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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유 Jul 03. 2024

너는 원숭이가 아니다

망해도 망한 게 아니다

학교 끝나는 시간은 정확히 모르지만, 학교 끝났을 시간이 훨씬 넘은 것만은 분명한데, 전화가 없다. 그래도 기다린다. 시험 끝나고 친구들이랑 수다 떨고 노느라고 그럴 수도 있으니까. 저녁 6시가 넘어가자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전화가 없는 걸 보니 시험을 망친 것은 확실시되고, 어디 가서 울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작년인가 한번 그런 적이 있다. 수학 40점을 맞고 애가 사라졌다. 진짜 사라진 건 아니고 카톡에서 잠수를 탄 전적이 있다. 그때 내가 딸을 위로했던 말이, 그럴 수도 있지, 어떻게 다 잘해, 그래도 넌 국어는 잘하잖아, 좋아하고 잘 하는 게 있으니까 괜찮아, 였다. 오늘 시험이 국어랑 역사다. 국어와 역사는 딸이 제일 자신만만해하는 과목이다. 시험 보기 전에도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엄마, 만점 받고 돌아올게, 했었다. 그렇게 까부는 게 더 불안해서, 워워, 하긴 했었고. 지금 보니 망했네, 망했어. 까불다가 망했어. 전화를 걸었다. 안 받는다. 본격적으로 걱정이 되려는데 전화가 왔다.


(한껏 풀 죽은 목소리로) 엄마?

응, 엄마 전화 기다렸는데…

깜빡했어. (뭬야?)

지금 어디야?

집이야. (뭬야???)

뭘 좀 챙겨 먹었어?

(시험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분위기상 바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응, 우유 마셨어. 엄마 시험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지?

응. 어떻게 됐어?

망했어.(흐느끼는 척했지만, 울진 않았다)

어려웠나 보네.

응, 좀 어려웠어. 국어 83점이야. 두 개는 몰라서 틀렸고, 하나는 실수했어.    

아…


웬만하면 그 정도면 잘했네, 그럴 때도 있지, 했을 텐데 그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날 정도로 국어 83점은 수학 40점보다 나를 더 놀라게 만들긴 했다. 수학 때문에 괴로워할 때도 넌 국어를 잘하잖아, 국어를 잘하는 게 더 어렵대, 영어, 수학은 학원을 다니면 성적이 오르지만 국어는 학원을 다녀도 성적 올리기가 어렵대, 라고 위로하곤 했는데, 이제 대체제를 개발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국어는 늘 만점이었다. 국어는 따로 공부를 안 해도 읽기만 하면 그 안에 답이 있으니까 제일 쉽다고 했다. 수학 잘하는 애들도 풀기만 하면 답이 나오니까 쉽다고 얘기한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책 좀 읽은 것이 국어 성적의 두둑한 밑천이 된다고 믿어왔다. 이제 슬슬 밑천이 떨어져서 성적이 떨어졌을 수도 있고, 이제부터 국어란 과목이 책 좀 읽었다고 날로 먹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닐 수도 있다.  


처음엔 최후의 보루가 무너진 기분이었지만, 어찌 보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국어 시험은 딸의 자만심이 무너뜨렸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날이 있다, 가 아니라 애초에 나무를 자유자재로 타고 노는 원숭이가 아니다. 이번 시험에서 그걸 배웠으면 망해도 망한 게 아니다. 그렇게 딸에게 말하면, 뭐라는 거야. 하나도 위로가 안돼! 그러겠지. 어줍지 않은 위로는 늘 역효과가 있었기에, 그냥 스스로 느끼기를 바라면서 입 다고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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