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르띠아!!!!
배낭 옆 물통자리에 야무지게 챙겨 넣은 또르띠아가 생각났다.
은박지 호일에 곱게 싸인 또르띠아. 장갑을 벗은 손을 바들바들 떨어대며 포장을 벗겼다. 내가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버리지 않고 남은 것을 싸 온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차가운 겨울 날씨덕에 빵은 꽁꽁 얼고 질기고 딱딱했지만 물이 없었기 때문에 꼭꼭 씹어먹어야 했다.
어젯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또르띠아를 보며 따뜻한 식사 한 끼에 감사하지 못하고 처음 보는 못생긴 외모에 푸념만 늘어놓았던 나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앞으론 그 어떤 새로운 음식을 만나든 간에 감사한 마음 가득 담아 먹으리라.
넋 놓고 앉아 뭐를 감상하며 먹을 시간도 없었다. 힘들어서 걸음을 잠시 멈추면 금세 한기가 느껴졌고, 배낭을 완전히 벗어둔 탓에 이 소중한 식사 시간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팍팍해진 또르띠아는 순순히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못했다. 그렇지만 안 먹으면 어찌 될지는 눈에 빤-했기에 빵 마지막 부분까지 꼭꼭 씹어 삼켰다.
허기가 좀 가시자 머리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흐-음… 지도상으론 멀지 않은데 말이야… 일단 계속 가보자! 도착 시간은 상관없어. 해가 지기 전까지만 도착하면 돼! 흐음… 헤드 랜턴이 있으니 사실 해가 져도 상관은 없을 것 같은데? 그냥 오늘 안에만 도착하면 되겠어!‘
정말 나도 나를 알 수 없는 두뇌 구조를 가진듯하다.
그래도 머릿속으로 희망회로를 돌리니 기운이 나는 듯했다.
인간 사시나무가 있다면, 바로 저때의 나였을까? 안 그래도 수족냉증이 심한 편인데 손은 이미 빨갛게 변해버렸고 장갑을 끼고 옷을 여며도 한기는 가실 생각이 없었다. 나쁜 녀석…
하지만 참 우습게도 최악의 길 상태와 체력, 고도, 배낭 무게, 겹겹이 껴입은 옷들 등등은 금세 나를 또 땀이 나게 만들어주었다.
등산 스틱… 이 녀석이 없었다면 난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걸어가며 5분 걷고 2분 쉬기를 얼마나 반복했는지도 모르겠다. ‘나폴레옹이여, 그대는 피레네 산맥을 말을 타고 넘으셨겠지요...?’과 같은 비생산적인 질문들을 끝없이 머릿속의 나와 주고받으며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
추웠다. 고독하고 외로웠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라졌지만 정말이지 지독하고도 완벽하게도 난 혼자였다.
또다시 5분이 지나 쉬는 시간을 기특한 애플워치가 타이머로 알려준다. 그냥 별생각 없이 차고 온 이 녀석만이 내 유일한 친구였다.
그날, 그 길 위에서의 낙은 뭐랄까. 좀 우습지만 잠시 쉬어가는 타이밍마다 뒤돌아 앉아서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 나 자신을 칭찬하는 것이었다.
‘아… 정말이지 거리는 길진 않지만 많이도, 잘도 올라왔네. 짜식… 기특해!‘
처음? 아니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지난날 우울증으로 나 자신을 내팽개치고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던 긴 시간을 이겨내어 비록 힘은 들지만 배낭을 이고 지고 여기까지 잘도 왔다는 작은 성취감에 취해 나를 기특해하는 자기애 살짝 넘치는 기분이 든 것은 정말이지 아주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일 뿐이었다. 뭐랄까? 시간과 정신력 그리고 체력과의 전쟁터 한가운데 있다는 기분은 영 떨치기가 쉽지 않았다.
길 위에 하루종일 혼자 있던 나, 그리고 시간이 또 흘러 찾아온 반가운 휴식시간. 또다시 습관처럼 눈에 보이는 돌 위에 앉아서 내가 걸어 올라온 길을 보던 중이었다.
내 두 눈을 의심했다.
사람인가? 잘못 봤나? 드디어 헛것이 보이는 건가? 아아… 나를 데리러 온 천사인가(?)
사람이다. 성큼성큼 걸어 올라온 저것은(?) 사람이다.
낯가리기 선수인 나는, 그 친구가 점점 내게 다가오기까지 내적갈등을 수십 번 하며 ‘H.. hi.. Buen camino...;'를 결국 입 밖으로 뱉어내고야 말았다.
그 친구도 내게 ‘Buen camino!'라고 답을 해주고 등산 스틱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간다.
이건 신이 주신 기회다!!!! 하늘에서 내려주신 천사가 분명해!!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저 친구를 속으로 나만의 길잡이로 삼아서 열심히 걸어보는 거야!!!!!!!!!!!!
