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화는 마음을 다잡았다. 하련과 슈퍼바이저 문해와의 불화를 들었던 찰나였다. 어쩌면 이번 기회가 그녀에게 큰 도약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들 하련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물론 수련도 그렇다. 하지만 하련만 밀려난다면 자신이 수술실을 관장할 수 있는 기회가 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술화는 다른 동료들이 하련을 걱정하는 이야기에 동조하지만 머릿속으로는 복잡한 시뮬레이션을 하나하나 그리고 있었다. 문해와의 갈등으로 하련이 혹시 강등된다면, 혹은 다른 부서로 간다면... 분명 슈퍼바이저는 자신의 말을 잘 따르는 간호사를 원할 것이다. 술화는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며칠 전부터 술화는 비서를 통해 슈퍼바이저와 면담을 요청했던 차였다. 문해는 뭐가 그리 바쁜지 쉽게 만날 수 없었다.
"저도 어떤 수술이라도 들어갈 수 있어요. 그동안 실력으로 충분히 입증했고요."
술화는 확실히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업무 이해도도 빨랐다. 게다가 다른 간호사가 꺼리는 VIP 어려운 수술도 적극적으로 자원하여 , 문해가 눈여겨보고 있던 차였다.
"이번에 VIP 수술이 잡혔어요. 모야모야 디지즈(Moyamoya disease)인데 중앙 의사가 로봇수술에 새로운 혈관문합 시스템을 접목해 수술하려 해요. 수술시간도 길어질 것 같고, 어때 할 수 있겠어요?"
"네, 할 수 있습니다."
**모야모야병(Moyamoya disease)은 특별한 원인 없이 대뇌에 혈액을 공급하는 안쪽 목동맥 가지 치는 부위의 혈관이 서서히 좁아져 막히는 병이다.
문해는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저 패기가 제법 맘에 든다. 잘만 이용하면 꼴베기 싫은 수련을 내쫓고 대신 수족처럼 다룰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돌아가는 술화의 뒷모습에서 종아리가 탄력 있고 매끄럽게 흐르고 있었다. 며칠 뒤 SWEL의 인사 발표가 다가오고 있었다. 다들 말은 하지 않지만 긴장하고 있었다. 특히 술화는 이번 기회를 통해 한발 더 승진하여 자신의 역량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문해와의 면담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들었으니, 한번 기대해 볼만도 했다. 물론 하련의 실력이 좋고, 많은 후배들이 따르고 있는 건 알고 있다. 그녀를 미워한다기보다. 술화 그녀도 한번 더 높은 위치에서 우뚝 서고 싶다.
술화는 하련이 권력에 대한 욕심보다, 후배 양성에 조금 더 힘을 쓰는 것 같았다. 그녀가 승진이 아닌 교육 방면에 정신이 팔린 새에, 이번 인사이동을 통해 잘 이용한다면 술화가 승진할 가능성이 조금 더 있었다. 게다가 최근 하련과 문헤와의 불화를 잘만 이용한다면 충분히 유리한 위치로 끌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맥주를 기울이는 정문이 오늘따라 유난히 기운이 없다.
"왜 그래."
하련이 묻는다.
"..."
맥주를 들고 하련이 마시려는 찰나 순간 손에 힘이 풀리며 맥주잔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맥주잔의 파편이 바닥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순간 오토 클린 로복이 와서 바닥을 닦아준다. 하련은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본다. 며칠 전부터, 계속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악몽을 꾸고, 오늘은 컵이 눈앞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뭔가, 우주의 기운이 달라진 것 같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하련 선생님."
누군가 다급하게 하련을 찾는다. 이번 인사발령 때 하련 샘이 다른 부서로 가게 된다는 소식이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말하는 그 모습에서 하련은 그동안 우연한 일련의 싸인(유리컵이 깨지고 악몽)이 이번 일을 미리 의미하고 있었음을 느낀다. SWEL수술실은 평소 부서이동이 거의 없는 편이다. 수술실 특성상, 중앙 의사와의 협업, 보조의사와의 협업은 한 두해 만으로 이루어지는 팀워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 오랜 기간 동안 근무하고 있었다. 하련 또한 오랜 기간 수술실에 일하며 자신의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조금 더 효율적으로 후배들을 가리키기 위해 의사들만 시행하는 홀로그램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교육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문해가 자신을 탐탁지 여기지 않는 것은 알고 있었다. 상부에서 원하는 것보다, 스스로 진취적으로 팀원을 이끌어 고분고분하지 않으니 그럴 만도 했다. 부딪히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하련은 문해를 만나야 했다.
"들어오라고 해요."
문해가 비서에게 말한다. 하련이 센서를 통과하고 문해의 방으로 들어온다. 넓은 사무실 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있는 책상에 문해가 앉아있다.
