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 좀 잡고 싶어서
엄마, 나 ‘자유론’을 읽기로 했어.
시험이 끝난 딸은 이제 무슨 책을 읽을까 하는 고민을 이삼 일씩이나 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의외의 책을 낙점했다.
딸에게는 아직 마지막을 끝내지 못한 ‘채식주의자’가 있고, 오래전부터 긴 호흡으로 읽고 있는 ‘삼국지’도 있었다. 하지만 시험 끝나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읽기에는 ‘채식주의자’는 내용적으로 무겁고, ‘삼국지’는 뭔가 하나를 끝내는 기분을 느낄 수 없다며 당장은 읽고 싶지 않다고 했다. 뭔가 특별하면서도 가볍게 후루룩 읽을 수 있는 책이면 좋겠다고 했다. 첫눈이 세게 온 것을 핑계로 ‘설국’을 읽고 싶다고도 했는데 우리 집에는 없고 학교 도서관에도 없어서 동네 도서관에 가서 찾아본다고 하더니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 의지가 시들해졌는지 더 이상 이야기가 없었다. 설국이라… 나도 영화는 봤지만 읽어보지 않은 책이고 영화 내용만 봐도 딸이 지금 읽고 싶은 방향과 달리 무거운 편에 속하는 것 같아 나도 강하게 읽어보라 권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자유론’이라니.
그런데 어떻게 ‘자유론’을 읽을 생각을 했어?
아마 자기에게 좀 어려워보이는 책 중에 그래도 만만해보이는 두께여서 선택했을 것이다.
뭐, 그냥, 폼 좀 잡아보고 싶어서.
딸은 가끔 이런 식의 독서를 한다. 한때는 같은 이유로 한시를 외우면서 폼을 잡기도 했다. 물론 가족 한정이다. 요즘 유행한다는 텍스트 힙도 그런 것일 텐데 동기가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랴 읽어주면 땡큐고, 학원에서 읽으라고 해서, 입시에 도움 될 것 같아서, 그런 이유보다는 훨씬 낭만적이고 귀엽다.
그런데 학교에서 애들이 이런 책 왜 읽냐고 물어보면 엄마가 읽으라고 해서 억지로 읽는 거라고 말해. 괜히 이런 책 읽는다고 하면 애들이 재수 없어하거나 엄청 똑똑하다고 오해할까 봐. 나 사실 가끔 학교에서 이렇게 연기해.
폼은 잡고 싶으면서 또 친구들의 시선은 부담스러운지 나름의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사회생활을 하는 딸의 이야기가 귀엽다. 교실에 cctv 심어놓고 싶을 만큼.
와, 엄마는 무슨 죄야. 저 살겠다고 엄마를 팔아먹냐?
에이, 어때. 애들은 친구 엄마한테 1도 관심 없어.
이제껏 소설 류를 주로 읽어왔던 터라 정치사상 분야의 책은 어떻게 읽을지, 끝까지 읽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리고 서론을 다 읽었다며 하는 소리가 존 스튜어트 밀의 아내와의 사랑에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밀의 아내가 다른 남자의 아내일 때부터 지적 교감을 하다가 아내의 남편이 죽은 후 결혼했다는 사실 정도는 기억나는데 하도 오래전에 읽어서 그런 이야기가 책에도 나오나 의아했지만 딸이 그렇다니까 맞겠지 뭐. 자유론을 읽으면서도 낭만을 길어 올리는 낭만주의자 딸이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