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화된 기억의 향방은
"석주네가 가게를 접는다네."
시장에 다녀온 아빠가 말했다. 시장은 그냥 장 보러 가는 보통 명사 시장이 아니라 우리가 살았던 동네로서 시장을 말한다. 지금 살고 있는 곳과도 가까워서 아빠는 마실 삼아 거의 매일 나갔다 온다.
석주? 이름은 들어봤지만 그와 관련된 그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같은 동네에 살았을 뿐 나와 동년배는 아닐 것이다. 같이 학교를 다녔다면 이렇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 리 없다. 석주 대신 모자, 가방, 속옷, 양말, 수건, 우산 같은 것들이 차례로 떠오르고 석주 부모님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석주네 가게로 불리지만 번듯한 간판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태광모사', 이런저런 잡화를 판다.
나는 시장통에서 두부집 딸로 불리며 자랐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부모님은 두부가게를 닫았고, 기술이 있었던 아빠는 각종 설비 일을 하시며 생계를 이어오셨다. 지금 부모님이 사는 곳, 내가 엄마 간병을 위해 와 있는 곳도 그 시장 바로 옆에 바로 붙은 오래된 상가아파트다. 아빠는 매일 장을 보러 또는 살 것 없이도 마실 삼아 시장에 다녀오곤 한다. 오늘도 마실 삼아 나갔다가 석주네 가게 소식을 듣고 온 것이다. 나온 김에 시장에 가보니 폭탄세일이라는 전단지가 붙었다.
"가게 문 닫으니 뭐라도 사줘야 할 거 같은데..."
나도 슬쩍 가 봤다. 솔직히 살 게 없다. 필요한 것도 없고, 취향도 맞지 않는다. 뒤늦게 떠올랐다. 그 집 작은 딸 수정이 언니와 가게에 딸린 작은 방에서 인형놀이 하던 기억이. 수정이 언니는 눈이 크고 예뻤는데 나이에 비해 발달이 느려서 나처럼 동생들과 놀았다. 역시 기억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에 저장된다는 말이 맞다. 우리가 뛰어놀았던 공간을 보니 기억이 살아난다.
아빠는 석주네 가게에서 뭘 사게 될까? 소멸의 도시에서 나날이 쪼그라들며 근근이 버텨온 시장통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의 물건을 사주며 지금까지 버텨왔다. 그런 아빠는 조금 비싸더라도 편의점이나 대형마트에 가지 않고, 시장에 있는 가게에서 물건을 산다. 예를 들어 아빠는 매일 우유 1리터짜리를 사는데, 우유 1리터는 편의점보다 시장에 있는 슈퍼가 비싸다. 시장에 있는 슈퍼가 일부러 비싸게 판다기보다 아마 유통구조의 문제일 것이다. 그래도 아빠는 편의점에 가지 않고 시장에 있는 슈퍼에서 우유를 산다. 그 가게가 망하지 않도록 팔아줘야 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시장통에 살았고 아빠에게 세뇌를 당한 나도 그렇게 비합리적인 소비를 한 적이 있지만, 그래도 나는 편의와 실리를 추구할 때가 많다. 시장에 남아있는 가게들은 서로 상부상조하며 겨우 겨우 버텨왔지만, 이제는 그 끝이 보인다. 석주네처럼 문을 닫는 가게들이 늘어나고 있다. 아빠도 엄마가 아프면서 가게 문을 닫았다. 지방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저출생 고령화되면서 지방도시는 더욱 빠른 속도로 소멸되고 있다. 나름 역세권인 우리 동네에는 상가를 무료로 임대해 주겠다는 광고 전단지가 붙어 있을 정도다.
지금도 노인들만 보이는 우리 동네 시장은 우리 부모님 세대가 떠나시면 완전히 텅텅 비게 될 것이다. 시장이라는 공간에 저장되어 있던 나의 유년 시절의 기억도 갈 곳을 잃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