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키운 것들

by 휴지기

아빠는 많은 것을 키워냈다. 소, 닭, 돼지, 오리와 같은 동물들부터 벼, 딸기, 고추, 콩, 감자와 같은 식물들까지. 아빠는 많은 가축과 작물을 키우면서 살아오셨다. 아빠가 이렇게 많은 것들을 키워낸 건 많이 망했기 때문이다. 특별한 기술 없이 시골에서 부모와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뭐든 키워 팔아야 했는데 애석하게도 뭐가 돈이 되고 돈이 되지 않는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그래서 아빠는 많은 것들을 키웠고 그만큼 많이 망했다.


닭을 키울 때는 닭발을 자주 삶아 먹었다. 할머니와 엄마, 아빠, 사촌 동생들까지 일고여덟 명의 가족들이 마루에 동그랗게 모여 앉아 허연 닭발을 먹던 장면이 선명하다. 큰 솥을 밥상 위에 올려놓고 뚜껑을 열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닭발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닭발을 손에 집어 들고 뜯어먹기 시작했다.


지금은 뼈를 발라내지 않은 닭발은 징그러워서 못 먹지만 그때는 한순간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냥 쫄깃하고 맛있었다. 닭을 2년쯤 키웠을 무렵, 전국적으로 조류 독감 비슷한 게 돌았던 것 같다. 어느 날 아침에 닭 축사에 들어갔는데 닭들이 다 꼼짝하지 않고 쓰러져 있었다. 닭들이 우는 소리도 움직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강하고 고요한 죽음이었다. 아빠는 더이상 닭을 키우지 못하셨다.


딸기를 키울 때에는 씨알 굵은 것을 예쁘게 담아서 엄마가 직접 팔러도 다녔었다. 집에서 15분쯤 걸어가면 벽돌 공장이 있었고, 그 옆에 작은 주유소가 있었는데 거기서부터 읍내였다. 어느 날은 엄마와 함께 읍내 초입에 백제장이라는 하얀색 5층짜리 호텔인가 모텔인가로 딸기 배달을 간 적이 있었다. 그런 호텔인가 모텔인가는 시골 사는 초등학생인 나에게는 당연히 생소한 곳이었기 때문에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입구에 들어갈 때부터 괜히 주눅이 들어있었다. 입구를 통과한 우리는 왼쪽의 하얀 방으로 들어갔다.


‘하얀’이라는 말은 그 당시 우리 가족과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엄마와 아빠, 나와 동생들은 타고난 살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항상 햇빛에서 일하거나 노느라 얼굴이 아주 까맸었다. 그날 엄마와 내가 들어간 그 방은 하얬다. 그리고 그 방에서 나온 여자는 방보다 더 하얬다. 하얀 방에서 하얀 옷을 입은 하얀 얼굴을 한 아줌마 앞에 있는 까만 얼굴의 엄마와 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 아줌마에게 내민 딸기 상자에는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크고 탐스러운 딸기들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그 방에서 나오고 싶었다. 빨리 우리 집으로, 하얗지 않은 세계로 가고 싶었다.


직접 판매에 나서기도 하면서 열심히 키워봤지만, 딸기도 돈이 되지는 않았나 보다. 몇 년 뒤 딸기 하우스는 텅 비게 되었고, 아빠가 하우스 기둥에 끈을 달아 만들어준 그네를 타면서 놀았던 기억이 있다.


아빠가 마지막까지 키운 것은 돼지였다. 처음에는 축사라고 하기도 뭣한 작은 우리에서 돼지를 백 마리쯤인가 키우다가 나중에는 최신식의 거대한 축사를 두 동이나 짓게 되었다. 최신식 축사에는 한 동당 몇백 마리의 돼지가 들어갈 수 있었고 자동으로 사료와 물을 주는 기계를 설치했다. 그리고 보일러 비슷한 것도 만들어서 겨울에도 돼지들이 춥지 않게 했다.


새 축사를 짓기 전에는 어미 돼지가 겨울에 새끼를 낳으면 그 새끼가 한데서 얼어 죽을까 봐 안방에서 재우기도 했었다. 돼지 새끼들과 같은 방에서 잠을 자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지독한 냄새와 꿀꿀거리는 소리가 너무 싫었는데, 아빠는 심지어 새끼 돼지들에게 우리가 덮고 자는 이불을 덮어준 적도 있었다. 더러웠고, 나도 짐승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갓 태어난 새끼를 얼어 죽게 둘 순 없었다. 따뜻한 아랫목을 돼지 새끼들에게 내준 우리는, 돼지들과 최대한 떨어진 윗목에서, 돼지와 함께 잠들 수밖에 없었다.


