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암기과목?
나는 역사 과목을 참 못하고 싫어했다. 한국사, 세계사 모두 별로였다. 역사는 유독 외울 것이 많게 느껴졌고, 특히 연도 외우는 것을 너무 싫어했다. 얼마 전에 딸이 임진왜란이 몇 년에 일어났는지 알지? 묻길래 당당하게 1789년이라고 했다가 망신당했다. 어 이상하다. 1789년에도 뭐가 일어났는데? 그랬더니 1789년은 프랑스혁명이고 임진왜란은 1592년에 일어났다면서 나를 놀려댔다. 숫자 난독증인 건지 연도는 지금도 잘 못 외운다. 대학 가서 역사는 암기가 아니라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뒤늦게 역사에 재미를 붙여 지금도 역사 관련 책이나 유튜브 콘텐츠를 많이 보는 편이다.
딸이 나처럼 되지 않기를 바랐다. 성적은 둘째치고 역사가 재미있는 거라고 생각하길 바랐다. 학교 가서 ‘역사=암기과목’으로 인식되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를 치기로 마음먹었다. 방법은 책이다. 책만큼 가장 손쉽고 값싸고 좋은 방법이 없다. 딸이 읽을 역사책을 고르는데 신경 쓴 건 다음 세 가지다.
첫 번째 ‘역사=이야기’로 인식하기
두 번째 역사의 개별 사건보다 흐름을 먼저 읽기
마지막으로 한국사 이전에 세계사를 먼저 배우고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한국사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엄선한 책이 ‘곰브리치 세계사(비룡소)’였다. 이 책은 예술사 전공인 곰브리치가 어린 딸을 무릎에 앉히고 이야기하듯 쉬운 말로 쓰여있다. 다른 역사책에 비해 그림이나 사진이 거의 없고 글이 많은 책이어서 독서력이 부족한 아이들은 좀 힘들어할 수 있다. 나 역시 내가 먼저 읽어주고 나중에 재미가 붙어 스스로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혼자 읽게 했다. 그다음에 ‘나의 첫 세계사 여행 시리즈(휴먼어린이)’를 한 권씩 사주었는데 이 시리즈의 장점은 세계사에서 소홀하게 다뤄질 수 있는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역사도 균형 있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순서는 가장 가까운 ‘중국일본 편’에서부터 ‘인도동남아시아’,’ 서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유럽, 미국’까지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세계를 확장하는 식으로 읽게 했다. 한국사는 ‘이이화 선생님이 들려주는 만화 한국사(삼성)’를 선택했는데 ‘이이화’라는 역사가 타이틀 때문이었다. 만화책이라 그런가 아이가 좋아해서 몇 번씩 반복해서 읽는 모습을 보고 나중에 ‘이이화’ 선생님 만나게 해 줄게,라고 무턱대고 약속을 했는데 그사이 돌아가셔서 딸이 매우 슬퍼했다. 딸이 그러는데 중학교 한국사 시험은 이 책만 봐도 충분히 만점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내용이 충실하다고 한다.
어쩌다 보니 역사만큼은 선행학습을 하고 중학교에 가게 되어 처음으로 역사 시험을 봤는데 100점을 받았다. 신기한 건 공부 잘하는 친구들도 겨우 80점대를 받았다고 했다. 소위 모범생들이 다른 과목에 비해 역사를 어려워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역사는 학원이 없어서 그럴까? 역사 중 방대하고 낯선 세계사를 먼저 배워서 그럴까? 궁금했다. 모든 과목을 다 잘하진 않아도 한 과목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인정받는 기쁨은 딸에게 특별한 경험과 자부심으로 남아있다. 친구들이 딸에게 역사를 가르쳐달라고 하기도 하고 역사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기도 했다. 딸의 대답은 역사책 중에 재미있는 책을 골라서 읽으면 도움이 된다고 했다는데 그게 당장 시험을 앞둔 친구에게 도움이 되는 조언이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책으로 미리 읽어두는 것은 학교 역사 공부에 큰 도움이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왜 그럴까? 책을 읽는다는 것은 특정 주제로 엮어진 하나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 흐름과 맥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역사의 흐름을 이해한 다음 사건, 연도, 세부적인 내용을 공부하면 훨씬 쉽게 암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로마 공화정을 이해하려면 앞서 왕정이 왜 폐지되었는지, 그렇게 탄생한 공화정은 어떻게 시작하여 발전하고 또 쇠하게 되는지를 이해하면 세부사항(예를 들어 원로원, 집정관, 호민관, 평민회 등)응 암기하기가 수월해진다.
책을 많이 읽으면 학업에 전반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 그 효능감이나 직접적인 관계성을 느끼기는 어려울 수 있는데 역사 과목은 가능하다. 딸이 역사를 중학교 내내 만점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은 미리 읽은 책 때문이었다. 물론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 책을 읽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재미있어서 책을 읽었는데 시험까지 잘 보면 좋지 아니한가. 시험 성적 외에도 역사를 잘하면 좋은 점은 여러 가지가 있다.
- 삼국사 같은 책도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다.
- 역사적 배경이 있는 영화를 볼 때, 다른 책을 읽을 때 이해하기가 쉽다.
- 국내외 어디든 여행할 때 역사적 배경 지식이 있으면 훨씬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다.
-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작금의 계엄 사태처럼 시사문제에 매우 예민해진다.
- 실생활에서 잘난 척하기가 좋다. 다른 과목에 비해 역사는 생활 속에서, 하다못해 tv를 보다가도 아는 척할 일이 많다. 딸이 나가서는 그러지 않는데 역사 좀 잘 안다고 집에서는 얼마나 잘난 척을 하고 우쭐대는지 우리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