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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뛰르 Oct 18. 2024

‘C’는 나눠 낀 반지

─ by Ms. Go




  오페라하우스 박스석에 앉아 있어. 우아함을 굳이 감추지 않고. 거리를 그대로 재현한 무대, 자연광을 십분 활용한 조명, 모두 훌륭해. 특히 극사실주를 추구하는 배경 장치는 행인 역을 맡은 배우들에 의해 완성되는데,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지. 혼자, 혹은 둘이나 삼삼오오 짝을 지어 지나가는 인물들. 순서랄 것도 없는 등퇴장, 그 불규칙성에서 패턴을 만드는 동선을 흥미롭게 내려다보고 있어.     


  착석하면 작은 소리조차 낼 수 없어. 바람직한 관람 매너를 지닐 수밖에 없게 되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고양이에게도 통하는 법. 그래서 소음공해 수준으로 노래를 불러야 하는 가수 역할 배우에게도 집중할 수 있어. 나름의 역할에 충실한 점을 높이 평가하는 미덕까지 갖춘 관객으로 거듭나고 있어.     


  창가 아래에서 펼쳐지는 공연은 24시간 멈추지 않아. 왼쪽 가장자리에 중고교 교문도 보이지? 통통, 농구공과 함께 걷는 배우는 운동 신경이 예사롭지 않지.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귀를 기울이게 돼. 종일 따라붙어 일상 리듬의 강약부호가 되지. 늘 지각해야 하는 역할을 맡은 어린 배우들은 힘들 거야. 아침부터 땀 흘리면서 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어떤 남자애는 자기 귀에만 들리는 음악에 취해 춤을 추기도 해. 뒤미처 멋쩍음이 강타했는지 동작에 브레이크 페달을 밟지만, 넘쳐흐르는 생기까지 멈추게 하진 못하지. 술에 취한 배우도 빼놓을 수 없어. 취객 전문 배우 타이틀을 여전히 유지하는 비결은 피나는 연습밖에 없어. 덕분에 부정확하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는 발음을 구사할 줄 알게 된 거야.     


  현대인의 분주하면서도 무료한 일상을 노래와 연기로 승화한 이 무대를 오페라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각양각색의 자동차는 오케스트라. 동네 전체가, 아니 도시 전체가 거대한 오페라극장일 수 있겠네.     


  크기와 모양, 속도에 따라 바퀴 구르는 소리도 다 달라. 차창 내리는 소리, 동승자와의 대화, 차체에 떨어지는 빗소리, 와이퍼와 유리창의 마찰, 후진 경고음, 앞지르는 오토바이의 배기통 소음과 그것을 향한 경적 소리가 다 음악이야. 날씨와 도로 사정, 개인의 감정과 급한 일정 등이 맞물려 단 한 번 연주되는 선율에 따라 전깃줄이 바람과 춤을 추고 있어. 그래, 무용은 극의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로 손색이 없지.     


  24시간 멈추지 않는 것이 또 있어. 93.1에 고정된 라디오 채널에서 흐르는 클래식 방송. 고요하게 집안을 채워가며 일상의 소리 배경을 담당하고 있지. 음악이 있어 고요하다는 말이 모순 같지만, 음악과 고요를 결부시켜 생활하는 사람이 꽤 많을걸. 전원 버튼을 누른다고 가정해 보자. 스피커에서 흐르는 정적이 소란스럽게 들리지 않을까.     


  낮방송이 밤에 재방송되어 두 번 듣는 프로그램도 있지. 본능에 각인된 야행성은 애청자가 되기 위한 기본 조건일 수도 있겠어. 머리를 파묻고 낮잠을 자면 음표가 하나, 둘 떨어져서 꿈의 면적을 넓히지. 그 들판을 내달리는 나, 달릴수록 몸집이 작아지고 있어. 뒤뚱뒤뚱 엄마 냄새를 따라가고 있어. 간신히 젖꼭지를 찾아 입에 물었을 때 내 목을 간질이던 털을 생각하고 있어.     


