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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 Dec 05. 2024

부모와 다시 산다는 것

아빠를 혼내게 될 때

밥도 아직  됐는데 아빠는 엄마를 식탁에 데려왔다. 시장한  같아 미리 만들어둔 도토리묵을 썰고 양념간장을 올린 접시를 아빠에게 넘겨주었다.  사이 나는 서둘러 식탁을 린 다음 식탁에 앉아 엄마의 휠체어를 내 쪽으로 끌어당기려는데


악, 이거 뭐야?


큰소리로 짜증을 내면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 치마에 간장양념이 뚝뚝 떨어져 있었다.


 치마에  흘리면 어떡해? 고춧가루 양념, 김치국물은  지지도 않는단 말이야.


행주를 물에 적셔서 신경질적으로 닦아보았지만 얼룩이 지지 았다. 주방 세제를 묻혀 얼룩 묻은 부분을 두 손으로 비벼댔다.


흘렸으면 바로 닦아줘야 한다고. 벌써 굳어서  지워지잖아.  옷이 이게 뭐야.


엄마가 입은 치마는 그냥 치마가 아니라 환자들이 입는 방수보온치마로 얼마  새로  치마였다. 이렇게 음식을 흘릴 것에 대비하여 진한 색을 사고 싶었으나 연한 그레이와 핑크 밖에 없었고 그중에 무난한 그레이로 샀다.  치마에 양념이 뚝뚝 떨어져 있는 것을 보니 화가  것이다. 이번뿐이 아니고 이런 식으로 엄마 옷을 새로  입혀도 금방 더러워졌다. 내가  마디를 하는 동안 아빠는  마디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아빠는 내가 지랄을  때마다 침묵으로 일관한다.  모습이 짠하면서도 같이 살려니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제발 숟가락으로 먹여.


도토리묵젓가락으로 먹이는 것도 거슬렸고  번이나 경고를 했지만 오랜 습관이라 쉽게 바뀌지 않았다.


아빠랑 같이 살다 보니 아빠와  맞는 것이 점점 늘어난다. 즉 부모와 다시 산다는 것은 서로 다름을 다시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특히 아빠의 청결도는 나의 기준에 크게  미친다. 엄마랑 둘이 살림을 했을 때는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엄마는 시각장애인이라 청결 부분에서 오히려 아빠가 포기하고 체념한 부분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 깔끔을 떠는 내가 그들의 삶에 끼어들게 되었으니 아빠의 고충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안방 화장실 변기 커버 안쪽, 세면대 배수구, 욕실 거울에 얼룩진 치약 얼룩, 주방 가스레인지  타일에 음식 얼룩, 아빠가 자기 먹으려고 만드는 수제요거트 만드는  틈새에 요거트 찌꺼기가 거슬린다. 그리고 내가 아픈 동안 엄마를 챙기지 못한 탓에 엄마의 헝클어진 머리, 음식 얼룩이  엄마 ,  손톱, 코딱지가  콧구멍까지 모두  기준에 미달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일일이  내가 청소하고 관리할 수도 없다. 결혼 초기 서로 기준이 달라 싸우고 포기하고 단념하던 시간이 생각났다. 어쩔  없다. 함께 산다는 것은 그게 남편이던 자식이던 부모던 누구든 간에 서로 맞추고 어느 정도는 포기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부모와 산다는 것 역시 서로 다름이 드러나고 없었던 갈등하고 때로는 다투고 마침내 조정할 필요을 내포하고 있다. 지금은 몸이  좋으니 일단  포기하긴 하는데 어디까지 감내하거나 포기하고 어디까지 가르치고 서로 조정할 것인지는 두고두고 생각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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