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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유 Jul 02. 2024

꼴찌가 시험을 잘 본 이유

시험을 잘 봤다고 합니다

엄마?

응, 시험 끝났어?

응, 음하하하. 이게 나야. 하하하하.

목소리 보니 시험 잘 봤나 보네.

응, 잘 봤어. 아주 만족해.

(하도 큰소리치길래 만점이라도 맞은 줄 알고, 올백이야? 물으려던 찰나)

영어는 82점, 과학은 93점. 잘 봤지?

응, 잘 봤네. 고생했어. (영혼없지만 있는 척)

선생님이 어렵게 낸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쉽게 내셨더라고. 아는 건 맞고 모르는 건 틀렸어.

아, 그래, 그러면 됐지. 수고했어.


딸에게 전화가 오면 엄마와 아빠에게 손녀 목소리도 들려줄 겸 스피커폰으로 틀어놓는다. 딸의 재기발랄한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엄마는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하고 듣는다. 아빠는 딸이 시험을 잘 봤다는 얘길 듣고, 다른 애들도 다 잘 본 거 아니야?라고 말했으나 딸이 듣진 못한 거 같다. 역시 점수는 됐고, 몇 등인지 궁금해서 대놓고 말하는 할아버지. 역시 상대평가에 익숙하고 나도 속으로는 궁금하지만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고, 그냥 잘했다니까 잘했다고 영혼없이 말하고 있는 엄마.


지금은 어디야?

학교 앞 공원.

거기서 뭐 해?

애들이랑 정답 맞혀보고 이제 집에 가려고.

애들 누구?

찬솔이랑 서진이랑 하윤이.


찬솔이랑 서진이랑 하윤이는 1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지금은 다 다른 반이 되었는데도 자주 만난다. 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중학생은 1학년때 친해진 친구가 3학년때까지 가는 것 같다. 방과 후나 주말에 놀때도 1학년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이랑 주로 논다.


애들도 시험 잘 봤고?

응, 다 잘 봤대. 영어는 다 100점인데, 찬솔이는 이번에 좀 망쳐서 94점이고. 서진이는 이번에 영어 공부 하나도 안 했는데 100점이래. 신기하지? 찬솔이는 과학이 96점, 서진이는 100점, 하윤이는 과학 98점이고.

다들 잘 봤네.

응, 시험이 쉬워서 다들 잘 본 거 같아. 만점도 많아.


정확한 계산은 안 해봤지만, 대충 들어봐도 넷 중에 딸이 꼴찌(이렇게 표현하기 싫지만^^)다. 물론 하 필 표본이 공부 잘하는 애들일 수 있지만, 어쨌든 그중에는 꼴찌인데 그래도 시험 잘 봤다고 큰소리치는 딸의 멘탈이 신기하다. 나 같으면 다 잘하는데 나만 못한 것 같아 속상할 거 같고, 공부를 안 해도 잘하는 애들한테 샘날 거 같고, 괜히 그 사이에서 끼어 기죽을 거 같고, 그래서 같이 있기 싫거나 내일 시험 잘 보고 싶어서 빨리 집에 가서 공부할 거 같다. 내 딸은 아무리 봐도 나와는 좀 다른 종자인 거 같다.


그런데 시험을  봤다는 기준이 뭘까? 나는 딸에게 시험  보면 보고 싶어 하는 뮤지컬 시카고를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다.  정도면 딸은 시험을   걸까? 나는 뮤지컬 티켓을 끊어줘야 할까? 


평생 경쟁사회에서 살아 온 우리는 아무래도 상대평가에 익숙하다. 반에서 1등 하면 잘했다고 볼 수 있겠지. 그런데 딸이 다니는 학교가 그 지역에서 가장 학력이 낮은 학교라면 1등이 잘한 건가? (그 지역 고등학교 교사인 친구가 나에게 애 공부 좀 시키라고,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 알려줬다. 뭘로 평가하는 건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지만, 알아서 뭐 하나 싶어서, 물어보지 않았다.)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등수를 알 수 없다. 대한민국 모든 중학교는 그런 건지, 딸이 다니는 학교만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등수를 알 수는 없다.


그럼 절대평가로 생각해 보자. 올백을 맞으면 잘 본 걸까?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평균 90점 이상이면 잘 본 걸까? 뭐 통념상 나쁘다고 볼 수 없겠지만, 딸 친구 중에는 한 개 틀려서 엉엉 우는 친구도 있다고 한다.


나 스스로 시험을 잘 봤다는 것이 뭔지 정의하지도 않고, 막연하게 잘 보면 뮤지컬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다. 나와 달리 딸은 잘 봤다는 정의를 명확하게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딸은 철저하게 주관적 자기마음이 기준이다. 자신의 마음에 흡족하면 잘 본 거다. 모르는 건 틀리는 게 당연하고, 아는 것을 실수하지 않으면 잘 본 거다. 지난번과 비교했을 때 하나라도 더 맞으면 잘 본 거다. 남이야 어떻든, 그 중에 꼴지라도 자기가 만족하면 잘 본 거다. 어떨 때는 어떻게 애가 이렇게 공부 욕심도 없고, 승부욕도 없을까 아쉽다가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저 잘난 맛에 사는 게 부럽다. 무엇보다 이렇게 우리는 떨어져 지내는데, 멀리서 내가 딱히 해줄 수 있는 것도 없는데 괜히 시험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시험 망쳤네, 어쩌네 하면서 울고 불고 하면 내가 멀리서 너무 괴로울 것 같다. 그래 누가 뭐래도 네가 잘했다면 잘 한 거다. 멋지다. 이홍시! 홍시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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