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Ms. Go
미친 거 아냐! 어떻게 40여 일 동안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거지? 날 집에 혼자 두고서! 다시 생각해 봐도 피가 회오리치며 돌아. 나 얼굴 새빨개졌지? 털 때문에 잘 모르겠다고? 그냥 좀 넘어가라.
여름철 시원한 자리 찾기 쳇바퀴 생활,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해. 에어컨 실내 온도를 24도에 자동 맞춤 설정만 해서 낮잠을 늘어지게 즐길 수 있게 되었거든. 나의 아름다운 털을 뽐내면서 말이야. 뒤척임에 반응하듯 줄무늬 물결이 누웠다가 단숨에 복원되는 광경은 바람에 온전히 몸을 맡긴 갈대숲이 따로 없지. 여름 안에서 가을이 보이는 찰나.
햇살 마사지를 받는 고양이, 본 적 있니? 털 사이사이 햇살이 스며들고, 햇살 사이사이 잠이 스며들고, 잠 사이사이 이야기가 스며드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목소리 사이사이 아기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니?
고양이가 아기의 꿈속으로 들어갔다고 상상해 봐. 아기처럼 쏟아지는 눈을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입을 벌렸지. 삼키고 또 삼켰지. 눈의 결정체가 녹지 않고 무늬를 만들어 나갔어. 무늬는 띠의 형태로 길어지면서 몸 바깥까지 휘돌아 나갔어.
내 몸에는 왜 금손이처럼 줄무늬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지어낸 이야기야. 어쩌면, 금손이 것과 꼭 들어맞는 줄무늬일지도 몰라. 줄무늬뿐만 아니라 기품이랄까, 귀태도 닮지 않았을까. 금손이가 누구냐고? 희빈 장씨와 후궁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았던 고양이야. 집사 이름은 잘 모르겠고 왕호가 숙종이라지, 아마?
이렇게 매력 넘치는 나를 두고 어떻게, 여행을 택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 사나흘도 아닌 한 달 넘는 시간 동안 홀로 내버려 두다니! 이거 동물 학대 아냐? 홧김에 아무 말이나 던졌지만 학대라곤 할 수 없었지. 대모님이 양육 바통을 이어받았거든.
“아드리안, 안녕? 잘 지내고 있니?”
놀라지 말라고 현관문 열기 전부터 인사를 건네는 대모님. 여유를 두고 문을 여는 까닭에 몸을 감추는 시간이 촉박하지 않아. 대모님이 좋은 두 번째 이유는 늘 나를 찾지 못한다는 거지. 굳이 찾으려는 생각이 없거나.
“밥도 많이 먹고 똥도 많이 쌌네. 굵직하고 말랑말랑한 것을 보니 건강하겠구나. 오빠 보고 싶지? 오려면 이제 30일 남았다.”
말이 하도 많아 브이로그를 찍고 있나 싶었어. 대모님의 수없이 바뀐 장래 희망이 올해엔 유튜브 크리에이터라면 조만간 날 찍으려고 접근할 거야. 조회수를 폭발적으로 높이는 방법은 그다지 많지 않으니까. 간식에 눈멀어 따라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겠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지. 스틱 봉지 끝을 찢고 흔들었어. 흔들렸지만 흔들리지 않은 척해야 했지. 넘쳐흐르지 않을 정도로 찔끔 짜내서 온 집안을 휘젓고 다녔어. 고문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구나. 코가 벌렁거려 혼났지만 참아냈지. 나 대단하지 않아? 구두 소리가 멀어지자 허겁지겁 달려 나와서 찾았지만, 간식은 어디에도 없었어. 대모님도 치사하지, 주려던 것을 도로 가져가다니! 지금쯤 쭉쭉 빨아먹으면서 집에 가고 있겠네. 군침만 삼켜야 했지.
