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살만 해지면서 드는 생각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반쯤 받아서 몸을 푹 담갔다.
아픈 몸
지친 몸
어쩌면 화난 몸
그 몸을 물에 완전히 담그고 싶었지만 반만이라도 어디냐며 오래간만에 평온함과 위로를 느꼈다. 확실히 따뜻한 물은 사람을 달랠 줄 안다.
며칠 전에 비하면 확실히 좋아졌다. 아직 불편하긴 하지만 일단 다리를 들어 올려 욕조에 들어가기가 수월해졌고 욕조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아도 괜찮았다. 머리를 숙여 감을 때는 조금 조심스러웠지만 잘 끝냈다. 주말에 동생이 왔을 때 같이 한방병원에 가서 침을 맞아 그런가. 며칠 동안 가만 누워 지내서 그런가. 아니면 그냥 나을 때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병원에서는 디스크가 의심된다고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겁먹을 필요는 없고 침 치료를 하고 쉬면서 경과를 지켜보자고 했다. 디스크라고 할 줄 알았고 그래서 병원에 오기 전 이미 머리가 복잡해져 있었다. 내가 디스크라면, 그래서 상당시간 치료나 수술을 받게 된다면 아빠가 엄마를 혼자 돌봐야 하는데 그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엄마를 돌봄에 있어 가장 위험한 것이 혼자 돌보는 것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럴 경우 냉정하게 가족 돌봄은 끝내야 할 것이다. 엄마를 방문 요양보호사에게 부분적으로 맡기던 시설에 맡기던 해야 한다. 슬프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는 상상을 해봤다. 지금 물 속에 잠겨 위로받고 있는 내 허리가 엄마 돌봄의 방향키를 쥐게 되었다. 몸이 말해줄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엄마를 돌볼 수 있는지 없는 지를.
몸이 아플 땐 아무것도 먹고 싶지도 않았다. 실제로 하루 반 정도는 꼼짝없이 누워서 물만 마셨다. 간혹 달콤한 비스킷 같은 게 먹고 싶었지만 늙은 아빠에게 좀 사오라고 할 만큼의 욕구는 아니어서 무시했다. 간헐적 단식이라고 생각하고 억지로 욱여넣지는 않았다. 누워서 내 몸을 움직여보면 안다. 몸이 좀 살만해지니 식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입에서의 소란을 느끼고 싶었다. 오랜만에 냉장고를 열어 찬기를 느끼며 살핀 결과 마침 잘 익은 알타리를 발견해서 갓 지은 밥 한 공기를 퍼서 오랜만에 식탁에 앉았다. 누구한테 밥 먹는 거 자랑이라도 하듯 알타리김치 광고라도 찍듯 아삭아삭 소리를 내며 알타리 무를 씹어댔고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총각무에 달린 잎과 국물까지도 알뜰하게 맛있기는 처음이다. 입가심으로 사과도 하나 까먹었고, 엄마 주려고 익혀 두었던 마지막 대봉시도 홀랑 내 입에 털어 넣었다. 달았다. 배가 채워지고 당이 충전되니 마음이 갑자기 넉넉해져서 주위를 살필 수 있게 되었다.
그제야 자고 있는 엄마 얼굴을 들여다 보고 엄마 머리를 손으로 빗겨서 큐픽이 몇개 떨어졌지만 여전히 반짝이는 머리핀을 다시 꽂아주었다. 괜히 창밖도 내다 보고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아빠가 구독하는 종이 신문도 넘겨 보았다. 언제 마지막 읽고 덮어두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책을 뒤적거리기도 했다. 읽어도 아직 머리 속에 남지 않았다.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몸이 이렇게 삶의 질을 좌우하는구나. 내 몸이 이럴진대 아파 누워 온전히 우리에게 의존하고 있는 엄마의 삶은 오죽할까.엄마를 돌보는 나의 몸이 무너진 이후 엄마의 삶은 더욱 내려갈 곳 없는 바닥을 긁으며 처참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엄마를 돌보는 내 몸이 회복되어야 엄마 몸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다. 좀 살만 해도 참아야 한다. 아직은 내 몸에 집중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