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소멸도시의 시장
시장통에서 자랐다. 그래서 시장을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한다. 좋아하는 이유는 내 유년의 아련한 추억이 머무는 장소이기 때문이고, 싫어하는 이유는 못 살던 시절 창피하고 부끄러운 기억의 저장소이기 때문에 그렇다. 아무튼 시장은 숨길 수 없는 나의 출신 성분 같은 거고, 시장에 대한 양가감정 모두 있지만, 꽤 우호적인 편이다. 국내든 해외든 여행을 가면 그 지역의 시장을 꼭 찾아간다.
내 고향에서는 시장을 일부러 찾아갈 필요가 없다. 지금 살고 있는 엄마 집 가까이에 시장이 있고, 또 가까이에 3, 8로 끝나는 날 5일장이 선다. 현금을 들고나가 봤다. 오늘이 장날이라고 소리치는 듯한 템포 빠른 트로트 노래가 거리를 채우고 있다. 솔직히 흥겹다기보다 내게는 시끄러웠다. 책의 목차를 먼저 훑듯 뭐가 있는지 빠르게 한 바퀴 돌아보았는데, 눈길을 끌거나 사고 싶은 것이 딱히 없었다.
보통 사람들은 전통시장하면 투박하지만 물건이 싸고, 정이 넘치는 곳을 떠올린다. 지역에서 생산된 물건이라면, 물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고, 에누리와 덤 같은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관광객들은 그 지역에서만 살 수 있는 특산품이나 먹거리를 찾아 시장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엄마 집 가까이 시장은 모든 면에서 매력적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뭘 물어보면 친절하게 대답을 해주지도 않았다.
오늘 시장에서 들은 이야기 중에 인상 깊은 것은 '고사리'에 대한 것이었다. 지나가던 손님이 고사리를 파는 상인에게 물었다. "고사리 국산인가요?" 상인이 수입산이라고 하니 손님이 돌아섰고, 손님의 뒤통수에 대고 상인이 말했다.
"이 시장에 모든 고사리가 수입산이에요. 다들 국산이라고 속여서 팔아요. 오히려 나는 수입산이라고 말하고 정직하게 팔아요."
바로 이거였다. 내가 시장에서 힘든 이유. 시장에서 에누리와 덤이 가능하지만 원산지를 속이고 바가지도 가능하다. 나 같은 사람은 속을까 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고, 사면서도 뭔가 찜찜하고 불안한 엑스트라 감정노동을 하게 된다. 특별히 살 게 없고, 특별히 싼 것 같지도 않다. 특별히 정직하거나 친절하지도 않다 보니 뭐라도 사겠다고 작정하고 나온 나부터 다음에 오고 싶지 않은데, 관광객들은 오죽할까. 당연히 시장을 찾는 손님은 점점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이런 데도 시장을 꾸준하게 찾는 사람들이 있다. 정치인들이다. 시장은 선거 운동할 때 유용하다. 선거법을 고려하면 선거 운동하러 갈 만한 곳이 많지 않고, 전통시장만큼 서민 연출을 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선거철에만 시장을 찾는다고 욕하지만, 정치인들이 선거법 때문에 딱히 갈 데가 없어서 찾는다. 그렇게 정치인들에게 유용한 시장은 전통시장 살리기 명목으로 투입되는 정책 자금을 어느 정도 수혈받지만 전통시장에 투입되는 예산은 연명치료와도 같아서 사실 곧 끊어질 목숨이다.
시장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볼거리를 제공한다고 공연도 하고 이런 저런 이벤트도 하지만 그건 본질이 아니다. 그걸 보러 올리도 없고, 그것 때문에 물건을 사지도 않는다.
특별히 그곳에서만 사고 먹을 수 있는 것이 있거나 특별히 싸거나 특별히 정직하고 투명하거나 이도저도 아니면 특별히 친절하고 인심이 좋다면 희망이 있다. 특별히 모든 것이 있다면 당연히 살아날 것이고, 뭐 하나만 있어도 그래도 생존은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