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학 Tea Party

갈색 눈 여자(티팟이 보는 나)

by 도삽J

나는 가끔 그릇이 된다.




노라(Nora) 여사가 90세에 생을 마감한 후, 나는 유일한 상속녀인 조카의 소유가 되었다.

조카의 집 찬장에 갇혀 몇 달째 답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드디어 조카가 그릇장으로 다가온다. 오늘은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문을 열고 내 몸 손잡이를 잡는다. 다른 손으로 내 뚜껑을 열고 내 안을 살펴본다. 나를 돌려가며 바닥과 주둥이, 뚜껑 안팎을 한참 동안 둘러본다. 입가에 미소를 띠며 나를 내려놓는다. 식탁에 앉아 노트북 자판을 여러 번 두드리더니 다시 와서 나를 들어 올린다. 이번에는 나를 꺼내어 포장지로 싼다. 몇 겹인지 모를 정도로 여러 번 돌려서 싸기 시작한다. 2020년 1월 1일.



깜깜한 상자 속에서 로열 메일, 히스로공항, 인천 이런 단어들이 반복해서 들렸다. 어디로 가는 걸까? 갑갑하다. 상자 밖으로 나가고 싶다. 따뜻한 차로 채워지고 싶다. 스르르 눈이 감긴다.

<파란 눈의 노라 여사는 원피스에 카디건을 걸치고 가슴골까지 내려오는 진주목걸이를 하고 앉아 있다. 정원 탁자 위의 나는, 따뜻하고 향기로운 다즐링차를 가득 품고 기대에 부풀어 있다. 노라 여사가 진주목걸이를 하는 날, 그녀의 친구들과 일주일에 한 번 애프터눈 티를 마시는 날이다. 여사가 여행한 나라들과 친구들이 다녀온 도시들의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지는 오후라는 뜻이다. 그녀의 친구들은 매번 나에게 멋진 트랍넬 티팟이라고 말해주는 걸 잊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이 내가 우린 차를 마시면서 나누는 얘기를 들을 때 가장 행복하다. 나에게 ‘티 타임’은 ‘스토리 타임’과 같다. 행복한 시간은 여사가 나에게 첫 샤워를 해준 날로 이어진다. 우리는 물로 씻김을 받는 날 깨어나게 되고 눈을 뜬다. 내가 처음 눈을 떴을 때 마주한 것은 노라 여사의 환한 미소다. “러블리“라고 외친 후 나를 만지며 “you are so beautifull~ to me” 노래를 부르던 여사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주변이 흐릿해진다.>

꿈인가? 상자가 열리고 빛이 들어오더니 내 몸을 싸고 있던 종이가 한 겹씩 벗겨진다. 며칠이 지났을까?

“ 연휴가 껴서 더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왔네! ”


까만 머리와 낮은 코를 가진 여자가 나를 뚫어지게 본다. 갈색 눈을 반짝거리며 입을 벌리고 있다. 나를 왼쪽 오른쪽 위아래 안팎 주둥이 뚜껑까지 한 바퀴 싹 훑는다.


“안 깨졌다! 포장도 꼼꼼하고, 컨디션도 사진 그대로. 역시 이베이~이앙~트랍넬 티팟이 드디어 내 손에! 안녕! 너 실물이 더 예쁘다~“ 하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싱크대 쪽으로 나를 데리고 간다. 내 안에 따뜻한 물을 붓고 전용세제를 풀더니 부드러운 스펀지로 구석구석 씻긴다. 두어 번 헹구고 마른행주로 조심조심 닦는다. 갈색 눈 여자는 나를 들고 장식장으로 가서 큰 접시 위에 살포시 내려둔다. 여자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드디어 완전체! ” 여자는 장식장 문을 천천히 닫는다.


시원하게 샤워도 시켜주고, 갈색 눈 여자는 노라 여사의 조카와는 달리 수다스럽게 보여 안심이 된다.

어디 한번 둘러볼까! 완전체란 말의 뜻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내가 놓인 곳은 큰 트랍넬 접시 위, 오른쪽에 트랍넬 찻잔과 잔받침, 뒤에 트랍넬 커피잔과 잔 받침, 왼쪽 역시 트랍넬 꽃병과 타원형 접시가 나를 중심으로 둘러싸고 있다. 갈색 눈 여자는 찬장 한쪽에 1983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해 2004년에 단종된 우리 무리를 모으고 있었나 보다. 여자는 지금 신데렐라(2015년 디즈니)에서 신데렐라가 접시를 놓쳐서 깨는 장면 그리고 생쥐에게 컵을 엎어서 식탁처럼 만들어 음식을 올려주는 장면을 보고 있다. 다음 날, 우리 무리가 주인공인 그 장면을 보기 전에

그릇장에서 우리를 모두 꺼내어 식탁에 올려둔다. 우리가 나오는 장면만 찾아서 보고 또 본다. 친구라도 불러서 차도 우리고 얘기도 나누면서 보면 참 좋으련만…. 에휴..



나는 식탁에 놓였다. 오늘은 무리 중 나만 식탁 위에 있다. 갈색 눈 여자가 바쁘게 움직인다. 내가 고대하던 티 타임인가? 오늘은 무슨 차를 품게 될까? 손님이 올까? 무엇보다 기다리는 건 ‘이야기’이다. 아직 갈색 눈 여자는 혼자다. 여자는 주로 무슨 차를 우려 마실까?

트와이닝, 해로즈, 포트넘 앤 메이슨, 위타드 오브 첼시등의 브랜드가 보인다. 여자는 두 개를 꺼내놓고 생각 중이다.

“뭘 마시지? 선물 받은 로네펠트 winterdream 아니면 오설록 구름 노래…. 오늘은 너다! “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두 개는 모두 티백이다. 나는 일이 인용 티팟이 아니라서 티백을 우리는 데 나를 사용하지는 않을 텐데…그 순간 머그잔이 등장한다. 아뿔싸! 갈색 눈 여자는 머그잔에 티백을 우려 홀짝인다.

싱글벙글 나를 한 번 보고 홀짝. 뚜껑을 열었다 닫고 또 홀짝. 엄지손가락으로 내 주름진 표면을 만져보고 홀짝. 아~ 미치겠다. 도저히 못 참겠다. 이 여자 뭐지? 변태인가?

어쩐지… 다들 피부가 유난히 건조해 보였어…


오늘은 노라(Nora) 여사와 친구들이 눈물 나게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