미스터 초이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다짜고짜 나를 안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이야. 하마터면 나를 보고 싶어 했다고 감동할 뻔했지, 뭐야. 안은 자세가 좀 어정쩡하다 했더니 한 손으로 엉덩이를 받치고 들어 올린 자세에 불과했어. 체중계로 올라설 때야 나를 안은 게 아님을 눈치챘지. 그런 줄도 모르고 뒷걸음치지 않은 게 억울했어. 온몸에 묻혀온 이국의 낯선 공기가 끔찍했지만, 꾹꾹 참고 있었거든.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야! 0.7kg이나 늘었어. 어쩌면 좋아. 달려가는 것보다 굴러가는 게 더 빠르겠다. 사람으로 치면 8kg 넘게 찐 거야. 내가 1년을 갔다 왔니?”
윽박지르는 통에 주눅이 들었어. 배가 좀 불룩해졌다고 저 난리를 피우다니 어이가 없네. 적당히 좀 해라. 급기야 내 뱃가죽을 잡고 흔들었어. 출렁거림의 파고가 꽤 높다는 자의식이 싹트기 전에 화딱지가 났지. 숙녀에게 못하는 짓이 없어!
손가락을 물리고서야 정신을 번쩍 들었나 봐. 저놈 꼴도 보기 싫어서 상자 집에 틀어박혔지. 이곳은 나만 드나들 수 있는 절대적인 독립공간이야. 출입구인 좁은 구멍을 지나면 건들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지켜지는 곳.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사람이건 동물이건 개인적인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죽음에 임박한 코끼리가 무리를 떠나 혼자만의 공간을 찾아갈 때와 같이.
죽음을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몫으로 여기기 때문일까. 아니면 생의 마지막을 온전히 자기 내면과 마주하고 싶기에? 언젠가 코끼리의 선택을 이해할 때가 오겠지. 그렇지만 현재 생각으로는 오베와 그의 고양이가 함께한 마지막 시간 쪽으로 기울고 있어.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고요가 맘에 들어. 괴팍한 만큼 여리기도 한 스웨덴의 늙은 남자는 죽어가면서 손바닥에 남은 감촉을 쥐고 갔을 거야. 그의 옆에 누워 그곳에 머리를 얹고 자신을 지켜준 생명체의 부드러움을. 그의 무대, 막이 내려지는 순간이 쓸쓸하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해.
이런, 잠깐 딴생각에 빠졌네. 내가 이렇다니까. 여하튼 지금은 감정을 정화하려고 이곳에 온 거야. 화를 가라앉히려고 배를 그루밍하고 있어. 뱃살이 꽤 잡히긴 하네.
고양이에겐 원시 주머니(Primordial pouch)라는 게 있어. 쉽게 늘어나는 피부조직인데, 겉으론 늘어진 뱃가죽으로 보이지. 배가 덜렁거려서 좀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밥을 많이 먹을 때도 도움이 되고 무엇보다 가장 취약한 신체 부위를 공격당할 때 충격을 완화할 수 있어. 물론 단점도 있지. 뱃살이 찌면 더 두드러져 보인다는 거. 내가 그러네, 지금.
“고 양, 누가 뽁뽁이 뜯어놓으랬어!”
너도 40일 동안 혼자 있어봐라. 창문에 비닐이 붙어 있어서 망정이지, 커튼이라도 갈기갈기 찢어놓지 않고는 이 무료함을 견딜 수 없었을걸. 엄밀히 따져보면 내 뱃살도 자기 때문에 찐 건데, 내 탓만 하고 있고 말이야. 매일 소량씩 밥을 줬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었잖아! 안 되겠다, 이참에 삐뚤어질 테다!
창가로 뛰어 올라가 얼마 남지 않은 뽁뽁이를 마구잡이로 떼어냈어. 왼손 오른손, 리듬에 맞춰 몸을 움직였더니 상했던 감정이 회복되어 가는 것 같네. 마찰전기가 발생했는지 비닐이 온 가구에 들러붙어 을씨년스러웠어. 나의 흉가 만들기 프로젝트, 어떠냐?
“미안한 줄은 알고 있나 보네. 용서할게, 고 양.”
뭔 소리야? 미스터 초이 목소리를 따라갔더니 그 역시 뽁뽁이를 뜯고 있었어. 아니 제거 작업을 하고 있었어. 그러니까 내가 말이지, 나의 흉가 만들기 프로젝트를 실행한 게 아니라 미스터 초이의 일상 복귀 프로젝트에 동참하고 있었던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