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지쳤어요. 땡벌! 땡뻘!!
아주 잘 잤다. 꿈도 안 꾸고 정신없이 자버렸다.
일어날 시간에 미리 맞춰두었던 인정사정없이 울려대는 알람소리에 겨우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
구글맵으로 찾아보니 발 칼로스에서 16km 떨어진 곳.
까미노 닌자앱으로 찾아본 거리는 12.2km로 까미노 길과 구글맵의 길은 약 4km 정도 차이가 났지만, 겨울엔 피레네 산맥 나폴레옹 루트 절대 출입 엄금이었기 때문에 우회로인 도로를 따라 16km를 걷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난 더 이상 속지 않아! 구글맵은 내가 유럽에 와있어서 그런지 걷는 예상 시간이 유럽 사람들의 롱다리 기준으로 측정된 게 분명하다고 확신에 차 있던 나.
구글맵 예상시간 4시간 47분이 아닌 6시간 안에만 론세스바예스의 공립 알베르게로 도착한다면 일단 오늘의 일정은 성공적일 것이란 목표를 세웠다. 이 정도면 선방한 것이라! 생각하며, 하지만 늘 그렇듯 내 글들엔 반전이 있다. 한국말은 일단 끝까지 듣도록!
신생아도 아닌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평소 평균 수면시간이 12시간인 나는 어제의 축적된 피로가 덜 풀린 채, 눈은 떴지만 침낭 안에서 꼼지락 거리며 영 나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규칙은 지켜야지! 지난밤 알베르게 봉사자분이 반드시 나가야 하는 시간을 강조하셨고, 그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어 힘겹게 침낭 밖으로 나와서 짐을 챙겼다. 세상에… 따뜻한 공기가 감돌아 한껏 빵빵해진 침낭을 다시 접어 넣는 게 이렇게 시간 걸리는 일이었을 줄은 몰랐다.
출발 전, 까친연 고수님들이 알려준 정보대로 침낭은 배낭의 맨 밑바닥에 그리고 무게가 나가는 것들을 그 위로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나서야 짐 싸기가 마무리 됐다. 처음에야 몇 번 10분씩 시간이 걸렸지만 나중엔 3분 컷 짐 싸기가 가능해졌다지? 후후…
까친연을 통해 현재 까미노를 걷고 있는, 걸을 준비를 하는 사람들을 위해 분기별로 오픈되는 카카오톡 채팅방이 있었다. 실시간으로 정보가 올라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까미노의 숙소 상황, 날씨 등 정보를 얻기 위해 그 방에 입장해 있는 상태였다.
원래 핸드폰을 시계용도로만 사용하고 있던 나는 늘어나는 카톡숫자에 반갑기도 하고 어떤 정보가 있을까? 하는 호기심으로 어떤 글들이 올라왔는지 오늘의 여정을 떠나기 전 확인해 보기로 했다.
바로 내 하루 앞에 먼저 걷고 계신 분이 올려주신 유용한 정보! 빗길이라는 단어를 보고 급하게 찾아본 오늘의 날씨!
한국의 겨울 날씨와 비교해 제법 따뜻한 기온에 속하는 편이었지만, 내가 강조하고 강조했던! 이곳은 산속이란 사실. 비바람을 막아줄 웅장한 건물 따윈 없는 곳이었다.
급하게 쌌던 짐을 풀고 위쪽에 방한 용품을 올려 넣어 다시 재배치를 끝내고 나서야 진짜로 출발 준비가 끝이 났다.
핸드폰 배터리 완충 확인, 장갑 바람막이 주머니 안에 잘 넣었고! 스패츠 등산화 위에 착용 완료. 알베르게의 불을 다 껐는지, 빠진 것은 없는지 여러 번 확인한 후에야 숙소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직업병)
하… 어제 캄캄하게 어둡기만 해서 미처 보지 못한, 아니 보이지 않았던 말도 안 되는 풍경이 문 밖에 펼쳐져 있었다.
알베르게 문을 열자마자 에어팟 프로를 껴서 노이즈 캔슬이 된 것 마냥 조용하고, 장대하게 내 눈앞에 펼쳐진 이 고요하고도 평온한 풍경에, 나도 모르게 또 눈물이 흘렀다.