"제가 다른 부서로 발령 난다고 해서 확인차 왔습니다. "
"잘 왔어요. 하련 간호사 능력이 너무 좋아서 다른 부서에서 좀 도와달라고 요청이 왔어요. 그동안 수술실에서 일해줘서 고마워요."
"이번에 로봇 수술장비가 4대가 더 들어올 예정이에요. 지금 간호사들을 효과적으로 교육하지 않으면 수술을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있어요."
"하련 간호사 말고도 유능한 간호사 많으니까, 걱정 말아요. 아마 다음 달부터 부서가 바뀔 것 같으니까, 후임에게 인계하세요."
문해는 눈을 내리깔며 잔잔하게 말한다.
"제가 슈퍼바이저님 맘에 안 드는 건 알겠는데, 이번 프로젝트만 하고 나갈 수 있게 해 주세요. 지금 홀로그램 교육 프로그램을 처음 한창 시행 중인데, 이것만 마무리하고 제 발로 나가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내정자 정해졌으니, 즉시 인계하세요. 그리고 이번 일로 다시는 만날 일 없었으면 좋겠어요."
문해의 입가에 웃음이 순간 스쳤다 사라진다.
하련의 뒤로 문이 닫히고, 문해의 얼굴이 사라지는 순간 하련은 차오르는 눈물을 꾹 참는다. 울며 주저앉을 수는 없다. 그동안 수술실의 추억 그리고 그녀가 진행했던 여러 가지 프로젝트, 다른 동료들이 눈에 선히 밟혔다. 이렇게 나갈 수는 없었다. 문해를 그대로 둔다면 그의 손아귀에 수술실이 넘어갈 것 같았다. 체계적인 교육 없이, 막무가내로 간호사들을 닦달할게 눈에 선히 보였다. 평소 하련을 탐탁지 않아한 데다가, 홀로그램 교육 시스템을 보고도 안 하고 이용했다는 허울 좋은 핑계가 있으니 이번 인사 기회를 통해 하련을 내치는 게 분명했다. 하련은 분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현실에 맞서기에는 막막했다.
"하련 샘 진짜 아무것도 안 하고 이대로 나가실 거예요.?
하련은 아무 말하지 않았다.
사실 하련은 조용히 문해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상부에 작성할 보고서와 문해의 비리를 밝힐 증거를 수집하고 있었다. 문해가 하련과의 대화를 녹취하고 있었다. 문해에 관한 모든 사실을 수집하는 동안에도 흥분한 동료들이 상부에 보고하고자 할 때 하련이 가만히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만약 문해와 싸움을 시작한다고 할 때 승리를 백 프로 장담할 수 없었다.. 혹은 하련이 혼자 문해와 상대하고, 다른 동료가 그들만의 방식으로 협공할 경우 추후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할 일이 있을 경우, 그게 하련이 아닌 다른 동료가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분명 그런 싸움 자체에 휘말리는 것을 싫어하는 동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변화를 내심 원하는 부류도 있을 것이다.
하련이 스스로 혼자의 싸움을 택한 것은 다른 동료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부서 전에 그동안 문해의 비리를 파악한 내용을 선공개한다면, 하련을 수술실에 남기고 대신 다른 동료를 내보낼 수도 있다. 그런 문해의 특성을 하련이 모를 리가 없었다.
하련은 배수의 진을 치기로 한다 본인이 다른 부서로 갈 생각을 하고 차근차근 준비를 한 것이다. 완전히 부서이동이 결정이 되고 본인이 나가는 날 모든 문해의 비리를 밝혀 다른 동료를 지킬 생각이었다.
"괜찮아?"
유난히 두 개의 행성이 밝은 날 정문이 물었다.
"좀 힘들어. 혼자 싸우는 게 쉽지 않네. "
"억울할 거야, 하지만 객관적으로 문해와 싸우는 게 너한테 유리하지 않아. 설사 유리하더라도 상황이 바뀌지 않을 수도 있고. 난 네가 걱정돼. 밤에 잠은 잘 자는 거야?"
"사실 잠을 잘 못 자고 있어. 입맛도 없고."
"내가 정신과 친구에게 말해서 약 좀 지어온 거 있어. 이거 먹어. 마음이 좀 차분해질 거야"
하련은 그런 정문이 고맙다. 이럴 때 위로받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게 참 감사하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도 돼."
하련은 정문의 말에 무너진다. 눈물이 하련의 바지에 뚝뚝 떨어진다.
정문은 하련의 어깨를 만져주려 손을 내밀려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저 가만히 기다려 주기로 한다. 오늘따라 하련의 어깨가 더 가냘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