최신식 축사를 지을 때 우리 가족은 조금 성공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 돼지와의 동침은 없을 것이고 허술한 돼지우리 문을 부수고 나오는 돼지를 잡으러 다닐 일도 없을 것이었다. 축사를 짓느라 있는 돈 없는 돈을 다 끌어 모았기 때문에 30년째 살아오고 있는 집을 수리할 돈은 없었다. 낡고 허름한 당신의 집 옆에 커다랗고 화려한 돼지들의 집을 지으면서 아빠는 이 돼지들이 우리를 잘 먹고 잘살게 해 주리라 굳게 믿었던 것 같다.


가끔 팔 수 없는 시원치 않은, 그러니까 특히 무게가 너무 적게 나가거나 작은 병에 걸렸거나 병에 걸릴 것 같은 돼지가 있으면 집에서 직접 잡기도 했었다. 아빠의 여섯 형제자매 중 한 명을 빼고는 모두 그 동네에 살고 있었고, 아빠의 큰아버지와 그 자식들, 아빠의 고모의 아들들, 알지 못하는 많은 먼 친척들이 다 같이 모여 살고 있는 동네여서 돼지를 잡는다고 하면 몰려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평소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아빠는 동네에 친구들도 많아 열 명이 훨씬 넘는 아저씨들이 돼지 축사와 우리 집 사이 마당에 모여서 함께 돼지를 잡았다. 잔인하고 무서워서 차마 돼지를 잡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아빠와 아저씨들이 한바탕 소란을 피우며 돼지를 잡고 나면 집에 있는 빨간 다라이들에는 돼지머리와 다리, 껍데기, 삼겹살, 갖가지 내장 등이 나뉘어 담겼는데, 빨간 다라이에 그보다 더 빨간 피와 함께 담겨 있는 그 돼지의 일부분들이 너무 징그러웠다.


엄마가 소주 상을 내가면 아빠는 돼지를 잡은 곳 바로 옆에서 숯불에 돼지 내장 같은 걸 구워서 아저씨들과 함께 드시고 거나하게 취했다. 한낮부터 시작한 살육과 포만의 잔치는 저녁 늦게까지 계속되었고 나는 피비린내 나는 집이 싫어 어딘가로 도망가고 싶었지만 갈 곳이 없었다. 동네가 다 논뿐이고, 친구도 없었다. 온 집안에 피가 튀기고 아저씨들이 주정을 부리고, 그중에 아빠가 가장 심한 주정을 부리고. 그 상황이 너무 짜증 나는 와중에 또 바로 잡은 돼지고기의 맛은 아주 좋았다. 쫄깃하고, 막 잡은 티가 나는 맛이었던 것 같다.


아빠는 닭을 키우고 딸기를 키우고 돼지를 키워서 우리를 키우셨다. 그것들을 키워 번 돈으로 나와 동생들은 밥을 먹고 옷을 사 입고 학교에 갈 수 있었다.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큰 부족함 없이 클 수 있었던 건, 그것들을 키워내느라 바친 아빠의 시간과 땀 덕분이라는 걸 안다. 닭이 다 죽었을 때, 딸기 값이 폭락했을 때, 돼지들이 이름 모를 병에 걸렸을 때 내쉬었던 아빠의 한숨 덕분이라는 것을 안다.


“이제 나는 내 할 일 다 했네. 애들도 다 커서 시집 갔구, 자네 혼자 살 건 마련해놨구.”

이 말을 엄마에게 하시고 아빠는 얼마 뒤에 돌아가셨다. 어느 화창한 가을날 오후, 땅에 떨어진 밤을 줍다가, 거짓말처럼. 아빠의 장례식장에 온 어른들이 아까운 사람이 갔다면서 많이 우셨다. 그리고 그 슬픔과 울음은 우리에게 많은 위안이 되었다.


아빠의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무언가를 키워야 했던 삶에 대해. 무언가를 키워서 아빠와 남편으로서의, 장남으로서의, 큰형으로서의 의무를 해내야 했던 삶에 대해. 아빠의 60년 남짓한 삶이 소풍 같았으면 좋았겠지만 그러기엔 지고 있는 짐이 너무 무거웠을 것이다. 그래도 아빠가, 당신이 해야 할 일을 다 했다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나셔서 다행이다.



그해 겨울, 텃밭의 고추들은 다 말라 있었다.

지금은 텃밭은 큰고모에게, 논은 큰고모의 막내아들에게 빌려줬다고 한다. 축사들은 내내 비어있다. 아빠와 살던 집에서 엄마는 작은 화분 여섯 개 이외에 아무것도 키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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