  안도감이 포만감으로 변환되는, 이러한 감각으로 음이 높낮이를 갖게 된다면 자장가가 되겠지. 포만감은 털 하나를 보태서 졸음을 불러올 테니까. 세상의 모든 음악이 나를 재우기도 하고 깨우기도 해. 가끔은, 아주 가끔은,     


  네 발에 오선지가 감길 때가 있어. 이것을 풀어낼 기회가 아직 없었지. 내 영역 안에 피아노 한 대 있었더라면, 하다못해 멜로디언이라도! 그랬다면 불멸의 음악을 작곡해 줄 수도 있을 텐데. 스카를라티의 고양이 풀치넬라처럼.     


  작곡가의 고양이답게 건반 위를 걸어 다니는 것을 좋아했대. 어느 날 네 다리로 하프시코드(쳄발로) 즉흥 연주를 선보였는데, 이를 놓치지 않고 스카를라티는 악보에 옮긴 거지. 그래서 〈고양이 푸가〉라고도 부른대. 듣다 보면 장난스럽게 걸어 다니는 듯 현을 두드리는 새끼 고양이가 머릿속에 절로 그려져. 점점 자라서 아장아장 발걸음이 듬직한 발자국을 남기지. 장중한 터치로 곡을 완성하는 과정, 울음도 덩달아 우렁차져서 고스란히 울림이 되는 음악.     


  피아노보다는 하프시코드로 들어야 제격이지. 매끄러운 음을 전부 덜어내고 고악기의 낡은 음을 채워야 네 발 연주자의 호흡까지 담아낼 수 있으니까. 고양이 작곡가의 발놀림이 되살아날 테니까. 그래야 사람 작곡가는 신비로운 음색을 고양이의 전유물로 떠올리겠지.     


  쇼팽의 〈고양이 왈츠〉도 빼놓을 수 없는 명곡이야. 〈강아지 왈츠〉가 무턱대고 아무 데나 뛰어오르는 강아지의 경박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고양이 왈츠〉는 고양이 특유의 발랄함과 동시에 고고함을 표현하고 있지. 사려 깊고 유려한 피아노 연주를 들어보렴. 내 이미지를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을 거야.     


  고양이 청중까지 감동한 최고의 음악은 무엇일까. 조아키노 로시니의 성악곡이라고 확신해. 두 명의 보이소프라노가 등장하여 두 마리의 새끼 고양이가 되기로 작정하는 무대. 눈을 감고 들으면 사람의 형체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앞발을 꼿꼿하게 세우고 앉은 고양이가 그려지지. 울음을 주고받으며 고조를 높이다가 경쾌하고 깔끔하게 마치는 노래. 로시니의 재치에 탄복한 사람 청중이 할 수 있는 것은 웃음과 탄성, 그리고 박수.    

 

  〈두 마리 고양이를 위한 유쾌한 듀엣〉을 따라 부르고 있어. 편의상 〈고양이 이중창〉이라 불리는 이 곡을 여성 성악가나 혼성 성악가로 구성하여 연주하기도 하지만 최고의 찬사를 받아 마땅한 무대는 역시 보이소프라노의 이중창이지. 파리나무십자가 소년합창단 내한 공연에 왜 고양이는 입장할 수 없는 걸까.     


  오해하지 말아 줘. 지금 졸고 있는 게 아니야. 눈만 감고 있는 거야. 누워 있는 게 아니야. 음악을 감상하기 위한 최적의 자세를 취한 것뿐이야. 클래식 음악이 지루하다면 오디오 아래 의자를 독점하지도 않았어. 클래식이 고양이 호흡 안정을 도모한다는 리스본 대학교 연구가 말해주잖아. classic과 cat, 두 낱말의 첫 번째 철자 ‘C’는 나눠 낀 반지야. 감상에 몰입하며 안정된 호흡을 찾아가는 과정이 마치 자는 모습처럼 비쳤겠지.     


  알겠니? 볕이 좋다고 지금 낮잠 자는 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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