아… 그동안 나는 스스로가 얼마나 심적으로 아프고 지치고 메말라 있었던 것인지 절실하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 평온한 풍경을 보고 있자니 속에 쌓이고 곪고 있던 마음의 응어리가 싸-악 풀어지는 기분인 것만 같았다.
비록 준비하고 계획하고 발걸음을 한 발짝 내딛기 전까진 쉽지 않은 결정이었던 건 분명했다.
‘잘했다. 정말 잘했어. 이곳에 오길 결심한 건 내 인생 최고의 결심이었어.‘
풍경만 바라보며 몇 분을 어린애처럼 목놓아서 울어댔는지,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안도를 하고 난 뒤에서야 시계를 보니까 시간은 8:40이 되어 있었다.
자 이제 가보자. 출발해 보자! 오늘은 또 어떤 일이 펼쳐질지 꿈에도 모른 채, 식사도 거르고 길을 나선 나는 아주 엄청난 바보였다.
과거의 나에게…
미안해 과거의 ‘나’야… 조금 더 충분한 검색을 하지 않고 길을 떠나서 미안해… 그날 잘 살아남아줘서 고마워.
어제저녁 식사(?)를 했던 Bar를 지나 도로를 따라 힘차게 걸어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기초체력 자체가 없는 나에겐 시련은 1시간 만에 찾아왔다.
그전에도 언급했지만, 태백산맥을 높다랗게 언덕진 굽이굽이 진 도로를 걷고 있자니 이게 진짜 사람이 할 짓이 맞나?라는 생각이 들며 체력이 배터리 효율 30%로 밖에 안 되는 오래 사용한 핸드폰처럼 빠르게 방전되어 갔다. 설상가상으로 이상하게 스페인 국경을 넘어오니 와이파이를 제외하곤 인터넷이 영 되지 않았다.
단순함의 극치인 나는 정겨운 시골풍경과 장작 타는 냄새에 취해서 ‘아… 시골이라 그런가? 아니면 산속이라 그런가? 한국이 IT강국이라더니 그 말이 맞구먼 껄껄껄’이라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을 뿐.
간간히 나를 지나가며 빵빵대는 차들에 화들짝 놀라가며 쟁기를 얹은 소처럼 느리게 걷고 또 걸었다.
이것도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차가 나를 보며 빵빵대는 것은 ‘찻길로 걷지 말고 저리 비켜 이 얼간아!!!!’ 이런 뜻이 아니라 순례자들을 향해 클락션을 울림으로써 언어적 표현을 대신한 'Buen camino!'의 비언어적 표현의 응원 방식이라는 것을 아주 나중, 아아아주 나중에 알게 되었다.
배낭 무게 때문에 허리가 ㄱ자로 꺾여서 땅만 보고 걷자니 몸이 슬금슬금 고통의 비명을 지를까 말까 하던 참이었다.
다행히 인터넷은 여전히 안 되는 애물단지로 전락해 버린 핸드폰이었지만 구글이 GPS를 잡아주어 실시간 경로 확인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출발 시간 오전 8:40 기준으로 내가 계획한 6시간의 계획이라면 적어도 넉넉하겐 오후 3시에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해야 하는데 현재 시각 오전 11:32.
그렇게나 힘을 쥐어짜가며 걸어댔는데 거리가 영 줄어들질 않는다. 이대로 가다간 난 오늘 또 해가 다져서야 곤죽이 된 상태로 도착할 것이 뻔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아무리 코로나였어도 아무도 없는 길에서 걷는 사람은 나뿐이다 보니 마스크는 인간적으로 벗고 걸었어도 지장 없었을 듯하다. 숨 쉬는 게 마스크 때문에 더 힘들어 체력이 빨리 방전된 걸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오늘에서야 해봅니다…
말이 나온 김에, 겨울은 까미노 비수기라는 표현이 몸소 체감될 정도로 내 앞뒤, 나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 단 한 명도 없었다. 대화를 나눈 사람도 없었다. 아주 그냥 사람 그림자도 못봤다. 내가 본 것은 오로지 차 몇 대뿐… 정말 외로운 길이었다.
걷다 보니 정말 뜬금없는 곳에 집이 한채 있었다.
그리고 난 그곳에서 잠시 쉬면서 내 일생일대에서 가장 미친 짓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