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여름에 3박 4일로 친정 식구들 다 같이 제주도 여행을 갔었다. 그때 우리 아이는 네 살, 한창 에너지 넘치고 땡깡이 심할 때였다.
우리 아이는 어디든 뛰어다녔다. 아이가 뛰는 방향은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 아닌 때가 많았다. 나는 탱탱볼처럼 여기저기 튀어 오르는 아이를 챙겨 일행을 뒤따르는 게 조금 버거웠다. 아이는 한여름 제주도에서 계속 뛰어다니느라 땀을 뻘뻘 흘렸고 나는 그런 아이를 붙잡으러 쫓아다니느라 또 땀을 뻘뻘 흘렸다.
여행 이튿날인가 사흗날 저녁에 숙소에서 맥주를 한잔하고 있을 때였다. 아이는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심통이 났었고, 나는 아이를 혼내고 달래기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 같다.
갑자기 친정 아빠가 아이에게 말했다.
“너 왜 자꾸 우리 딸 힘들게 해?”
아이는 자기 심통에 몰입해 있었기 때문에 친정 아빠의 이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 말은, 아빠의 ‘우리 딸’인 내가 들었다.
나는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걸 간신히 참았다. 갑자기 울면 분위기가 너무 청승맞아질 것 같아서였다. 나는 쏟아지려는 억지로 눈물을 참고, 아무렇지 않은 척 아이를 돌아보고 아이를 달래는 척 연기했다.
우리 집은 충청도 시골 마을, 대가족이었다. 기본 가족은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빠, 나를 포함한 딸 셋 이렇게 일곱 명이었고, 처음에는 결혼 안 한 작은 아빠들이 함께 살아 아홉 명, 작은 아빠들이 결혼하고 나서는 작은 아빠들의 자녀들, 그러니까 나에겐 사촌 동생인 아이들도 몇 년간 우리 집에서 함께 자라(사촌 동생들은 아침에 오고 저녁때 갔다) 사람이 많았을 때는 10명 이상이 함께였던 적이 많았다.
우리 집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북적했고, 서로 살가운 대화를 하기에는 사람들 간의 크고 작은 싸움들이 매우 잦았다. 엄마는 할머니랑 싸우고 아빠랑 싸우고 작은엄마들이랑 싸웠다. 아빠도 할머니랑 싸우고 돈 떼먹고 도망간 아저씨들이랑 싸웠으며 아빠가 키우는 돼지들이랑도 싸워야 했다. 나는 동생들과 싸웠고 마음속으로는 주변의 모든 어른들과 싸웠다. 호젓하지도 단란하지도 못한 상황이 싫었다. 그 시끄럽고 지긋지긋한 집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실제로 나는 스무 살 이후로는 친정과는 계속 멀리 떨어져 살고 있기 때문에 집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바람을 이루기는 했다.
나는 부모님이나 동생들에게 다정하고 살가운 말들, 이를테면
‘사랑해, 보고 싶어, 걱정돼’ 이런 말들을 거의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낯간지러웠다. 그리고 성격 자체가 무심하기도 했다. 친정 아빠가 살아계실 때 가끔
“지들이 다 혼자 큰 줄 알지?”
라고 서운함을 내비쳤을 때에도, 그냥 못 들은 척하거나 ‘아냐’라고 짧게 대답했을 뿐이지
“그게 아냐, 엄마 아빠가 고생한 거 다 알아. 항상 고마워하고 있어.”
이런 말은 하지 못했다. 중학교나 고등학교 다닐 때 친구랑 벤치에 앉아 부모님의 고생스러운 삶을 공유하고 그분들이 불쌍하다고 울었을지언정, 실제로 엄마 아빠 앞에서는 한 번도 그런 티를 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이에게는 애정 표현을 자주, 과하게 한다. ‘귀엽다, 예쁘다, 사랑한다, 잘생겼다’와 같이 온갖 낯간지러운 표현들을 일상어처럼 사용하고, 잠들기 전에는 얼굴이 닳도록 뽀뽀를 해댄다. 아이는 가끔만 받아주고 대부분은 귀찮아한다. 그러면 나는, 귀찮아하는 아이 표정도 귀여워 또 낯간지러운 말들을 쏟아낸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라는 속담이 있다. 부모님에게는 마음이 있어도 살가운 표현들을 하지 못했다고 했지만, 사실은 내가 부모님에게 가지고 있는 애틋한 마음이 아이에게 있는 애틋함만큼 크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것에도 중력이 작용하여 내리는 것은 자연스럽고 올라가는 것에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않은가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내가 그 노력을 게을리했으면서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던 건 아닌가도 함께 생각해 본다.
그래서 그날, 몇 년 전 제주도에서 친정 아빠가 우리 아이에게
“너 왜 자꾸 우리 딸 힘들게 해?”
라고 말했을 때 내가 울컥한 이유는, 아빠의 내리사랑을 너무 선명하게 확인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빠에게 아무 대답하지 못했다. 옆에서 심통 부리고 있는 아이만 바라봤을 뿐이다.
며칠 뒤 아이 학교에서 학부모 참관 공개수업이 있다. 1, 2학년 학부모 공개수업 때 구두를 신고 한 시간을 교실 뒤에 꼼짝 않고 서있어야 하는 게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올해는 2교시 영어전담선생님, 3교시 담임선생님의 공개수업이 잡혀있다. 둘 중 한 시간만 가서 서 있을 생각으로 아이에게 물어봤다.
“엄마가 2교시 영어수업이랑 3교시 담임선생님 수업 중 어떤 걸 갔으면 좋겠어?”
“둘 다 와.”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었다. 우리 아이는 예전부터 내가 자기 학교에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시간 다 오라는데 안 갈 수도 없고, 두 시간을 구두를 신고 가만히 서 있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발가락이 아프고 종아리가 굳어가는 느낌이다.
그래도 서 있어야지. 아이가 수업 중 뒤를 돌아봤을 때 그 많은 어른들 중에 엄마가 없다는 걸 알고 실망하지 않도록, 쉬는 시간에 다른 아이들은 부모님이랑 사진도 찍고 대화도 하는데 아이 혼자만 할 일이 없어 멀뚱하니 앉아있지 않도록 말이다.
두 시간을 서있으려면 올해는 아무래도 운동화를 신고 가야 할 것 같다.
학부모로 사는 일도 참 만만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