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사라져도 교가는 남는다
딱히 과거를 그리워하거나 졸업한 학교에 애정이 있는 편이 아니라서 이따금씩 고향에 와도 학교에 가볼 생각은 안 해봤다.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딸에게 여기가 엄마가 나온 학교야, 정도는 말했었다. 그러다 고향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졸업 후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초등학교(당시엔 국민학교)를 거의 40년 만에 가보았다.
뭔가 소인국에 간 느낌이었다. 예전에 크고 길고 거대하게 느껴졌던 것들이 모두 작아져 있었다. 어릴 땐 학교 가는 길이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는데 오늘 가보니 말 그대로 넘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었다. 따로 시간을 재보지는 않았지만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넉넉잡고 1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였다. 어릴 땐 이 거리도 멀게 느껴졌고, 가까이 살면서도 꾸물거리다가 지각을 많이 해서 아빠에게 많이 혼났던 기억이 난다. 어릴 땐 이렇게 늑장을 부리고 지각하고 그랬는데 지금 나는 시간 약속에 정확하다 못해 약속 시간 1시간 전에 도착해 있는 사람으로 만든 세월의 힘도 신기할 따름이다.
학교 앞에는 양쪽에 문구점이 2개 있었는데, 당시에는 단순히 문구를 사는 곳이 아니라 만남의 광장이자 놀이터이자 상담 공간이었다. 늘 바빴던 엄마 대신 주인 아주머니에게 미주알 고주알 늘어놓았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누구네 집 자식인지 다 알다 보니 외상도 가능했는데 외상하고 왔다가 아빠에게 된통 혼났던 기억도 난다. 지금은 모두 문을 닫았고 폐가가 되어 있었다.
학교 입구에서 정문까지 한 50미터나 될까. 그 길이 굉장히 길고 가파르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길지도 가파르지도 않았다. 정문을 지나 운동장에 서니 학교가 어쩜 그대로인지, 운동장도, 나무도, 건물도, 동상도 그대로 박제한 것 같았다. 아, 공산당이 싫어요, 이승복 동상은 사라졌다.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동상도 세월이 흐른 만큼 노쇄해 보였다. 예전엔 그 위용이 대단했다. 동상과 관련된 학교 괴담도 한 몫했을 것이다. 밤 9시가 되면 이순신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이 깨어나 싸우는데그 싸움을 보게 되면 운동장이 반으로 갈라져 그 아래로 떨어진다고 했었나 그랬다. 지금 생각하니 귀엽기 짝이 없는데 어릴 땐 그런 허술한 괴담에도 덜덜 떨었다. 아마 어른들이 운동장에서 늦게까지 놀지 못하도록 만들어낸 괴담이 아닐까 싶다.
모든 것이 작아졌는데 단 하나 플라타너스 나무만이 커져 있다. 플라타너스 나무에는 송충이가 정말 많았다. 나무 아래에 가면 떨어진 송충이가 득실득실했고, 실시간으로 떨어지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남자애들이 송충이를 여자 애들에게 던지며 놀렸던 생각이 났다. 그땐 좋아하는 친구가 있으면 괴롭히던 시절이었는데 지금 그렇게 하면 학교 폭력일 것이다.
학교 건물은 그대로인데 반이 대폭 줄었다. 내가 6학년 7반이었고, 그 뒤에도 좀 있었는데 지금은 한 학년에 한 반이 남아있다. 주위에는 아파트가 없고, 노인들만 남아 사라지는 건 시간 문제다. 저출생 여파로 학령인구가 줄면서 수도권에 있는 학교도 폐교하는 마당에 지방소도시의 학교가 무슨 수로 살아남을까. 올해만 전국 초중고 33곳이 문을 닫는다는 기사도 보았다. 40년 만에 학교에 와도 공간이 있으나 그때 기억이 줄줄이 소환되는데, 학교가 없으지면 내 기억은 머물 공간은 어디일까? 시간을 담아둘 장소가 사라지면 기억이라는 것도 정처없이 떠돌다 사라지게 되지 않을까. 단 학교가 사라져도 교가는 남을 것 같다. 한참 뇌가 말랑말랑할 때 얼마나 불러댔으면 아직까지 생생할까.
용두산 힘찬 기운 서려 있는 터전에
우뚝이 솟아있는 아아 우리 남당교
높은 뜻 이곳에서 나날이 닦는
우리는 자라나는 대한의 새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