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소도시의 불편한 정서
얼떨결에, 바람도 쐴 겸 농업기술센터에서 하는 팜파티 플래너 수업을 듣게 되었다. 팜파티는 내가 좋아하는 두 가지 팜+파티가 붙어 있다. 언젠가 어느 기사에서 팜파티 플래너라는 것이 있다는 걸 보고 내가 하면 딱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기회가 맞아떨어졌다.
진짜 큰 농사를 짓는 사람에서부터 한우, 젖소 농가, 텃밭 농사를 짓는 사람, 소소하게 정원을 가꾸는 사람까지 스무 명 남짓 모였다. 조를 짜서 팜파티에 필요한 용품을 만드는 수업을 하게 되었다. 조끼리 앉으라고 해서 옆에 앉은 분이 물었다.
어디 사세요?
천남동이요.
어떤 일을 하시나요?
지금은 일 안 하고 있어요.
소위 말하는 호구 조사가 시작되었다. 원래도 호구 조사 당하는 걸 좋아하지 않고, 게다가 지금 나의 여러 가지 상황이 불분명해서 대답하기가 애매했다.더 묻지 말아 달라는 의미로 어쩌면 TMI가 될 수 있는 팩트를 투척했다.
사실은 원래 사는 곳인 여기가 아닌데, 엄마가 많이 편찮으셔서 간병하러 잠시 엄마 집에 와서 지내고 있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이 수업을 듣게 된 거고요.
그럼 여기 사람이 아니에요?
고등학교까지는 여기서 졸업했어요.
여기서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더욱 적극적인 호구 조사가 진행되었고, 나도 이 지역 특성과 정서를 고려하여 쉽게 거절하거나 중단하지를 못했다. 지방 소도시 특성상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고, 말 한마디로 나 개인이 아닌 누구네 집 딸 버릇없네, 뭐 하네 평판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기 쉬워서 처신에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다. 철없을 때야 그러던 말던 신경 안 쓰고 날라리 짓을 하고 다녔는데 나이가 들다 보니 부모님 욕 먹이기 싫은 마음도 작용했다.
아, 그래요? 그럼 혹시 여고 졸업했어요?
아, 네….
몇 회 졸업생이세요? 제가 선배일 거 같은데… 저는 ㅇㅇ회거 든요.
아, 네… 저는 몇 회 졸업생인지, 그거까지는 잘 모르겠네요.
제천에서 유명하다는 말이 생각났다. 제천에서는 배추 장사를 해도 제고(제천고등학교), 여고(제천여자고등학교) 나와야 한다고. 그만큼 이 지역에는 뿌리 깊은 학벌주의가 자리 잡고 있고, 그 결과 제천은 충북에서 유일하게 비평준화 지역으로 남아있다. 작년에 여론조사까지 실시했지만 평준화 반대 여론이 우세해 여전히 비평준화라고 한다. 예전에 소위 명문대인 sky 많이 보낼 때야 명문고 대접을 받았다 쳐도 지금은 듣자하니 한두 명 갈까말까 예전만 못하고 제천의 다른 고등학교들과 진학성적 면에서 비슷한데도 제고, 여고 따지고 있는 것을 보면 웃프다고 해야 하나. 지역에서 산다면 불편한 점 중에 하나가 이런 시대착오적인 학벌주의+누구네 집 딸로 호명되는 비익명성이 아닐까 싶다. 여고 졸업생이라는 것에 대한 소속감이나 자부심이 1도 없고, 같은 학교 나왔다고 자동적으로 친밀감을 느끼지 못하는 점은 지역 생활의 장애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