 보고 어쩌라고……. 에라, 나도 모르겠다.     


  책장 밑에서 책 빼내는 놀이보다 훨씬 재미있었지. 그때 커튼을 여민 햇살 한 줌이 무언가를 가리켰어. 저긴 조붓해서 올라가기 힘들겠는걸. 그렇지만, 도전! 이 흥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거든. 방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반대편으로 다시 올라가야 했어. 책 무게가 중심을 잡아주지 않아 겁이 났어. 올라갈수록 흔들림을 위태로움으로 읽어야 했지만, 영차, 영차! 책방 양대 산맥을 정복하는 순간, 트럼펫이 힘차게 몰아붙이는 팡파르가 울려 퍼졌어. 물론 나만 들을 수 있었겠지만.     


  둥글고 얇은 것에서 어떻게 음악이 흘러나오는지 궁금했을 뿐이야. 한 장 꺼내서 만져보고 싶었을 뿐이야. 가벼워서 붙잡을 줄 알았는데, 놓쳤을 뿐이야. 믿어줘, 미스터 초이.     


  이런 젠장, 나 이제 어떡해! 벽에 붙은 포스터 속 여자가 음반 커버에도 있었어. 아끼는 물건이 분명해. 밀실 사건의 용의자는 나밖에 지목할 생명체가 없는데, 이걸 어쩐담. 맞다! 컵도 깨뜨렸지……. 책방에는 책만 있어야지, 왜 엉뚱한 물건까지 두어서 나를 이런 곤경에 빠뜨리는 거야? 설마, 날 쫓아내진 않겠지?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어. 그새 기갈이 들고 말았지. 문밖 서너 걸음밖에 떨어지지 않은 급식대가 있고, 그곳에 물과 밥이 가득한데 먹을 수가 없는 형국. 저녁까지 꼼짝없이 갈증과 굶주림에 시달리게 생겼지, 뭐야. 이럴 줄 알았으면 새벽에 배 터지게 물이라도 마셔두는 건데.      


  더,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어. 뱃속 가득 오줌보만 있을 것 같은 절박함이 꿈틀거렸어. 새벽에 배 터지도록 마셔두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지. 삶은 손바닥을 반복해서 뒤집다 끝나는 게임인가.      


  오줌이야 커튼 뒤에서 해결하면 된다고? 모르는 소리! 오줌이 마른다고 냄새까지 사라지나? 미스터 초이가 나를 높이 평가하는 점이 화장실 실수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건데, 이제 와 내 이미지를 실추시킬 순 없잖아. 이를 악물고 참아야지. 오매불망 기다려야지. 긴 기다림 동안 난국을 헤쳐 나갈 방법이나 연구해야 하지 않겠어.     


  가까스로 패 하나를 마련했어. 반대로 생각하기가 답이 될 수 있겠더라고. 즉, 내가 책방에 의도적으로 들어온 게 아니라 갇혔다는 시나리오를 완성해서 그대로 연기하는 거지. 그럴싸하지 않아? 이해가 안 되니? 잘 들어봐.     


  미스터 초이가 현관문에 다가오는 기척이 들리면 구슬프게 운다. 책방 문이 열리면 물음표가 들어오기 전에 전속력으로 화장실로 달려간다. 시원하게 오줌보를 비워낸다. 화장실에서 나오기 전 불쌍한 표정을 충분히 연습한다. 미스터 초이를 질책하는 눈빛으로 올려다보며 서럽게 운다.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급식대로 달려간다. 물을 허겁지겁 마신다. 밥을 게걸스럽게 먹는다. 평소와 달리 사료 스무 알쯤 흩뿌려 놓는다. 끝.     


  미스터 초이는 생각하겠지. 고 양이 방에 있는지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문을 닫았구나. 종일 물도 못 마시고, 화장실도 못 가고 갇혀 있었구나. 기특하게도 소변을 참고 있었구나. 뭐야 이거, 공방에서 만든 컵이 깨졌잖아! 누굴 탓해, 다 내 탓이지. 이건 또 뭐야? 조수미 시디를 건드렸냐? 이건 좀…… 선을 넘었네?  

   

  침이 바짝바짝 말랐어. 저렇게 화난 표정 처음이야. 조수미가 도대체 누구기에? 나도 모르게 포스터를 쏘아보고 있었지.     


  “고 양도 조수미를 좋아하니? 그렇게 아련하게 쳐다보고 말이야. 고양이가 클래식 음악을 선호한다는 연구가 있던데, 틀린 얘기가 아닌가 보네.”     


  난 쫓겨나지 않았어. 상시 개방 조치로 책방은 확고한 내 영역이 되었어. 대신 대한민국 유일한 클래식 라디오 방송 93.1을 밤낮으로 듣는 애청자가 되어야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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