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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유 Aug 20. 2024

어떻게 죽을 것인가

또는 어떻게 보낼 것인가

전 직장에서 인연을 맺고 가까이 이웃하여 살아온 선배가 엄마 소식을 듣고 책을 보내 주셨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혹시 아빠가 보고 오해할까  외출할 때는 다른 책들 사이에 묻어두고 나갔다. 딸이 집에  있을 때는 책을 아예 장롱에 숨겨두고  읽기를 중단했다. 죽음은 가족들과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아직 용기가 나질 않는다.


그렇게 숨겨가며 읽은  책은 환자가 어떻게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있는지에 한 탐색서이다. 의사로서 저자는 이 주제에 대해 무지했던 현대의학의 한계와 실패를 고백하고, 동시에 인간다운 죽음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가능한지 탐색한다.


 역시 생명을 연장하는 현대 의학의 신화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해봐야 한다는 논리에 쉽게 굴복하여 엄마를  병원  병원 끌고 다니면서 어떻게든 살려내고 싶었다. 하지만 의사도 권하지 않고, 내가 여기저기 뒤지고 다니면서 조사하고 공부한 바에 따라도 엄마에게 수술은 좋은 해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제는 엄마의 생명 연장을 위해 애쓰기보다는 죽음으로 향하는 엄마를 어떻게 돌볼 것인가에 신경을 쓰고 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경이 영 안 쓰이는 것도 아니어서 가끔 내적 갈등을 겪기도 한다. 과연 나는 엄마 살리기에 최선을 다했나, 너무 쉽게 포기한 것은 아닌가, 나중에 후회하지는 않을까, 의학적 확률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기적이라는 것도 있으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그때 엄마에게 뭐가 은지, 엄마는 어떻게 죽기를 바라는지에 대한 생각은 쉽게 누락되곤 했다.


지금  마음은 평생 가족들을 위해 헌신한 엄마가 가족들의 따뜻한 돌봄을 받으며 편안하게 떠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장 크다. 하지만 욕심을 내려놓고 많이 양보하고 타협했다고 생각한  작은 소망조차도  도전받는다. 열심히 하다 보면 어쩌면 상황이 좋아질지도 모른다는 실낱 같은 희망 배반당하고, 엄마의 상태는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내가 감당할  있는 수위를 쉽게 넘나 든다. 자주 짜증이 나고 가끔은 미칠 것 같다. 언제까지, 어디까지 내가 감당할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  미래까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냥 하루하루에 충실하기에도 벅차다.


어떻게 죽어야 할까. 가족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내야 할까. 젊고 건강할 쉽게 무시하고 애써 피하지만 분명 혼자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모든 것은 결국 허물어지게 마련이고 삶에 대한 주도권을 잃어버리는 순간이 온다. 그때 치료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인간다운 마무리를 위한 준비할  있다면, 두렵지만  나눠야 하는 이야기들을 미리 나눠보면 좋을  같다.


나는 엄마가 건강할  엄마의 죽음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 연명치료는 하지 않을 것이며, 묘도 쓰지 않고 우리  마당 감나무 아래에 묻고 매일 오가며 생각할 것이며, 제사도  지낼 것이기에 살아있을  나한테  많이 얻어먹으라는 말을 자주 했다. 거의 통보에 가까웠기에 엄마도 어쩔 수 없었는지는 몰라도 엄마좋다고 동의했었다. 그래서인지 모든 것이 무너지고, 눈도 못 뜨고 말조차 잃어버린 엄마지만 신기하게도 밥은  먹는다. 지금 내가 엄마에게 해줄  있는 것은 삼시세끼 맛있게 해서 먹이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찜통더위에 엄마가 좋아하는 오리백숙을 끓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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