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 때문에 벌어진 일
요즘 아빠가 텃밭에서 콩을 잔뜩 가지고 온다. 콩은 정말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콩은 싫다. 임신하고 출산하면서 콩을 먹으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다. 내 식성에 영향을 받아 애도 콩을 안 먹을까 봐 억지로라도, 모성애로 먹은 거다. 특수한 모성애가 발휘되는 와중에도 콩과는 끝내 친해지지 못했다. 이 정도면 정말 궁합이 안 맞는 음식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내 딸도 콩 안 먹는다. 내가 안 먹으니 애한테 억지로 먹이려고 하거나, 먹으라고 안 한다. 어릴 때 콩 먹으라는 소리가 정말 싫었다. 콩이 좋은 건 알지만 싫어하는 걸 스트레스 받으면서 억지로 먹느니 다른 음식으로 보충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학교 급식에 나오는 콩은 먹는다고 한다. 초등학교때 급식은 남기면 안 되는다는 생각이 아직까지 위력을 발휘하고 있고, 집에서면 모를까 밖에 나가서까지 콩을 골라내는 짓은 못하겠다고 했다. 어쩌다 보니 나보다는 나은 자식이 내 뱃속에서 나왔다.
그렇게 싫은 콩을 아빠가 계속 들고 오니 그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나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건 요리하고 싶지 않다. 내가 좋아해야 요리하는 동안 즐겁다. 그나마 내가 좋아하는 콩 까는 거다. 인기척을 하고 콩깍지를 열었을 때 각자 자기의 공간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모양을 보면 웃음이 난다. 핑크색 마블링은 또 어떻고. 미학적으로 훌륭하다. 콩 까다 보면 간병하느라 찌든 내 마음이 부드럽게 풀어진다. 콩 깔 생각을 하니까 엄마를 씻기는 일도 덜 힘들다. 엄마를 다 씻기고 옷 입히고 머리 말리고 화장품 바르고 콩 까러 나갔는데, 아빠가 콩을 다 까놓았다. 콩을 왜 다 까놨어? 벼락 같이 화를 냈다. 그럼 콩을 까지. 나에게 날벼락을 맞은 아빠가 중얼거린다. 다시 생각해보니 아빠도 콩이 까고 싶었나 보다. 사람 마음이 다 비슷하겠지. 콩이라도 까면서 머리 비우고 싶은 거다. 이제 콩을 처치하는 일만 남았다. 내 입으로 들어올 꿈도 꾸지 말아라, 콩 소쿠리를 저만치 밀어놓았다.
방문 간호사 선생님이 오셨다. 우리집에 방문하신지 백일이 넘어가다 보니 식성까지 알게 된다. 백퍼센 트 확률로 콩을 좋아하시겠지만 예의를 차려 여쭤보았다. 콩 좋아하시면 드리겠다고. 정말요? 하면서 반색을 하신다. 그럴 줄 알았다. 콩 너무 좋아한다고, 특히 강낭콩 좋아하신다고 한다. 잘 됐다, 다 가져가시라고 소쿠리째 드렸더니 미안하게 이 맛있는 걸 어떻게 다 가져가냐며, 냉동실에 넣어두고 먹으라며 반을 남겨놓으셨다. 냉동실에 들어가면 냉동실에 얼려서 버리게 될텐데. 얼려서 버리는 것은 더 싫다. 밥에 넣어먹는 건 더더 싫다.
인터넷을 뒤졌다. 강낭콩 먹는 방법. 후무스 만드는 법도 나오고, 어라 콩국수가 나온다. 보통 콩국수는 노란콩 백태로 만들지만 강낭콩도 콩국수를 해먹는단다. 그래 콩국수를 하자. 콩밥은 죽어도 싫고, 콩국수도 그래도 김치랑 먹으면 괜찮다.
당장 삶았다. 아침에 따온 거라 10분만 삶으면 된다. 삶는 동안 국수도 삶고, 고명으로 오이도 썰어두었다. 다 삶은 콩에 소금 조금 넣고 믹서기로 갈았다. 위잉, 위잉, 몇번의 소음 끝에 콩은 사라지고 달큰한 콩국물이 되었다. 아빠와 엄마는 콩국수 귀신들이다. 삼시세끼를 콩국수 먹으래도 먹는다고 했던 게 엄마다. 엄마가 쓰러지고 콩국수도 못 얻어먹는 줄 알았던 아빠도 콩국수네, 하면서 입맛을 다시는 눈치다. 둘이 후루룩 후루룩 콩국수 한 사발씩 말아 드시고는, 사이좋게 쿨쿨 낮잠을 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