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Mr. Choi
누군가 연 문
누군가 닫은 문
누군가 앉은 의자
누군가 쓰다듬은 고양이
◇ 자크 프레베르, 「메시지」 부분
자크 프레베르 시를 여기까지만 읽고 이미지를 떠올렸다. 고양이는 정물화 모델, 이라고 썼다. 고개를 가로젓고 지웠다. 날벌레가 들이닥치거나 내재한 사냥 본능이 수면 위로 떠오를 때를 제외하면, 정물화에 적합하긴 하다. 집안에서 가장 푹신한 의자를 찾아내어 자기 것으로 삼고 그 위에서 낮잠을 즐길 때 바라보면 꽃이나 과일보다 고양이를 그리는 게 더 수월할지도 모른다.
그냥 걷는 법이 없는 ‘우다다 시기’라면 글쎄……. 사람의 일생에서 우다다 시기를 찾자면 미운 일곱 살부터 사춘기까지가 아닐까. 말 안 듣기는 순수 증명 옵션이요, 그곳이 어디든 무턱대고 우다닥, 발소리 내며 달려가기는 건강 증명 옵션이다. 수평이든 수직이든 길을 만들어 가며 삼차원 영역을 순찰하다 장식품 떨어뜨리기는 애교 증명 옵션쯤 될까.
하나 마나 한 잔소리는 안 하는 게 상책이다. 목만 아플 테니까. 속이 터져도 나 또한 어렸을 땐 그랬겠지, 하고 넘어가야 한다. 지금은 돈 받고 그렇게 하라고 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겠지만 어렸을 땐 나 역시 천방지축 뛰어다니지 않았나. 이마에 솟아난 땀방울이야 소매로 닦아내면 그만이었다.
성장판이 간질간질해서 그런가 보다, 아니면 특정 시기에는 사지 관절마다 용수철이 생겨나서 그런가 보다, 하고 여겨야 한다. 성장판 닫힌 지 오래라고, 용수철이 있었는지조차 기억 안 난다고 이해하지 않으려 한다면 어른이 아니다.
새로 산 옷을 깔고 뭉개서 털이 묻은 것도, 액자 유리가 깨진 것도 다 내 탓이다. 미리 정리하고 치웠더라면 발생하지 않았을 사고였다. 그래도 선물 받은 화분의 잎을 하나하나 다 떼어낸 짓은 간과할 수 없었다.
캣중딩 고 양을 앉혀놓고 야단을 쳤다.
“똑바로 안 앉을래? 오냐오냐했더니 끝이 없어, 그냥! 어디서 하악질이야? 너만 할 줄 아냐? 나도 무서운 사람이야! 하악! 하악!”
그간의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흥분하고 말았다. 훈육자가 흥분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당연히 아무런 교육적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교육 자체가 불가능한 아이를 앉혀놓은 것부터가 문제였다. 고양이는 독립적인 존재로 개와 달리 훈련으로 길들일 수 없다. 폴 갈리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고귀한 종족’을 한갓 인간 따위가 가르치려고 들었으니, 한숨을 아니 쉴 수가 없다.
불과 한 달 전만 하더라도 건강하게만 자라달라고 읍소하지 않았던가. 죽음을 떠올리면서도 약해지면 안 되었기에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고 양과 더 놀아주지 못해서, 더 따뜻하게 바라보며 쓰다듬어 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한 치 앞도 못 보는 것은 사람 일이나 고양이 일이나 매한가지 아닌가. 마음이 이토록 쉽게 바뀐다는 게 부끄러웠다.
건강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최면을 걸어보자. 저렇게 오두발광하는데도 안 다치는 게 용하지 않은가. 감사한 일이다. 저 아이도 어른이 되면 내려놓게 될 역할이다. 그것을 현재 충실히 즐기는 것뿐이다. 모든 게 한때다. 어린 시절도, 끝없이 품어져 나올 것 같은 활기도. 나만 내려놓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런데,
이건 너무하지 않나?
고 양을 앉힐 수도 없었다. 이미 저만치 도망가서 딴짓에 열중하는 척하고 있었다. 시치미를 떼는 연기가 아마추어를 넘어섰다. 침대 밖으로 나가서 혼내자니 한밤중이고, 다시 눕자니 잠은 고 양보다 멀리 달아났다. 벌써 두 번째다. 지난 약속은 무용했다. 뭔가 강력한 조치가 필요했다. 경직된 배를 손바닥으로 풀면서 새벽녘까지 궁리했다. 비상조치 내용을 머릿속에 적었다.
