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살리고도 싶고 죽이고도 싶지9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한다. 오늘의 샴푸를 거른다. 엄마가 쓰던 한방샴푸, 내가 새로 사 온 샴푸, 그리고 최근에 청소하다가 발견된 호텔 어메너티 샴푸. 오늘은 얼마나 된 건지는 모르지만 좋아 보이는 호텔 샴푸로 머리를 감는다. 샤워가 끝나면 바로 욕실 청소에 돌입한다.
요즘 내가 가장 신경 쓰는 것은 거울이다. 지저분한 거울이 싫다. 요즘엔 거울에 양치질할 때 치약이 튀어 생긴 하얀 얼룩이 신경에 많이 거슬린다. 부드러운 수세미를 골라 정성스럽게 거울을 문질러 얼룩을 지우면서 미지근한 물로 살살 씻어낸다. 물기를 잘못 건드리면 또 얼룩이 진다. 그대로 마르게 내버려 둔다.
그다음 세면대. 우선 수전을 닦고, 수전과 세면대가 만나 곰팡이가 생기기 쉬운 곳은 쓰다 버린 칫솔로 닦는다. 세면대 움푹 들어간 곳을 먼저 닦은 다음 세면대 밑 불룩 나온 곳을 아기 배 문지르듯이 둥글게 둥글게 닦는다. 역시 미지근한 물로 싹 씻어내면 방금 새것을 설치한 것처럼 빛이 난다.
욕실장을 연다. 어제 오후 햇볕에 보송보송하게 말려 보남파초노주빨 색깔별로 착착 개어놓은 수건이 꽉 차 있다. 군대도 안 갔다 왔는데 수건을 각 맞춰 넣어두게 된다. 그냥 뿌듯하니까. 어떤 수건을 쓸까 잠시 고민한다. 오늘은 하늘빛과 닮은 하늘색 수건을 쓰기로 하고, 굳이 중간에 있는 하늘색 수건을 빼내고 흐트러진 수건을 다시 매만진다. 하늘색을 뺏어도 무지개 색깔에는 큰 무리가 없다. 요즘은 기념품으로 받은 수건이라도 품질이 좋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파스텔톤 기분이 되어 욕실을 나온다. 엄마에게 간다. 엄마가 눈을 뜨지 않고(눈을 못 뜨고) 누워있는 모습을 본다. 딱 봐도 오늘의 각이 나온다. 갑자기 주위가 회색 빛으로 바뀐다.
_엄마 눈 좀 떠 봐!
목소리를 높여서 다시 한번 부른다. 내 목소리가 작아서 눈을 못 뜨는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엄마에게 말하는 내 목소리는 점점 커져간다.
_엄마 밥 먹어야지. 밥 먹는데 눈 감고 있으면 어떡해. 눈. 좀. 떠. 봐!
이번에는 음절을 하나씩 말한다. 이래도 저래도 엄마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지 못한다. 그래도 신기하게 입은 벌린다. 밥숟가락이 들어오자마자 씹으려 해서 이빨과 숟가락이 부딪힌다.
_엄마 맛있어?
_응, 맛있어.
밥 먹으라면 밥 먹겠다고 입 벌리고, 맛있냐고 물어보면 맛있다고 대답해 주는 게 어딘가 싶다. 엄마에게 하는 말들은 옛날 경상도 남자처럼 용건만 간단해지고 있다.
경상도 사람 하니까 생각나는 경상도 남자가 있다. 대학원 때 대구 남자와 만났다. 결혼까지 생각했다. 사랑하지만, 그 남자는 나를 많이 울리기도 했다. 말이 정말 없었다. 뭘 물으면 단답형으로 겨우 대답했다. 오빠 나 사랑해? 물으면, 그걸 꼭 말해야 아나, 했다. 그때는 내가 약자였다. 응, 꼭 말해야 알아. 말하지 않으면 몰라.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저렇게라도 말하는 것이 사랑하는 거라고 믿으려 애썼다. 엄마에게 대구 남자를 만난다고 했다. 내가 하는 일에 말리거나 반대하는 법이 없는 엄마인데 엄마가 덜 좋아하는 게 느껴졌다. 엄마는 내가 말하는 걸 좋아하고 다정한 사람 좋아하는데, 경상도 사람은 말수가 적고 무뚝뚝하다고 걱정을 했다. 그리곤 대구 외삼촌들 이야기를 하곤 했다. 헤어졌다고 하니 그제야 잘했다고 했다. 나에겐 표현 많이 해주는 다정한 사람이 필요하다면서.
그만큼 나는 이야기하는 걸 좋아한다. 엄마가 아프기 전 엄마와 쓸데없이 다양하고 사소한 이야기를 다정하게 나누곤 했다. 엄마가 아프고, 점점 말수가 줄고, 이제는 다정한 말과 태도를 잃어간다. 그나마 하는 말도 기능적인 최소한의 말 뿐이고, 그마저도 점점 퉁명스러워진다. 문득 내가 사람이 아닌 사물에 보다 다정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엄마보다도 더 아무런 반응이 없는 욕실 거울, 세면대, 수전, 수건의 색깔에 다정하다. 변명하자면 엄마와 그런 교감을 느끼지 못하니 사물에 정성을 쏟고 다정한 손길로 어루만진다. 갑자기 현타가 온다. 나는 왜 사람보다 사물에 더 다정한 사람이 되었을까. 아프고 병든 엄마에게 다정할 수는 없는 건가. 엄마에게 다시 다가간다. 아무래도 사물보다 사람에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