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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지기 Oct 22. 2024

섬집아기와 워킹맘의 비애

오늘은 야근이 있는 날이라 며칠 전부터 남편에게 주지를 시켜 놓았다.   

  

“나 화요일에 야근이라 9시 이후에 퇴근해. 그날 일찍 와서 아이 저녁 줘야 해.”     


처음에 말했을 때 남편은 알았다고 했다. 두 번째 말했을 땐 ‘그날 좀 바쁠 것 같긴 한데’ 하고 말끝을 흐렸다. 어제, 세 번째 말했을 땐 ‘아 그래? 늦게 온다구? 나 너무 바쁜데’라면서 내 야근 얘기를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반응했다.     

 

활화산 아래 용암이 들끓는 것처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터지지는 않았다. 10년 동안의 학습의 결과였다. 분노해야 마땅할 순간, 분노 대신 체념을 선택하는 것은.   

  

남편 대신 초등학교 3학년인 아이를 믿어보기로 했다.     


“엄마가 중간에 김밥을 갖다 주든지 시켜주든지 할게. 김밥 먹으면서 조금 쉬고 있다가 숙제 먼저 해. 밥 먹고 숙제 다하면 7시 반쯤 될 테니까 그때부터는 하고 싶은 거 하고 있어. 유튜브를 봐도 되고 게임을 해도 돼.”    

 

아이는 알았다고, 저녁으로는 돈가스 김밥을 사달라고 말했다.     


“그런데 엄마는 9시 넘어서 올 텐데 그때까지 혼자 있을 수 있겠어?”     


아이는 처음에는 유튜브와 게임을 할 시간이 많아 좋아하다가 9시 넘어온다는 말에 조금 시무룩해진다.   

  

“엄마, 9시는 좀 너무한 거 같애. 너무 밤에 혼자 있는 건 무서워.”

“그치? 아빠가 그전에 올 수도 있는데 못 올 수도 있어. 무서우면 전화해. 알았지?”     


아이에게 미안하다.      


친정과 시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공간에서, 남편이 육아를 먼발치에서 구경만 하는 상황에서, 워킹맘으로 아이를 키운다는 건 정말 쉽지 않다. 지금은 그래도 말이 통하고 몇 시간쯤은 혼자 있을 수 있는 나이만큼 컸지만, 그전에는 아이를 맡길 데가 없어 아이 친구 엄마들에게 육아를 구걸해야 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다. 다행히 어려울 때마다 선뜻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걸 부탁하기 위해 입을 떼는 것이 많이 어렵고 또, 서러웠다.      


남편과 자주 싸웠고 우리가 싸우는 걸 볼 때면 아이는 ‘졸려’라면서 눈을 비비곤 했었다. 지금은 잘 싸우지 않는다. 목소리를 높여봤자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래서 빨리 포기하는 쪽을 택하게 되었다.     


가끔은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생각한다. 오늘처럼 야근을 하면서 아이의 저녁밥과 어둠 속에 혼자 있을 아이의 무서움을 짐작해야 할 때, 대부분의 명절에, 엄마 생신에 364km 떨어진 친정을 아이와 단둘이 다녀와야 할 때, 카드값 낼 일이 막막하여 생필품의 질을 낮춰 구매해야 할 때, 많은 순간 생각한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이걸 계속 견뎌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인가.     


아이가 아기였을 때, 아기띠를 하고 자장가로 섬집아기를 불러주다가 울었던 적이 있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어  

다 못 찬 굴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아, 섬집아기의 주제가 워킹맘의 비애였구나. 내 얘기구나 하면서 말이다. 그때도 남편은 없었다. 남편은 내가 아이를 재우고 나서야, 내가 집안 정리를 하고 잠자리에 들고 나서야, 집에 들어왔다.   

   

남편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을 것이다. 알고 있다. 하지만 이해하지는 못하겠다. 왜 언제나 가족이 맨 후순위였는지, 왜 언제나 세상 제일 열심히 일하고도 대가는 거의 없다시피 했는지, 왜 언제나 굴 바구니도 다 못 채운 내가, 갈매기 울음소리를 듣고 마음이 불안해 아이에게 뛰어오게 만들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남편은 믿지 못하지만 아이는 믿는다. 아이는 언제나 자기 몫의 일을 잘, 해낸다. 오늘도, 비가 세차게 내려 낮에도 저녁같이 어두운 오늘 같은 날도 아이는 신발과 양말이 다 젖어가며 학교에 갔다가 태권도, 피아노, 영어 학원에도 갔다가 집에 올 것이다.      


내가 준비해 놓은 돈가스 김밥을 먹고 책을 좀 읽다가 영어 숙제와 한자, 수학 학습지를 풀어놓을 것이다. 해야 할 일을 끝내면 홀가분한 마음으로 캐릭온 TV 유튜브를 보고 마인크래프트 게임을 할 것이다. 그러다가 아빠가 오지 않고 밤이 점점 깊어지면 무서워서 전화를 하겠지만, 그래도 아이는 잘 버틸 것이다.      


아이는, 해내야 하는 것은 어려워도 해낸다. 아이는 믿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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