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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혼은 하자

by 휴지기

추석 연휴이다. 원래는 토요일인 어제 아이와 함께 충청도에 있는 친정에 가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혹여나 애지중지 키운 큰딸이 이혼이라도 하게 될까 봐 항상 노심초사인 친정엄마는, 이번에도 아이랑 둘이 올라간다고 하니 하소연을 하듯 말씀하셨다.


"니 남편은, 와서 밥 한 끼 먹고 가지 그런다니"


남편은 엄마를 뵐 면목이 없다고 친정에 가기를 꺼렸다.


엄마는, 남편에게 아들 없는 집의 큰사위로서의 역할은 바라지도 않았었다. 다만 둘이 큰 문제없이 평온하게 살아가기만을 바라시고 계셨는데... 어쩌다 보니 우리 사이의 문제를 엄마에게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들켜버렸다. 엄마는 크게 놀라셨고, 그 일로 원래 엄마 앞에서 죄인처럼 자신감이 없던 남편은 더 큰 대역죄인이 되어 엄마 앞에 설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엄마는 남편과 같이 오기를 바라셨다. 엄마의 바람도 있고, 나도 거의 다섯 시간이 되는 장거리를 혼자 운전하는 것이 힘들기도 하여 남편에게 같이 가자고 말했다. 남편은 마지못해 함께 친정에 가기로 했고, 그래서 우리는 월요일에 같이 친정에 가는 것으로 계획을 바꾸었다.


남편이 주말에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해서 주말은 집에서 각자 해야 할 일을 하기로 했다. 나와 아이는 급하게 해야 할 일이 없었지만 꾸역꾸역 해야 할 일을 만들어냈다. 나는 업무 몇 개를 처리하고 글을 끄적였고 아이는 책 읽다가 티브이 보다가를 반복했다.



어제 아이가 치킨이 먹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자기가 치킨을 만들어보겠다고 했다. 요즘 남편이 유일하게 잘할 수 있는 건 요리밖에 없는지라, 나도 그러라고 했다.


마트에 가서 닭볶음용 치킨과 샐러드 야채, 맥주를 샀다. 물론 내가 샀다. 남편은 거지, 몸이 다 망가져라 일하지만 단돈 만원이 없는 거지였다.


남편은 유튜브로 치킨 레시피를 확인한 후 치킨을 만들었다. 아이는 남편의 치킨을 먹으며 파는 것보다 더 맛있다고, 아빠 치킨집하면 대박 날 거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남편은 뿌듯해했고, 그 순간 나도 조금은 행복했다.


남편은 치킨을 먹고 나서 볶음라면을 만들었다. 남편이 볶음라면 양념을 만들면서 나에게 삶은 면을 차가운 물로 헹궈달라고 말했다. 나는 면을 헹구다가 실수로 면을 다 싱크대에 쏟아버렸고, 남편은 싱크대에 있던 면을 다시 건져 올려 소생시켰다. 싱크대에 한 번 닿았던 면을 먹는다는 게 찝찝하기는 했지만 볶음라면도 나름대로 맛이 있었다.


치킨, 볶음라면과 함께 맥주 두 캔을 먹은 나는 양치만 하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러고는 오늘 아침이었다.



싱크대에 설거지거리가 가득 쌓여있다. 쓰레기통 옆에는 재활용품을 담은 비닐봉지가 넘쳐나고 있다. 음식물 쓰레기봉투는 벌려진 채 싱크대 옆에 놓여있고 주방에는 어제 먹었던 맥주 캔, 치킨을 튀긴 기름, 컵 등 온갖 너저분한 것들이 널려있다.


어제는 잠시 즐거웠었다. 남편이 만들어준 맛있는 음식과 함께 술을 마시니, 잠시 나의 비루한 현실은 잠깐 동안 잊혔다.


예전에는, 이런 경험이 나를 버티게 했다. 남편이 죽을 만큼 밉더라도, 남편 때문에 내가 절벽 끄트머리에 발을 걸치고 있더라도 찰나의 행복과 웃음만 있으면, 그 힘으로 안간힘을 다해 남편과의 삶을 버텨내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닌 것 같다. 남편과 함께 있으면 내 삶이 어지러워진다.


지금 우리 집의 모습처럼 여기저기 쓰레기가 나뒹굴고 설거지거리는 싱크대에 가득 쌓여있으며 나는 항상 현실을 잊기 위해 취해있을 것이다. 지금이 나의 삶을 정돈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맨 정신으로 내 삶을,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직시할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어제, 남편이 만들어준 요리를 먹으며 행복하다고 느낄 때에도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 그래도 이혼은 하자."


남편은 알았다고 했다. 우리는 금요일에 협의이혼 서류를 제출하러 법원에 갈 것이다.



남편 머리가 덥수룩하다. 카드를 주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자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머리를 자르고 오면 내가 직접 염색도 해줘야 할 것 같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남편과 엄마와의 만남에서,

남편의 덥수룩하고 지저분한 모습은 나를 처량하게 만들고, 엄마를 안타깝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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