사람 발자국도 없이 내가 찍어놓은 발자국뿐이었던 눈 덮인 길 위에, 이정표처럼 다른 사람의 발자국이 찍혔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기뻤다. 그전엔 내가 오늘 하루, 오늘의 루트의 까미노 개척자로서 걸어왔다면 이제는 핸드폰으로 지도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발자국만 따라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2분이 지났다. 그는 내 시야에서 완벽하게 사라졌다. 따라잡으래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친구는 키가 2m는 족히 돼 보였다. 발은 또 얼마나 큰지, 그 친구가 찍어놓고 간 발자국 안에 내 발을 넣으면 오히려 지-익 지-익 미끄럼을 타기 일쑤였다.
‘아니, 나만 힘들어하는 거야? 다들 원래 저렇게 가는 건가? 그럼 내가 진짜 저질체력이 맞나 보네. 남들은 까미노 오기 전에 한강변을 따라서 25km씩 걷기 연습을 하고 온다던데, 남산을 연습이랍시고 무작정 온 나의 패인이지 뭐~’
유일한 길동무가 사라진 것에 무척 아쉬워하며 발자국을 위안 삼아 걸어 나갔다.
처음 까미노 길에 들어섰을 땐 눈이 다 녹아서 젖은 나뭇잎 길을 걸어왔었다면 고도가 점점 높아질수록 눈이 아주 수북하게 쌓여 처음엔 내 발목까지 오다가 어느새 정강이까지 왔더랬다.
이때 시각은 오후 2:48.
오후 2:48에 찍은 사진을 마지막으로 나는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여유와 의지가 싹 사라졌다.
쌓인 눈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를 한 번 더 패닉에 빠트리고 채찍질당하는 당나귀처럼 빨리 걷게 만든 것은 바로 눈 위에 찍힌 알 수 없는 동물의 발자국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먼저 간 친구의 발자국 근처에 산짐승의 발자국이 찍힌 것을 발견하게 됐다. 보는 순간 온몸의 피가 싸-하고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진짜 젠장이다 젠장!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신이시여… 일단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빨리 가자 대신 조용히 가야 해.’
마스크를 쓰고 헉 헉 쉬어 대던 숨소리는 한순간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사람이란 참 간사하고 웃기는 동물이다.
아…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동물에 좀 더 관심이 있었으면 이게 어떤 동물의 발자국인지 알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과거의 난 동물 발자국엔 무지했었다.
‘늑대? 늑댄가? 곰? 노루? 고라니? 아… 뭐지 이거 일단 나는 지금 너무 무섭긴 해. 근처에 떼로 있으면 곤란한데… 산짐승과 싸워서 이기는 법을 유튜브로 좀 봐올걸 그랬나, 야야 발소리가 너무 크다. 숨도 조금 더 조심히 쉬고!!!’
길을 가다 툭-하고 무언가가 튀어나올라 꽁지 빠진 새마냥 정신없이 걸었을까, 드디어!!!!!!!!!! 저 앞에!!!!!!!!! 집이 보인드아아아아아아-!!! (감격)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나를 읭? 하게 만드는 것이 또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발목, 정강이, 무릎, 허벅지까지 오던 눈이 허리까지 오게 되어 그 모양새가 마치 생크림 케이크 위에 장식을 푹- 꽂아 넣은 느낌이었달까?
잠시 뇌정지가 왔다. 고지는 눈앞에 보이는데 저기까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눈이 허리까지 쌓여있었어도 단단하게 굳은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등산 스틱을 꽂아 넣는 족족 푹푹 들어가 박혔다.
그렇다고 몸으로 밀고 나가자니 거대하고도 넓게 쌓인 눈의 밀도 때문에 밀어 지지도 않았다. 다리를 들어 넣자니 지칠 대로 지친 나에겐 그것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에라 모르겠다. 이 눈밑에 뭐가 있건 내가 이 길을 지나는 방법은 하나뿐이야.
눈 위에 배를 대고 냅다 엎드렸다. 그리고 수영을 하듯이 눈 위에서 허우적거리며 앞으로 나갔다.
아… 지금 그때의 모습을 상상하자니 너무 짠해서 눈물이 살짝 맺히려 한다.
다행히 허리까지 오는 눈의 구간은 길지 않았다. 한 3분 정도? 도로가 위로 어기적거리며 올라왔을 때 차가 한대 지나갔는데, 혹시나 내 짠내 나는 모습을 봤을라 괜히 멋쩍어졌다. (코-쓱.)
도로에 등산스틱을 탁-하고 딛는 순간은 정말이지, 나를 오만가지 생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한순간의 힘듦이 싫어 잘못된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의 결과는 나를 죽음의 문턱까지 멱살 잡고 끌고 갔고, 미끄럽지만 이 딱딱한 아스팔트를 보며 현대 문물은 정말 대단해!!! 라며 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오후 4:50.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
살았다. 살아남았다. 오늘 일을 계기로 두 번 다신 금지된 길로 가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