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엄마

엄마와 산책을 하며

by 휴지기

"명절 때는 자식들 모시고 명절 끝나면 엄마 모시구, 엄마두 너무 힘들어."


추석 때 친정에 갔을 때 엄마에게 들은 말이다. 저녁을 먹고 엄마랑 운동 겸 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넓게 펼쳐진 초록의 논들과, 잡초가 무성해 밀림처럼 변한 깊은 도랑의 줄기, 삼 년쯤 전부터 새로 만들어진 체리 나무 비닐하우스를 지나고 있었다. 친정 마을은 변함없이 계속 시골이었다. 아니,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시골이 되어가고 있었다. 넓은 논들 사이로 듬성듬성 집 몇 채,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추석 연휴가 끝나면 바로 외할머니의 생신이었다. 엄마는 엄마의 친정으로 엄마의 엄마를 보러 가야 했다. 내가 다음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엄마를 외할머니 댁으로 모셔다 드린다고 했더니, 명절 끝에 바로 외할머니 댁에 가면 너무 힘들 거 같다고 주말에 따로 가신다고 했다. 그리고 엄마는 외할머니의 작은 흉을 보기 시작했다.


"노인네가 고집은 세가지구, 전에 냉장고 준 거 있잖니? 그거 새 거 아니라서 안 쓴다고 다른 사람 줬다드라. 그거 당진까지 아는 사람 불러서 싣고 가느라구 얼마나 힘들었는디. 그리구 있잖니, 이 더운데 선풍기도 제대로 안 틀어. 아휴, 니네 외할머니집 가면 너무 힘들어. 테레비도 잘 안 나와서 심심하구, 가면 그렇게 빨리 오구 싶드라."


90세가 되신 외할머니는 아주 오래(추측컨대 30년 넘게) 혼자 살고 계신다. 외할아버지는 오래전에, 내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돌아가신 것으로 기억한다. 외할아버지는 키가 아주 컸었고, 키를 주체하지 못해 약간 휜 듯한 모습이었다. 목소리도 약간 쉬어, 약간 힘이 빠져 있는 느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기린이나 뭐, 그런 초식동물의 이미지를 가지고 계셨던 것 같다.


나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내가 외할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안돼! 우리 집에 오지 마!


였다고 한다. 네 살 때, 혹은 다섯 살 때쯤이었을 거다. 외할아버지는 당신의 딸 등에 업혀있는 첫 외손주에게, '니네 집에 할머니랑 할아버지랑 같이 가서 살까?'라는 농담을 던졌을 거고, 외가에 잘 가지 않아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낯설고 어색했던 나는 그 말이 진짜인 줄 알고 극구 손까지 내저으며 절대 오지 말라고 단호하게 소리쳤다고 한다.


네 살이나 다섯 살. 아무것도 모르는 아주 어린 나이이다. 하지만 아이가 아무것도 모르고 한 말이라고 해서 상처를 안 받는 건 아니라는 걸, 나도 아이를 키우면서 알게 되었다.


엄마는 당진군에서 예산군으로 시집을 왔다. 당진군과 예산군은 바로 옆에 붙어있기 때문에 엄마의 시댁에서 친정까지는 차로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는 시댁에서 시부모와 시동생들과 남편과 자식들, 몇 년간은 시동생들의 자식들까지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한 번도 친정에 가지 못하고 넘어가는 해가 잦았다. 설날과 추석, 외할머니 생신, 외할아버지 제사와 같은 기념일에도 엄마는 대부분 시댁에 있었다.


그러는 동안 엄마의 엄마는, 남편을 잃고 둘째 아들을 잃고 큰 아들을 잃었다. 초식동물처럼 순하던 엄마의 아빠, 아빠를 닮아 마찬가지로 초식동물 같던 엄마의 오빠와 남동생은 유난히 빨리 돌아가셨다. 외할머니가 낳은 네 명의 자식들 중 두 명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나는, 나보다 자식이 먼저 죽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한 일이 두 번씩이나 일어나는 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늠하지 못한다.


산책을 하면서 엄마에게, 외할머니는 무엇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느냐고 물어봤다. 경로당 다니고 밭 좀 매고 한다고 했다. 외할머니 댁은 다른 건물들과 한참 떨어져 있다. 경로당을 가려면 적어도 20분을 걸어야 할 거다. 질기고 질긴 더위에,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고 있는 외할머니의 꼬부라진 뒷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쓸쓸함, 적막감, 그 어떤 단어로 규정지을 수 없는 외할머니의 한 순간에 대해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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