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Ms. Go
털도 없고, 날렵하지도 않고, 쓸데없이 몸만 커다래서 어디 숨어 있지도 못하는 고양이야. 미스터 초이는.
성묘 대 성인으로, 같이 나이 드는 처지가 되니까 알겠더라고. 단단한 척 굴지만 짐작보다 여리다는 것을. 집 나간 나를 걱정하느라 반쪽이 된 얼굴을 보고 알았어.
내 옆에서 기꺼이 나의 그늘을 덮고 있는 존재였어. 나도 그의 그늘을 덮었지. 그늘은 겹쳐도 더 어두워지지 않아.
그늘이 마치 담요 같아서 자꾸만 눈을 감게 돼. 한편으론 함께 한 시간이 참 무섭게 다가오기도 해. 그동안 서로에게 무언가를 끊임없이 채웠을 텐데, 앞으로도 계속 채워나갈 텐데, 그것이 무엇인지 당장은 알 수 없으니까. 한참 후에 너무 다른 것을 꺼내놓는 서로를 보고 당황하지 않길 바라.
가출의 전말을 밝히지 않을래. 비밀에 부칠래. 사고보다는 사건으로, 이왕이면 미스터리 사건으로 기억되고 싶으니까. 체면은 고양이에게도 필요하니까.
어쩌면 당시의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는지 몰라. 중요한 점은 집 나가면 개고생임을 체득했다는 거야. 사람들은 세상에서 사람이 가장 무섭다고 하지? 고양이도 그래. 고양이가 가장 무서워. 실제 길냥이를 해치는 일 순위는 사람도 다른 동물도 아닌 같은 종족이래. 어디선가 불쑥, 자기 영역을 침범했다고 송곳니를 드러낼 것 같아서 발걸음을 떼지 못하겠더라고. 내키는 대로 활보할 수 있는 내 영역인 집이 최고야.
나가라고 등을 떠밀어도 안 나갈 테니 걱정 붙들어 매도 돼, 미스터 초이. 가출 사건 이후로 생활환경이 한층 개선되었는데 더더욱 나갈 이유가 없지. 눈에 보이는 변화를 우선 꼽자면 잔소리가 대폭 줄어들었다는 거야. 잔소리가 긍정적 결과에 미치는 영향이 제로에 가깝다는 자각도 한몫했겠지. 스트레스를 줄여보자고 상대에게 떠넘기다 떠안다 마침내 제로섬게임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았겠지. 그리고 여행 일수를 보름 안팎으로 줄인 점도 눈여겨볼 만해. 올겨울에는 고작 이 주일 일정이었어.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내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는 습관이 생겼다는 거지. 얼굴에 뭐가 묻은 것도 아닌데 왜 이러나 싶어 덩달아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어. 내 코를 집중해서 보고 있었던 거야. 내 비문을 반복 저장하려고 그랬던 거야. 기특하게도.
사람에게는 지문이 있잖아. 일치할 확률이 지극히 낮아 개개인을 구분하는 생체 신분증 말이야. 고양이에게는 비문이 있어. 똑같은 코 무늬를 가진 고양이가 없다는 얘기지. 코의 크기부터 생김새. 코의 독특한 무늬와 그 위치, 색깔의 혼합 정도는 큐알코드를 연상케 할 정도야. 얼핏 보면 다 똑같아 보이지만 하나하나 살펴보면 미세하게 다르다는 걸 알아차리지. 집사들은 백 마리의 고양이가 가림막 안쪽에서 백 개의 구멍에 코를 집어넣어도 자기 고양이를 금방 찾아낼 거야. 오직 한 마리의 비문에만 이끌릴 거라고 확신해.
담요 같은 그늘 안에서, 그늘 같은 담요 안에서 뒹굴고 있는데 새 울음소리가 들렸어. 바야흐로 봄날이 온 건가. 그렇군, 기지개를 켤 때가 온 거야.
무슨 일이 있나? 미스터 초이가 전화를 받으면서 정신없이 왔다갔다하다 글쎄, 현관문을 활짝 열어놓는 거야. 그러고선 도어 스토퍼를 바닥에 내려 고정하더라고. 호기심이 발동하여 걸음을 따라가려던, 그때였어. 방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어. 귓바퀴 선단의 짧고 가느다란 털은 미세한 소리도 놓치는 법이 없지. 다리가 수없이 많은 벌레가 기어가고 있구나. 문밖으로 조금만 나가면 대번에 잡을 수 있겠단 판단과 동시에 사냥 본능이 발톱을 세웠지. 순식간이었어. 그것을 낚아채서 물고 온 것은.
연신 흡족한 표정이네. 아일랜드 식탁을 닦으면서 연신 흥얼흥얼. 의자에 앉아서 둥근 유리잔을 들고 입에 대는 시늉을 하기도. 지금도 입꼬리가 올라가는데 내가 준비한 깜짝 선물까지 보게 되면 입이 귀에 걸리고 말겠는걸.
아이, 참. 그만 놀고 이제 침실로 들어가자. 아니, 책방 말고 침실 말이야. 지금 책상 앞에 앉아 계산기는 왜 두드리는 거야? 그럴 때가 아니야, 미스터 초이!
내 이럴 줄 알았지. 선물이 정신이 돌아왔는지 구석으로 기어가고 있네. 좋게 말할 때 이리 와라. 펀치 맛을 봐야 정신 차릴 거니. 아차차, 정신 차리면 안 되지. 기절할 정도만 살짝. 퍽, 퍽. 그래, 이렇게 얌전히 있어야지.
옳지, 밀대에 청소포를 갈아 끼우는 것을 보니 곧 침실로 들어가겠군. 얼마나 좋아할까. 가슴이 두근두근. 감격해서 눈물 쏟으면 어쩌지? 어디에서 또 한 마리 잡아 와야 하나? 선물은 받을 때보다 줄 때 비로소 의미를 알아차린다는 말이 맞긴 하네. 내 가슴 안에서 출렁이는 이 감정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한 걸음만 더. 그렇지, 이제 보일 거야. 고개를 조금만 더 들어, 미스터 초이. 마지막까지 날 숨죽이게 만드는 위인.
“악!”
감탄사가 예상한 것보다 더 강렬해! 저렇게 좋아하는 줄 알았다면 진작 신경 좀 쓸걸 그랬다. 눈 커다래진 거 봐라, 그새 두 눈에 적어놓았네. 꿈속에서도 갖고 싶었던 거라고. 우리 고 양이 어떻게 알고 준비했냐고. 좋아하는 것과 마주할 때는 누구나 아이가 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어.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어쩜 눈을 깜빡이지도 않는 거지? 그러다 정말 눈물이 왈칵 넘쳐흐르면 어쩌려고. 찔끔, 한 방울이 맺히는 것도 같았어. 그렇다고 뒷걸음치다 주저앉는 퍼포먼스를 선보일 것까지야.
옆이니까,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봐도 돼. 특별히 허락할 테니까, 안아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