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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유 Aug 21. 2024

나를 부자로 만든 손

이제 그만

딸이 나에게 왔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나는 분주하다. 한동안 먹을 반찬을 좀 해서 들려 보내려면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바로 꺼내먹을 수 있도록 알맞은 용기를 골라서 포장을 해야 한다.


엄마, 아빠한테 오이냉국 해달라고 했는데 안 해줬어.


며칠 전 딸이 했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남편에게 왜 안 해줬냐고, 뭐라고 할 수가 없다. 남편도 애 밥 해 먹이느라고 나름대로 애쓰고 있을 것이다. 우선 오이냉국 한 통을 만들었다. 다시마 물을 미리 우려 놓았다. 오이 댓 개를 채 썰고, 매콤한 거 좋아하는 딸의 입맛에 맞춰 청양고추를 얇게 썰어넣고 색깔을 내기 위해 빨간 고추도 썰어 넣었다. 소금, 집간장과 액젓으로 간을 맞추고, 식초, 다진 마늘, 깨소금을 넣으면 끝.


불고기를 양념에 재웠고, 알감자를 졸였고, 미역줄기를 데쳐 볶았고, 뼈쥐포를 기름에 볶아서 양념했고, 오이지를 썰어 무치고, 노각을 절여 무쳤다. 가기 전에 감자전 해먹이려고 감자 열 개를 까서 강판에 갈았고, 차에 가면서 심심할 때 먹으라고 옥수수 대여섯 개를 삶았다. 그리고 선풍기 앞에 대자로 뻗었다. 그거 했다고 허리가 욱신욱신 아프다. 누워서 엄마 생각을 한다. 아파 누워 지내는 엄마 말고, 내 반찬 해주느라 분주했을 과거의 엄마를.


나는 늘 반찬 부자였다.


엄마가 이런저런 김치와 반찬을 많이 해서 보내줬다. 엄마 손이 워낙 커서 부지런히 먹어도 반찬은 늘 남아돌았다. 그렇게 결국 버려지는 게 싫어서 엄마가 택배로 반찬을 보내주면 선제적으로 이웃에 사는 친구들과 나눠 먹었다. 친정엄마가 돌아가신 친구들에게는 더욱 인심을 쓰곤 했다. 그 이야기를 엄마에게 하면, 그다음에는 더 많은 양이 왔다. 더 많이 나눠먹으라고 했다. 우리 집에 갑자기 손님이 와도 나는 쉽게 밥상을 차려낼 수 있었고, 이웃과 친구들을 자주 초대했다. 냉장고에는 엄마 반찬이 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친구들은 엄마에게 얻어먹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 줄 아냐며 부러워했다. 하지만 이제 그 부러운 엄마는 없다.


어깨너머로 배우는 게 무섭다고, 나도 엄마를 따라한다. 딸과 동생이 올 때마다 반찬을 해서 들려 보내고 싶은 마음이 발동한다. 엄마와 다른 점이라면 너무 손이 많이 가는 반찬은 못한다는 점이다. 엄마처럼 이웃들과 나눠 먹을 만큼 손 크게 많이 하는 것도 어렵다. 지난날 엄마는 그 많은 걸 어떻게 해냈는지 모르겠다.


엄마 손이 이렇게 고왔던 적이 있었나?


평생 손에 물 마를 날 없었던 엄마 손, 나를 부자로 만들어준 엄마 손을 만지작거린다. 어려서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처녀 가장이 된 엄마는 농사일에 집안일을 도맡아 했고, 시집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엄마 손은 늘 거칠었다. 손끝은 까맣고 손톱은 갈라지고 상처 투성이었다. 엄마 손은 원래 그런 손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다. 엄마 손에 특별한 죄책감을 갖거나 엄마 손을 해방시키려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고생했던 엄마 손이 아프고 나서야 비로소 해방되었고, 고와졌다. 엄마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엄마 손을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 보고 손톱을 깎아주고 정성스럽게 핸드크림을 발라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프지 않았더라면 평생 고운 손 한 번 못해보고 거친 손으로 떠났을 것이다. 한동안 나는 누워있는 엄마에게 빨리 털고 일어나서 나 밥 해줘야지, 이렇게 얻어먹기만 할 거냐고 졸라댔었다. 그러면 그래야지, 하고 벌떡 일어날 줄 알았다. 그런 일은 없었고, 다시 생각하니 잘못한 거 같다. 이제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이렇게라도 엄마 역할에서 해방된 엄마 손을 지켜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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