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아침, 협의이혼서류를 제출하기 위해 가정법원으로 향했다. 곤히 자고 있는 아이에게는 '엄마 아빠 볼 일이 있어서 나갔다 올게. 사랑해'라는 메모를 써 놓고서.
아이가 자다가 일어나 엄마가 없는 자유로운 시간을 선물처럼 느낄 걸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아이가 항상 바라 마지않는 자유를, 부모인 남편과 나의 이혼 접수 때문에 주게 된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가정법원까지는 차를 타고 삼십 분 정도가 걸렸다. 법원으로 가는 내내 남편과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2년 전 처음으로 이혼서류를 제출하기 위해 가정법원에 갔었다. 남편의 회사가 위태위태하다가 폭싹, 하고 주저앉았던 때였다.
남편은 나랑 아이는 살아야 하지 않겠냐면서 나에게 이혼을 말했었다.
결혼 초기부터 마음속에 이혼이라는 단어를 품고 살았으면서도 그때는 이혼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였었다. 근데 남편의 말, 나와 아이는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그 말에 나는 남편을 따라 서류를 챙겨 가정법원으로 향했었다.
이혼은 하지 못했다. 아이양육동영상 시청 확인서 때문이었다. 미성년 자녀가 있는 부부는 평일 오전 9시 30분까지 가서 아이양육동영상을 시청한 후 확인서를 받아와야 이혼서류를 접수할 수 있다고 했다.
그날도 회사에 일이 있다고 하고 조퇴를 해서 가정법원에 간 거였다. 평일 오전에 시간을 내기 쉽지 않았다.
결국 아이양육동영상 때문에 우리는 이혼을 하지 못했고, 그 후로 이년을 함께 또 살아왔다. 사실 이혼을 하지 못했는지 안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죽어도 이혼을 하고 싶었으면 어떻게든 시간을 맞췄겠지 싶다.
가정 법원에 도착한 건 딱 9시쯤이었다. 우리도 일찍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보다 먼저 온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젊은 여자는 무인서류발급기에 돈을 넣고 있었고 중년의 부부는 테이블에 함께 앉아 이혼서류를 작성하고 있었으며 키 큰 남자는 이혼서류를 받아가고 있었다.
우리도 서류를 받아 중년 부부 옆옆 테이블에 앉아 협의이혼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양육비 지급액과 지급일 등을 적으며 남편에게 말했다.
"양육비 말고도, 내가 오빠 사업자금으로 대준 거 오빠가 다 갚아야 돼."
남편은 당연히 그럴 거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 남편의 '당연'이라는 걸 믿지 못했다.
남편의 마음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남편의 상황을, 그런 상황을 초래한 남편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거였다. 남편이 한 말대로 다 이루어졌다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하여 우리보다 빨리 서류 작성을 끝낸 중년의 부부가 무인서류발급기 앞에서 헤매고 있었다. 우리도 서류 작성을 끝내고 그들 뒤에 섰다. 뭔가가 잘 되지 않는지 중년 부부 중 남편이 우리 보고 먼저 하라고 양보해 줬다. 내가 괜찮다고, 서류 뗄 게 많아 시간이 걸릴 테니 먼저 하시라고 하니 그 남편이 또
"뭐가 잘 안 돼서요. 이혼이 처음이라."
라고 말했다. 아마 농담이었을 것이다. 옆에 있던 중년부부 중 부인이 눈빛으로 남편에게 타박을 주었다. 그 중년부부는 서로 티격태격하며 우리 뒤에 다시 줄을 섰다.
저 부부도 서로 미워죽겠어서, 상대에 대한 증오와 원망만으로 이혼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우리는 서류 발급을 마친 후 아이양육동영상 시청을 위해 이동했다. 민원실이 아니라 법원 내부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법원으로 들어갈 때 공항에서 하는 것처럼 소지품 검사(?) 같은 걸 했다. 이런 걸 왜 하는 거냐고 남편에게 물어봤더니 남편이
"몰라, 법원 들어갈 땐 다 하던데."
라고 대답했다. 나는 '잘났다'라고 한껏 비꼬아준 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양육동영상 강의실에는 일고여덟 명의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긴 테이블에 의자가 세 개 놓여있었는데 부부가 같은 테이블에 앉은 경우에도 가운데 의자는 비워두고 각자 끝 의자에 앉아있었다. 우리도 그렇게 앉은 후 테이블 가운데에 이혼서류를 올려놓았다.
사람들이 더 들어와 열댓 명쯤의 사람들이 함께 교육을 받았다. 연휴가 끝나서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건지 원래도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모두들 얼굴이 좋지 않았다. 다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 같았다. 하긴, 이혼 서류를 제출하러 오면서 잠을 푹 자고 산뜻한 마음으로 오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심지어 여기 모인 사람들은 어린 자녀를 둔 사람들인데.... 나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과 동병상련을 느꼈다.
그 순간, 우리는 모두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아이양육교육은 생각보다 길었다. 동영상만 시청하는 건 줄 알았는데 상담사가 와서 교육을 하면서 중간중간 동영상을 틀어줬다. 동영상은 20년쯤은 되어 보였다.
신구 할아버지가 법정을 배경으로 이혼 관련 이야기를 했다. 예전 사랑과 전쟁 콘셉트인 것 같았다. 워낙 도파민이 뿜어져 나오는 이혼숙려캠프나 금쪽같은 내 새끼, 결혼지옥 등을 즐겨보던 탓인지 다 어딘가에서 보고 들은 내용들이었다.
혹시나 중간에 눈물이 나면 어쩌나, 보다가 아이 생각에 이혼을 다시 생각하게 되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이양육교육까지 마치고 마침내 우리는 협의이혼 서류 제출을 끝냈다. 만 16세 미만의 아이가 있기 때문에 이혼 확정을 위해서는 올해 안에 부부상담을 받아야 했고, 내년 1월에 판사가 이혼을 확정해 주면 동사무소에 가서 접수를 해야 한다고 안내받았다.
협의이혼인데도 절차가 적지 않았다. 어리숙하면 이혼도 못하겠구나 생각하며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의 이혼 확정날짜는 내년 1월이었다. 지금 우리는 이혼숙려기간이다.
타던 차를 팔고 낡고 작은 중고차를 샀다. 타던 차의 할부금은 모조리 또 나의 몫으로 남았다.
십여 년쯤 전에 골수브레이커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지금 나의 남편이 나의 골수브레이커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이혼하는 거다.
남편이 올해 안에 뭔가가 이루어질 거라고 했다. 올해 안에, 자신이 도모하고 있는 일의 결론이 날 거라고 했다. 수도 없이 들어온 달콤한 말이었다. 그 말에 속아, 나는 결국 나의 골수까지 스스로 빼준 꼴이 되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 말을 믿고 싶기도 하다. 그렇게 수많은 실망과 좌절과 허무와 원망을 경험했으면서도, 닥치라고, 그딴 소리 집어치우라고 여러 번 소리쳤으면서도 믿고 싶은 마음이 아직도 조금은 남아있다.
이혼숙려기간. 이 기간에 정말 이혼을 숙려 해 봐야겠다.
헛된 믿음에 현혹되지 않고 또한 헛된 자존심에 넘어가지 않도록 여러모로, 깊게, 헤아려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