1. 고 양은 익일 00시부로 침대 진입을 금지한다.
2. 고 양이 1의 내용을 위반할 시 위협 경고를 할 수 있다.
3. 고 양이 2의 내용을 무시할 경우, 7일간 침실 개방을 하지 아니한다(누적 적용).
이튿날 저녁, 침대 발치에서 동침의 흔적을 치웠다. 내게는 이불 위를 덧씌우는 효과가 있어 털을 차단하는 최소한의 목적으로, 고 양에게는 잠자리를 표시하는 수단으로 깔았던 무릎담요를 거실로 귀양 보냈다. 애착하는 침구가 없어지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거두지 못했다. 네가 약속을 어겼으니 어쩔 수 없잖니? 담요는 거실에 깔아 두었으니까 거기서 자든지, 의자에서 자든지 네 맘대로 해. 고 양이 그간 갈고닦은 ‘장화 신은 고양이’의 애처로운 표정 연기로 이 상황을 무마하려고 시도했다. 이젠 안 통해. 먹히지 않자, 두 번째 ‘장화 신은 고양이’ 얼굴로 바꾸고는 전의를 다졌다.
어쭈, 어딜 올라오려고? 아직은 위반 아니네. 3분 남았어. 3분 동안 실컷 즐기려무나. ……3, 2, 1, 땡! 네가 아직 이해 못 하는 것 같으니까, 지금부터 나는 정당하게 위협 경고로 너를 쫓아낼 수 있어. 고양이 코앞에서 손바닥을 세차게 내리쳤다. 팡, 팡. 눈을 찔끔 감더니 침대 밑으로 일단 후퇴했다. 호기롭게 웃을 틈도 주지 않고 다시 올라오는 고 양. 이건 명백한 위반행위야. 과장을 보태 손을 높게 쳐들었다. 꿋꿋하게 세 번, 침대의 진동을 견뎌냈다. 끈질긴 녀석.
앞으로 7일 동안 침실은 온전히 나의 영역이다. 짐작건대 7일이 14일로 변경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실로 오랜만에 편안한 잠자리라고 생각하며 누웠다. 그러나 쟁취한 편안함은 3분을 채 넘기지 않았다. 문밖에서 끈질김만은 인디언 핏줄임을 외치고 있었다. 쟤, 울면서 복수의 칼날을 가는 건 아니겠지?
꿈을 꾸었다. 고 양이 싱긋 웃고 있다. 천장에서. 어떻게 거길 올라갔니? 어서 내려와! 네 발을 떼고 낙하한다. 복부 아래로. 악! 꿈은 순식간에 과거로 이동했다. 중학교 운동장이다. 축구공이 내게 날아온다. 결과를 뻔히 알고 있는 미래의 나. 한 걸음만 옆으로 피하려고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곳을 강타하는 공.
벌떡 일어났다. 귀 밝은 고 양이 내 기척에 반응하듯 다시 울었다. 어쩌면 계속 울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첫새벽, 식은땀을 훔치면서, 내 배를 뜀틀 착지 매트리스도 삼아버린 고 양을 용서하기로 했다. 경고를 무시하고 두 번씩이나 만행을 저질렀지만 다 잊기로 했다. 그렇다고 비상조치를 물릴 수는 없었다. 꿈속에서처럼 다음번엔 복부가 아니라 그 아래를 공격당할 수도 있으니까.
아침이 밝아오자마자 내용을 그대로 유지하되 제목을 수정했다. ‘고 양의 독립을 위한 지침’으로.
“고 양아, 너 몇 월령이지? 그래 9개월이야. 곧 성묘가 될 텐데, 혼자 못 자는 것은 창피한 일 아니니? 우선 침대 밖으로 잠자릴 옮겨볼까. 그러다 보면 거실에서 혼자 자는 게 편하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 이후에는 네가 알아서 이사하면 돼.”
고 양의 독립은 성공적이었다. 9년째 침대 밑을 고집한다는 점을 빼면. 내가 한눈팔 때 가끔 올라갔다 눈치껏 내려오는 것을 빼면.
여하튼 내가 잘 때는 침대 위엔 얼씬하지 않았다. 그렇게, 믿고, 싶다.
※ 두 번째 ‘장화 신은 고양이’ 얼굴은 1991년 칼데콧 아너상을 수상한 『장화 신은 고양이』의 표지 그림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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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창조물 가운데 채찍으로 노예를 만들 수 없는 존재는 단 하나, 바로 고양이뿐이다.
- 마크 트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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