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틴이 무너져도 죽지는 않는다

엄마는 많이 아프고 나는 [무너진다]

by 소요

한때 우리에게 루틴이라는 게 있었다.


6시에 일어나 한약을 데운다. 아빠는 밤새 굳어진 엄마의 팔다리를 마사지해서 엄마를 깨운다. 나는 한약을 먹인 뒤(반은 먹고 반은 흘린다) 우리 셋은 2인 3각이라도 하듯 움직일 준비를 한다. 아빠가 앞에서 엄마의 두 팔을 자신의 목에 두르고 일으켜 세우고(부루스 추는 자세를 하고), 나는 뒤에서 엄마에게 몸을 밀착한 뒤 백허그를 한다. 엄마를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하면서 엄마를 화장실로 데려가기 위해 우리가 고안한 독특한 방식으로 엄마를 화장실에 데려간다. 늙으면 아이가 된다는 말은 레토릭이 아니다. 변기에 앉아서 오줌을 누기만 해도 우리는 박수칠 준비가 되어 있다. 딸 키울 때 똥만 누어도 손뼉 치던 때처럼. 시원하게 오줌을 누는 소리는 어떤 음악보다도 우리의 아침을 즐겁게 만든다.


화장실에 온 김에 엄마를 씻긴다. 화장실에 한번 오기가 힘드니 온 김에 하는 거다. 명시적으로 나는 뭐, 아빠는 뭐, 이런 식으로 나눈 적은 없다. 어쩌다 보니 엄마를 씻기는 건 내가 한다. 내가 옷을 벗기기 시작하면, 아빠는 신문을 보러 간다. 처음에는 엄마 알몸을 보는 것도 그렇게 어색하더니 이제는 익숙하다. 양치질을 하라고 시키고(그럴 힘이 없으면 내가 시키고) 머리부터 발가락 사이까지 구석구석 깨끗하게 씻긴다. 말 한마디라도 더 시키려고 묻기도 한다. 샴푸로 감을까? 비누로 감을까? 늘 샴푸라고 말한다. 앞으로, 뒤로, 옆으로 기울어지는 몸을 붙잡고 씻기려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엄마, 욕이 나오려고 하네.


차마 욕은 못한다. 너무 힘들 땐 엄마에게 이렇게 생색을 낸다. 알아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응응… 하는 소리를 낸다. 알아 들어도 싫고 못 알아들어도 싫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엄마가 나를 씻겼다. 집에 와서 목욕탕에 같이 가면 엄마는 꼭 나를 자기 앞에 앉히고 씻기곤 했다. 때는 밀어야 한다면서 어릴 때보다 한층 강력해진 이태리타월로 내 몸의 묵은 때를 신나게 벗겨내고 좋아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엄마를 씻기고, 나는 좋아하기는커녕 한숨 쉬고 (아직까지는 마음속으로) 욕을 한다. 몸을 닦고, 옷을 입힌 다음 아빠를 부른다. 아빠가 앞에서 끌고 나는 뒤에서 밀면서 엄마를 욕실 밖으로 데리고 나온다.


내가 밥을 하는 동안 아빠가 엄마의 머리를 말린다. 아빠는 자기 머리 말리듯 아무렇게나 머리를 휘휘 저으면서 말린다. 이왕 말리는 거 이렇게 예쁘게 잘 말리라고, 잠시 본을 보이면서 잔소리를 한다. 아빠는 내가 시킨대로 하려는 시늉을 한다. 엄마를 예쁘게 하려는 게 아니다. 얼굴도 생기 없이 칙칙한데, 머리마저 심란하게 헝클어져 있으면 엄마 꼴 보기 싫을까 봐 그렇다.


국 하나에 김치와 밑반찬으로 밥상을 차려놓고 세 식구 둘러앉으면 7시 30분이었다. 나는 따뜻한 국에 밥을 말아서 엄마를 떠 먹이고, 아빠는 반찬을 부지런히 엄마 입에 가져다 나른다. 어미 새가 새끼들 먹이듯 딱 그 모양새다. 밥을 다 먹고 나면 인간극장이 나온다. 예전에는 신파 조의 인간극장이 싫었지만, 지금은 그걸 보면서 엄마와 대화를 나눈다. 대화라기보다 인간극장을 오픈 북으로 해서 내가 질문하고 엄마가 답하는 단답형 퀴즈 같은 거다. 엄마 저 사람 어느 나라에서 왔대? 저 사람 뭐 하는 사람이야? 괜찮은 날은 퀴즈를 잘 풀고, 안 좋은 날은 퀴즈고 뭐고 입을 꾹 닫고 있다. 신파 프로그램답게 어느 날은 내 몸속에 고인 물을 배출시키기도 한다.


그다음은 아침마당이다. 얼마 전까지는 아침마당 로고송이 나오면 엄마 몇 시야? 물으면 8시 30분이라고 대답했었다. 아침마당의 위력을 실감했다. 아침마당을 보면서, 거기에 나오는 사람들 또는 이야기들을 소재 삼아 겨우 몇 마디 대화를 하고, 운동-그래봤자 손잡이 잡고 일어서 있는 거지만, 암튼 우리가 운동이라고 부르는 그걸 한두 시간씩 하기도 했다. 이렇게 루틴이 일정하게 유지되면 그래도 안정감 위에 기대라는 것이 살짝 올라갈 수 있었다. 당장 엄마가 좋아지지 않아도 언젠가 좋아질 거라는 믿음 같은 거다.


그런데 결국 무너졌다. 두 달가량 열심히 갈고닦아 만든 루틴, 신봉하듯 지켜온 루틴이 사라졌다. 파도에 때려 맞은 모래성처럼 스르르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흔적 없이 사라졌다. 공든 탑이 무너진다. 탑 주위를 돌면서 버티고 버티던 나도 주저 앉는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아름다운 때였다. 그래도 정해진 일정과 규칙이라는 게 있고 생활 리듬 같은 것이 있었다. 그래도 살고 있다는 느낌, 뭔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엄마눈 날이 갈수록 퇴행했고 루틴에 균열이 생겼고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짜증, 화, 우울, 혼란과 절망이 골고루 뒤섞인 날들을 보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일을 견뎌나갈 수 있을지 묻는 물었다. 죽지 못해 산다. 현실을 바꾸지 못하니 생각을 바꾸는 수밖에. 한참을 바닥을 기다가 이제는 조금 편해졌다. 할 수 없다. 할 만큼 했다. 내려놓음과 포기 그 중간쯤의 마음가짐으로 이제는 되는 대로 한다. 될 대로 되라는 마음도 있고.


밥을 먹었을 시간인데 아직 밥도 안 했다. 한없이 게을러지고 무책임해진다. 혼자였다면 밥 하기 싫어서 엄마를 굶겼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렇게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은 아니다. 컵라면이라도 먹였으면 먹였지, 엄마를 굶겨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굶기지는 않을 테지만 매일 삼시세끼 정성스럽게 밥상을 차리는 건 때려 치우고 싶긴 하다. 삼시세끼 꼬박꼬박 밥 잘해 먹이면 서서히 회복될 줄 알았는데, 아무리 아파도 밥은 잘 먹길래 금방 나을 줄 알았는데, 내가 정성을 쏟는 만큼 엄마가 좋아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헛된 꿈이고 오만한 생각이었다. 애초에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는 사람이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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