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기도 전에 기름 냄새가 코 끝에 맴돌던 큰집
내가 안 막히는 길로 모시는 거지
서울-대구로 가는 길, 언제나처럼 새벽 3시쯤 출발하는 우리 가족. 원래도 아침형이지만 극아침형..아니 새벽형인 아버지는 출근하는 시간과 비슷하게 지방 내려갈 준비를 하신다. 요즘에는 KTX를 타면 1시간 반만에 동대구역에 도착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빠는 자차를 타고 가는 것을 고집하셨다(지금 생각해보면 KTX에 도착한 후 큰집이나 할머니집에 따로 이동할 때, 큰 집들을 들고 택시를 타야한다는 불편함 때문일 걸로 추측된다). 어쨋거나 그래도 해도 안 뜬 시각에 출발해서 그런지, 아니면 아빠가 당신 말대로 ‘운전을 잘해서 그런지’ 4시간 정도만에 대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할머니 댁에 가기 전에 시골 큰집(아직도 촌수가 어떻게 되는지 헷갈려서 정확히 6촌인지 8촌인지 어디의 큰 형님 아저씨인지 모르겠다)에 2박 묵는다. 항상 큰집에서 제사를 도맡기도 했고, 모든 사촌들과 가족친지 분들이 모여서 옛날 초갓집 방에 함께 묵고, 먹고 그러는 게 으레 했던 행사이기 때문이다. 큰집 구조에 대해서 잠깐 설명을 하자면, ‘ㄷ’자 형태로 되어 있는 초갓집과 기와집 그 사이의 집이다. 가운데에는 거실과 부엌이 연결되었으며 방이 2개 정도 딸린 본집과 그 옆에는 부수 방들이 있는 별관, 그리고 마지막으로 창고처럼 쓰는 허름한 건물 하나 이렇게 3개가 큰집의 전체이다. 너무 구석탱이에 있어서 대구에 사는 다른 친척들조차도 자차 타고 1시간 정도를 달려야 올 수 있는 거리이다. 이렇다보니 수퍼마켓은 걸어서 밭을 지나 20분 정도 걸어야 나타나고, 밥 먹고 이야기하고 자는 것 외에는 할 게 없는 전화기도 잘 안 터지는 곳이라는 게 어색하지 않다.
큰 집에는 큰 개 한 마리가 늘 있었다. 한 두번 바뀌었는지 갈 때마다 조금씩 다른 개가 있는 것 같았지만, 살랑살랑 꼬리르 흔드는 강아지가 아닌 우렁차게 짖으며 경계하는 한 마리가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흔히 말하는 시골 똥개를 데리고 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친척언니동생한테 들어보면, 다 자라면 잡아먹곤 하셨다고 한다. 그만큼 옛날 집에 옛날 사고관을 가진 큰집 아저씨였다.
남자 어른들 먼저 드신 후
여자와 아이가 먹는 문화
요즘 시대에 용납이 안 되는 관습이지만, 불과 7년 전만 하더라도 21세기에 남녀차별적 제사 문화가 존재했었다(나도 그걸 겪은 세대라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집안 대구 남자 어른들+남자 아이들 먼저 한 상에 갓 나온 새 음식을 먹고, 다 먹은 자리에 남은 음식들을 리필하면 그제서야 여자 어른들과 아이들이 먹는다. 그래서 숟젓가락에 양념이 묻어있는 경우도 허다했고, 여자들이 먹을 때 남자들은 담배를 피러 나가거나 거실에서 누워 티비를 보곤 했다. 물론 당연히 설거지는 여자어른들의 몫이다. 엄마들은 이런 문화를 자식들이 경험하고 싶지 않게 하고 싶었기에, 여자아이들은 부엌에 얼씬 거리지도 못하게 했다.
제사를 치를 때도 마찬가지이다. 엄청나게 많은 가짓수의 제사 음식들을 수시간에 걸쳐 여자들이 차려 내오면, 제사 끝나고 먹어 없애는 건 남자어르신분들이었다. 제사 치르고 나서는 음식이 뭔가 의미가 생기는 건지.. 그러고 나서 남은 음식을 겨우 여자들이 먹었었다.
사실 제사나 명절 음식의 대부분은 기름으로 만들어 내기에 몇 끼만 먹어도 물린다. 또 온 몸이 기름에 둘러 싼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군말 없이 먹으며 지내야 한다. 그나마 산적에는 고기가 있어서 맛있기라도 하지, 생선류나 젓갈류(대구는 젓갈 반찬이 발달되어 있다)는 쳐다보기도 싫어진다. 또 명절 기간 내내 과일도 배나 사과라서, 피부는 좋아지지만 살은 엄청나게 찌는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이 아니기 마련이었다.
어른들은 이런 힘든 나날들을 보내고, 저녁에 술 한 잔하러 나가신다. 그걸로 회포와 섭섭한 것들을 풀고 돌아오시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 같은 어린애들은 티비를 보거나 슈퍼에 가서 과자를 사 오곤 했다. 사실 나는 어른들이 함께 노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얼른 어른 되어서 나도 저 술자리에 끼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치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그냥 서로 있는 앙금과 갈등을 직접적으로 해결하지 않은 채 술기운에 무야무야 흐려지게 만드는 회피책이었던 게 아닌가 싶다.
대구에 있으면서 안 좋은 기억들만 있는 건 아니다. 사실 아이들과 남자들 입장에서는 좋은 추억들이 가득이다.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맛난 음식들을 먹고, 도시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가족다운 정다움을 경험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건 여자어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들이었고, 깊은 속내를 덮는 겉포장지 같은 쾌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