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나의 첫 좌절에 관하여

by 휴지기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 것 같다. 여름방학 숙제 중에 붓글씨 백장(이백 장이나 삼백 장이었을 수도 있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써오기가 있었다. 붓글씨가 뭔지도 몰랐던 나는, 아빠에게 물어 붓글씨를 쓰기 위한 도구인 붓과 벼루, 먹, 화선지 같은 것을 학교 앞 문방구에서 사 왔다.


마루에 붓글씨 도구를 세팅했다. 벼루에 물을 조금 붓고 먹을 간 후 붓에 먹물을 묻혔다. 화선지를 펼쳐놓았는데 어떤 글자를 써야 할지 몰라 가만히 앉아있었다. 잠시 후 아빠가 와서 붓글씨 쓰는 법을 알려주셨다. 가나다라를 썼는지, 마루, 여름, 숙제 이런 단어들을 썼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뭔가를 계속 썼다.


화선지 백장은 금방 채워지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계속 썼다. 하루에 열 장씩을 써도 열흘을 써야 숙제를 완성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왜 이런 이상한 숙제를 내주셨을까 의아해하고 투덜거리면서 계속 붓글씨를 썼다.


아빠는 자주 옆에 앉아서 붓글씨 쓰는 법을 알려주셨다. 그때 아빠는 밖에서 일을 하시다가 땀에 범벅이 된 채로, 가끔은 전날의 숙취를 이기지 못해 안방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다가 나오셨던 것 같다. 그 여름방학은 아빠와 나란히 앉아 붓글씨를 쓰던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개학 날 화선지 백장을 말아 들고 학교로 갔다. 먹물로 글씨가 쓰인 화선지는 울퉁불퉁해 매끈하게 말리지 않아 부피가 컸다. 교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는데 뭔가 이상하고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나처럼 화선지를 가지고 온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다들 가방에 접어서 가지고 왔나 싶었지만, 불길한 예감은 가시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방학 숙제를 제출하라고 하셨고, 나는 방학탐구생활과 함께 쭈뼛쭈뼛 화선지 다발을 제출했다. 선생님은 붓글씨 숙제를 진짜로 다 해왔냐고 조금 놀라셨고, 나는 숙제를 해간 내가 이상한 애가 된 것 같아 심하게 부끄러웠다.


그날 이후 나는 학교의 붓글씨 유망주가 되었다. 선생님은 수업이 끝나면 1학년 2반 교실로 가 붓글씨 연습을 하다가 집에 가라고 하셨고, 나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했다. 1학년 2반에는 기존의 붓글씨 유망주들이었던 5, 6학년 선배들도 몇 명 있었는데 그 선배들은 연습을 자주 빼먹었다. 그래서 나 혼자 교실에 남아 붓글씨를 쓰는 날들이 많았다.


나는 왜 하루도 빠짐없이 그 교실에 앉아 붓글씨 연습을 했을까? 그냥, 그래야 하는 줄 알았던 것 같다. 선생님이 하라고 하셨으니까. 선생님이 하라고 하신 걸 안 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집에 가도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붓글씨를 빼먹고 같이 놀러 가자고 꼬드기는 친구도 없었고.


그때 붓글씨 담당 선생님이 따로 있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지나가던 선생님들이 이건 이렇게 쓰면 안 된다, 저건 저렇게 끝을 맺어야 한다 한두 번씩 훈수를 두고 가는 정도였던 것 같다. 내 붓글씨를 가장 많이 봐주신 분은 교감 선생님이셨다. 교감 선생님은 자주 교실에 들어오셔서 붓글씨 쓰는 법을 알려주셨다.


교감 선생님은 참 멋진 분이셨다. 그때는 월요일 아침마다 운동장 조회를 했고, 조회 때마다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견디고 있어야 했는데, 교감 선생님께서는 훈화를 항상 1분 안으로 끝내시는 센스 있는 분이셨다. 교감 선생님은 자세가 곧고 말에 힘이 있었으며 백발이 성성하셨다. 알고 보니 교감 선생님은 아빠의 체육 선생님이기도 하셨다고 했다.


“니네 아빠가 얼마나 달리기를 잘했는지, 상이란 상은 다 휩쓸고 다녔었어.”


아빠가 어렸을 때 육상선수를 했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상을 많이 탔었는지는 몰랐었다. 진짜였는지 아니면, 딸인 나에게 아빠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과장을 보태 하신 말씀인지 잘 모르겠다.


내 붓글씨 실력은 나날이 늘어갔다. 군에서 주최하는 몇몇의 붓글씨 대회에서는 항상 일등이나 이등을 했다. 나는 종종 조회대에 나가 상을 받았다. 그렇게 나는 6학년이 되었고, 5학년 어떤 성실한 후배가 들어와 함께 붓글씨를 쓰고 집에 가는 날이 많아졌다.


6학년 봄이었다. 어떤 군부대에서 대회가 있었다. 왜 군부대에서 이런 대회를 하는 건지 의아해하면서 관광버스를 타고 대회 장소로 향했다. 대회는 생각보다 큰 규모로 이루어졌던 것 같다. 도 내의 모든 학교에서 붓글씨, 정물화, 풍경화 등 분야별로 학생들이 다 모였고, 군인들과 선생님들이 여러 행정업무를 보느라 분주해 보였다.


우리는 내무반에 들어가 붓글씨를 썼다. 내무반에 들어가 본 건 그때가 유일했는데, 책상도 없는 내무반에서 엎드려 글씨를 쓰는 게 조금 불편하면서도 웃겼다. 나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열심히 붓글씨를 써서 제출했고, 5학년 후배와 함께 부대에서 나온 점심을 먹으며 소풍 나온 기분을 느꼈었다.


점심시간 후 바로 시상식이 있었다. 나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1등이나 2등을 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최우수상부터 이름이 불렸다. 내 이름이 아니었다. 우수상에 5학년 후배의 이름이 불렸다. 내 이름은 없었다. 나는, 몇 명씩 주는 장려상 어딘가에서 이름이 불렸다.


학교에 돌아오기 위해 관광버스에 올랐다. 창밖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후배가 우수상인데 내가 장려상인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장려상은 참가한 학생들은 다 주는 상 같았다. 군부대에서 학교로 오는 삼십 분 내내 너무 창피했고, 옆자리 앉은 후배가 미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날 이후 붓글씨를 쓰지 않았다. 교감 선생님께서는 나를 따로 불러 위로하셨다. 하지만 나는 교실 뒤의 게시판만 바라보며 교감 선생님의 말씀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울기만 했다. 나는 교감 선생님을 피해 다녔다. 그 장려상이 마치 내 치부처럼 느껴졌다. 치부를 알고 있는 사람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이게 내가 기억하는 나의 첫 좌절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존심은 약간 상하지만 그렇게 유난을 피우며 아파할 만한 거대한 사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는 어렸고, 붓글씨는 잘하는 게 없고 잘난 게 없어 자존감이 낮았던 내가 유일하게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수많은 좌절이 있었다. 대학에 떨어지고 실연을 당했으며 임용고사에도 떨어졌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초등학교 6학년 저 때의 좌절이 가장 선명하게 기억된다. 최선을 다해도 최선의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은, 당시의 초등학생인 내가 받아들이기에는 조금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아직도 나는,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는 순진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믿지 않으면,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버틸 도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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