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소주, 그리고 담배

by 휴지기

할머니는 주당이셨다. 부엌 입구를 반쯤 가로막고 있어 안 그래도 좁은 부엌을 훨씬 더 좁게 보이게 했던 하얀색 냉장고의 냉장실 맨 위 칸에는 언제나 할머니의 소주가 두세 병씩 놓여있었다. 할머니는 밭에서 고추를 심거나 잡초를 뽑고 오신 후에 목을 축이기 위해, 엄마와 한바탕 대거리를 하고 화를 삭이기 위해, 아니면 그냥 심심해서 소주를 물컵에 자주 따라 드셨다.

당시 국민학생이었던 나는, 소주는 원래 플라스틱병에 대용량으로만 판매되는 술인 줄 알았다. 소주를 그렇게 많이 드셨지만 할머니가 술에 취한 모습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술을 드셔도 안 드셔도 할머니는 그냥 그대로, 작은 몸에 기운이 넘치셨다.


할머니는 골초이기도 하셨다. 항상 입에 담배를 물고 계셨다. 새 담배를 담뱃갑에서 꺼내 피우기고 하고 재떨이에 있는, 당신이 피우다 만 담배를 툭툭 털어 다시 불을 붙이시기도 했다. 마루나 내가 할머니와 함께 쓰는 방에서 주로 담배를 피우셨기 때문에 나는 담배 연기를 자주 맡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끔찍한 간접흡연이지만 그때는 그런 개념이 없었다. 그냥 냄새가 너무 심해 싫었을 뿐이었다. 중학교 때인가 고등학교 때, 집에 아무도 없고 뭐 할 일도 없어 재떨이에 있던 꽁초에 불을 붙여 두어 번쯤 빨다가 기침만 냅다 했던 기억이 있다.


할머니는 읍내에 있는 성당에 다니셨다. 젊었을 때부터 다녔던 것은 아니고 같은 동네에 사는 둘째 고모, 그러니까 할머니의 둘째 딸이 성당을 다니고 있어서 할머니도 언젠가부터 함께 다니게 되었던 것 같다.

나도 어렸을 때는 할머니를 따라 성당에 몇 년쯤 다녔었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갑자기 가기 싫어져서 나가지 않았다. 할머니와 둘째 고모는 영성체까지 받았는데 이렇게 냉담자가 되면 안 된다고 오래, 그리고 끈질기게 설득했지만 한 번 돌아선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할머니는 열넷인가에 시집와서 아홉 번의 출산을 했다고 했다. 그중 아들 둘은 어려서 죽었고 딸 넷과 아들 셋, 이렇게 일곱이 살아남았다. 할머니의 자식들 일곱 중 여섯은 성인이 되어 시집 장가를 가서도 같은 동네에 살아, 서로 걸어서 왕래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늙어서 칠 남매 중 장남인 - 원래는 장남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나 위에 형들이 다 어려서 죽는 바람에 장남이 되어버린 – 우리 아버지, 그러니까 우리 가족과 함께 살았다.

할머니는 첫 친손주인 나를 예뻐하셨다. 이것이 고추 하나 달고 나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말을 자주 하시며 내가 손자가 아닌 것을 아쉬워하셨지만, 아쉬움보다 애정이 더 큰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동생들도 고추를 달고 나오지 못하자 할머니는 대놓고 엄마에게 싫은 소리를 하셨고, 그 때문에 엄마와 할머니는 자주 언성을 높이셨다. 물론, 그것 말고도 엄마와 할머니가 서로를 공격할 사건을 수두룩했지만 말이다. 나는 그때 자주 엄마 편에 서서 할머니를 원망했었다.


동생이랑 싸우다가 손이 문에 끼는 바람에 손가락이 찢어져 피가 뚝뚝 떨어졌던 적이 있었다. 그때 집에는 나와 동생, 할머니밖에 없었다. 우리 집에는 비상약 같은 건 없었기 때문에 비상시에는 병원에 달려가거나 그냥 있었다. 할머니는 갑자기 된장을 가져오더니 손에 발라주셨다. 된장을 바르면 낫는다고 했다.

그때는 장독대에 달려가서 된장을 퍼와 피가 흥건한 손녀의 손가락에 올려주는 것이, 할머니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진짜 된장이 효과가 있었는지 그 이후에 다른 약을 발랐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찢어진 곳은 빨리 아물었다.


할머니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내가 할머니를 사랑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런 순간을 기억할 뿐이다. 할머니 옆에서 자다가 할머니가 등을 보이고 돌아누우면 나도 돌아누워 벽을 보고 잤던 순간을. 벽에 딱 달라붙어서, 벽의 차가운 기운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외롭고 서러운 느낌으로 잠들었던 순간을 기억할 뿐이다.


열넷부터 아내이자 며느리였던, 그리고 열아홉엔가는 이미 엄마가 되었던, 어린 아들 둘의 죽음을 먼저 겪어내야 했던 할머니는, 칠십이 조금 넘어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매일매일 소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셨지만 돌아가시는 날까지 까랑까랑 강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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