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와 함께 학교에 갑니다
엄마?
응, 이제 학교 가?
응, 근데 오늘 늦잠 자서 조금 늦었어. 빨리 걷고 있는 중이야.
어제 늦게 잤어?
아니 일찍 잤는데, 늦게 일어났어.
아빠가 안 깨웠어?
응, 안 깨웠어.
아니, 이... 사람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하면서 속에서 부글부글(하지만 혼자 딸과 지내는 남편에게 미안해서 잔소리는 못하겠지)
어디쯤이야?
회색의 무지개다리 지나고 있어.
회색의 무지개다리는 다리가 아니다. 이사 올 때만 해도 없었던 우리 동네에 새로 생긴 고가식 고속도로인데, 하필 딸이 학교 갈때 그 아래를 지나야 한다. 어디냐고 물을 때마다 거기를 지날 때가 많은데, 고속도로 어쩌고 설명도 구차하고, 그 지점이 딸 등굣길 중에서 가장 안 좋아하는 삭막한 풍경이라 빨간 머리앤이 그러듯이 이름을 붙이면 좀 나을까 하여 딸이 붙인 이름이다. 낭만 좋아하는 딸도 저 다리는 어떻게 해도 낭만적일 수가 없다며, 아쉬워했다.
오늘 아침엔 뭐 먹었어?
미역국
미역국? 어제도 먹었잖아?
응, 미역국 이제 좀 지겨워. 그래도 아빠가 끓여준 건데 그냥 꾸역꾸역 먹었어.
에고, 엄마가 맛있는 거 해줘야 되는데…
아니야. 그래도 아빠가 잘해줘(사줘.. 도 있을 것이고)
오늘 학교 급식이 콩나물밥에 불고기 퀘사딜라더라. 학교 가서 맛있는 거 먹어.
매일 아침 딸 학교 급식 메뉴를 살펴본다. 정작 같이 살 때는 궁금하지 않았지만, 떨어져 살다 보니 딸이 뭘 먹고 다니나 궁금해서 매일 챙겨서 보고 아침에 급식 메뉴를 딸에게 알려주고 대화 소재로 삼는다.
학교 급식은 대체로 맛있는데, 가끔 조합이 이상한 거 같아. 콩나물밥에 퀘사딜라라…
영양소를 골고루 맞추려다 보니, 또 애들 입맛이 다양하니까 한식, 양식 섞어서 하는 것 같아.
그러겠지. 근데 뭐 공짜밥인데 뭘 불평하겠어. 그냥 감사하게 먹어야지.
그래, 집에서도 그렇게 골고루 못 먹잖아.
맞아. 열심히 먹어야지. 근데 애들이 급식을 잘 안 먹어서 걱정이야.
아… 그래도 넌 밥 잘 먹으니까 엄마가 걱정 안 해도 되니까 너무 좋아. 공부 잘하는 것보다 밥 잘 먹는 게 더 좋아(사실은 공부도 잘하면 더 좋겠지만… 너무 욕심부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참, 어제 급식하다가 다연이 엄마랑 현규 엄마 봤다. 배식하러 오셨더라고.
다연이 엄마는 딸 초등학교 때부터 최근까지 피아노 레슨을 했다. 최근에 취업을 하게 되면서 피아노 레슨을 못하게 되었고 딸도 10년을 조금 못 채우고 피아노를 그만두었다.
반가웠겠네.
응, 반가웠어.
다연이 엄마 보고 뜨끔하지는 않았어?
왜? 피아노 연습 안 해서?
응.
안 뜨끔했는데.
피아노 레슨을 그만두면서 다연이 엄마는 딸에게 지브리 악보집을 사주면서 일주일에 한 곡씩 연습하라고 했고, 딸은 약속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편이라서 지킬 줄 알았는데, 내가 알기로 한 번도 안 했다. 피아노에 먼지가 잔뜩 쌓였겠지. 피아노 뚜껑이라도 닫아 두라고 할걸.
방학 때 하지 뭐.
그래 연습해서 엄마 좀 들려줘. 너 피아노 치는 소리 듣고 싶어.
그래.
큰소리로 약속했지만 안 할 거 같은 느낌적 확신이 들었다. 어렸을 때 나의 피아노 선생님은 긴 자로 손등을 때리면서 엄하게(?) 레슨을 하는 선생님이어서 피아노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다. 딸의 피아노 선생님은 그냥 즐겁게 음악을 하고 오래도록 할 수 있는 선생님으로 골랐고, 그 덕분인지 또래 친구들보다 늦게까지 피아노를 쳤다. 대개 많은 친구들이 중학교에 가면서 피아노를 그만두는데, 딸은 늦게까지 피아노를 친 편이긴 하다. 딸이 받은 (아직까지는) 유일한 사교육이었고, 오래도록 피아노를 쳤으면 했는데 중단해서 아쉬워서 어떻게 하면 딸이 다시 피아노를 칠 수 있을까 고민 중이다.
근데 오늘 호위무사가 바뀐 거 같네. 소리가 달라.
딸 등굣길에는 옆에 작은 산이 있어 그런가 새가 많다. 전화할 때도 새소리가 새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많이 들린다. 처음엔 딸 목소리가 새소리에 파묻혀 시끄럽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듣다 보니 딸의 등굣길을 지켜주는 호위무사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새들이 널 지켜주는 호위무사 같다고 하자, 딸은 감정이입이 안 되는지 별로 동의하지 않는 눈치였는데,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걸 눈치챈 딸이 엄마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하면 그렇게 부르라고 허락해 주었다. 이팔청춘의 나이가 되면 부모의 기분을 헤아려 맞출 줄도 안다.
그러네. 참새가 아니라 직박구리가 온 거 같은데.
아빠한테 물어봐.
어떻게 물어봐?
녹음해서 들려줘봐.
응, 알았어.
남편은 우리 집 새 전문가이다. 눈이 좋아서 맨눈으로도 새를 잘 발견하고, 무슨 새인지 식별하고, 새소리만 듣고도 무슨 새인지 안다. 그 덕분에 나와 딸도 새에 관심이 생겨, 주위 사람에 비해 새에 대해 좀 아는 편이고, 새를 보면 새도감을 뒤적이며 이름을 알아내려고 애쓰고, 한때 우리는 10배율짜리 싸구려 망원경 하나 들고 탐조를 다닌 적이 있다. 그때 참 좋았는데, 그런 날이 다시 올까?
근데, 엄마, 엄마(호들갑 모드), 뮤지컬 시카고 알아?
너무 잘 알지.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뮤지컬 중에 하나야.
(너무나 반갑고 신나는 목소리로) 그래? 봤어?
응, 봤지. 근데 갑자기 시카고는 왜?
아... 그게... 요즘 시카고가 떡상 중이거든. 지금 학교에 다 와서 나중에 말해줄게.
그래, 밥 잘 먹고 좋은 하루 보내고.
응, 엄마도 할머니랑 잘 지내.
뮤지컬 시카고는 내가 최애 뮤지컬이다. 뉴욕 브로드웨이에서도 봤고, 런던 웨스트엔드에서도 봤고(물론 배낭여행이라 돈이 없어서 진짜 꼭대기층 기둥으로 시야가 가려지는 자리에서 봤지만), 한국에서도 봤고(연애시절 남편이 생일선물로 보여줬다), 공짜 표가 생겨서 또 봤고, 영화는 10번쯤 봤다. 근데 뮤지컬 시카고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딸이 왜 갑자기 뮤지컬 시카고 이야기를 왜 하는지 너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