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6살 때 몇 달간 주말 축구 수업을 다녔었다. 넓은 야외 축구장 네 개가 붙어있는 쾌적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수업이었다. 아이들이 축구장 안에서 수업을 받고 있으면 아이를 라이딩 해 온 부모들은 밖의 계단에 앉아 아이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가끔 아이들이 두 팀으로 나뉘어 경기라도 하는 날에는 부모들이 진짜 축구 경기를 보는 것처럼 기쁨과 환호, 아쉬움과 안타까움의 감탄사들을 신나게 드러냈다.
우리 아이는 운동을 잘 하지 못한다. 특히 축구나 농구와 같은 구기 종목은 젬병이다. 안타깝게도 나를 닮아서 그런 것 같다. 그런 것쯤은 남편을 닮아도 됐을 텐데 왜 굳이 이런 것까지 나를 닮아야 했는지, 남편의 유전자는 진정 머리숱이랑 손 모양에만 가 있는 것인지 의아하고 아쉽다.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체력장이라고 하는 게 있었다. 달리기, 윗몸일으키기, 턱걸이, 오래달리기, 제자리멀리뛰기 등 대여섯 개의 종목을 테스트하고, 그 테스트 점수를 기준으로 특등급부터 5등급까지 총 6등급으로 학생들 체력을 구분하는 것이다.
나는 모든 종목을 나름 열심히 했다. 내가 ‘나름’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언제나 내 체력장 등급이 최하위였기 때문이다. 많은 아이들이 윗몸일으키기를 할 때 자기들끼리 짜고 개수를 올리곤 했었는데 나는 간이 작아서 그런 것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가장 자신이 있는 윗몸일으키기도 거의 최하점이었다. 5등급, 잘 나오면 4등급인 체력장 결과를 받아 들고 있으면 친구들이 종종 물었었다.
“야, 너는 운동 엄청 잘하게 생겼는데, 어떻게 된 거야?”
나도 그게 궁금했다. 어떻게 된 거지? 열심히 안 한 건 아닌데 어떻게 이런 등급이 나올 수 있지? 아빠는 어렸을 때 달리기 선수였고 엄마도 달리기는 자신있다고 했었다. 나는 뭐지? 키가 커서 다리도 남들보다 긴데, 그럼 적어도 달리기나 멀리뛰기에서만이라도 잘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쩔 수 없었다. 이건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타고나지 않은 운동신경을 노력으로 기르는 건 힘든 일이었다. 나는 그냥 운동을 못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고 별 신경 안 쓰고 살아가고 있었다.
문제는 아이였다. 축구장 밖에서 축구 수업을 받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으면 아이는 참 ‘모든 순간 열심히 하고 있구나’하는 게 느껴졌다. 달리기도 최선을 다해 뛰었고 장애물도 최선을 다해 넘었고 공도 최선을 다해 굴렸다. 그런데 아이는 자꾸만 뒤처졌다. 한 번에 달리기를 통과하지 못해 다른 느린 아이들과 함께 골대를 한 번 더 찍고 와야 했고 넘어야 하는 장애물을 자주 넘어뜨렸으며, 아이가 찬 공은 번번이 이상한 방향으로 굴러갔다. 처음에는 처음이라 그런 줄 알았다. 처음에는 다 못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축구 수업에 가는 횟수가 늘어나도 아이의 실력은 잘 늘지 않았다. 상, 중, 하로 나눈다면 계속 하위권이었다. 아이는 함께 수업하는 친구나 형들보다 키가 커서 눈에 잘 띄었는데, 자꾸 저 멀리로 굴러가는 공을 주우러 달려가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축구 수업에서는 미니 경기를 했는데 각 팀에서 선수를 뽑는 방식이 특이했다. 선생님이 가장 잘하는 두 명을 각 팀의 조장으로 뽑고, 그 조장이 가위바위보를 해서 한 명씩 선수를 데려가는 방식이었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팀을 구성한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마음이 쓰였다. 아무도 우리 아이를 뽑지 않아 아이가 가장 늦게까지 남아있게 될까 봐, 그것 때문에 아이가 상처받을까 봐 불안했기 때문이다. 아이는 실제로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이름이 불리게 되었고, 나는 마지막 남은 한 아이가 우리 아이가 아닌 것에 안도했다.
아이는 축구 경기를 발이 아닌 입으로 했다. 20분 정도 되는 경기 내내 공은 두어 번쯤밖에 못 만져보면서,
“누구야 이쪽으로 와, 형아 저기 공 있어, 여기여기!”
이런 말들을 끊임없이 해댔다. 나는 계단에서 아이를 지켜보며 그래도 기죽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아이가 축구 수업 중에 코피가 난 적이 있었다. 코로나가 심했을 때라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아이가 수업을 받다가 갑자기 축구장 밖으로 뛰어나오면서 ‘엄마 코피!’라고 소리쳤다. 마스크를 벗겨보니 코피를 주르륵 흘리고 있었다. 마스크가 온통 빨갛게 물들었다. 휴지로 간신히 막고 축구장을 빠져나왔다.
그 이후로 아이는 부끄럽다며 축구 교실에 가지 않았다. 나중에 물어보니 사실 축구가 별로 재미가 없었다고도 했다.
아이 반 남자아이들은 중간 놀이 시간과 점심시간에 언제나 운동장에 나가 축구를 한다고 했다. 1학기 때에는 우리 아이도 그 아이들 틈에 끼어 열심히 축구 경기를 뛰었다. 물론 우리 아이는 축구를 잘 못하기 때문에 수비를 맡았고, 가끔 그냥 서있다가 공이 허벅지로 날아와 수비에 성공한 적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그땐 우리 아이도 다른 아이들처럼 실제 축구 경기를 보고 싶어 했고 축구 선수를 좋아했다. 손흥민 사진이 박힌 휴대폰 케이스를 사달라고 졸랐고 호날두를 휴대폰 배경 화면으로 설정해 놓았었다.
그런데 2학기가 되고부터는 한 번도 학교에서 축구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다른 남자 아이들이 축구를 할 때 우리 아이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는다고 했다. 책을 많이 읽는 건 좋은데 아이가 다른 애들이랑 잘 어울리지 못하는 건 아닌가 불안한 마음이 든다.
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운동을 못하고 축구를 못한다고 하여 크게 위축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우리 아이는 남자이다. 내가 알기로 남자들에게는 축구가 운동 경기 이상의 매우 중요한 무언가인데 이렇게 축구를 못해도 학창 시절을 보내는 데 문제가 없는 것인가 심히 우려가 된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 정글 같은 2차 성징기의 남자 청소년들 집단에서 우리 아이가 자존감을 잘 버티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싶다.
‘나의 아저씨’에서도 아저씨들이 조기축구를 하며 친목을 다지고 정을 나누지 않았는가? 우리 아이는 무엇을 하며 친구들과 친목을 다지고 유대감을 느낄 수 있을까? 축구를 잘했다면, 그리하여 다른 누군가와 함께 몸을 움직여서 얻을 수 있는 성취감과 희열을 우리 아이도 자주 느끼면서 살 수 있었다면 훨씬 더 풍성한 삶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이에게 누구나 잘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 다른 아이들이 축구를 잘하는 것처럼 너는 축구가 아닌 다른 것을 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것. 다른 아이들의 능력을 인정해 주되, 그 능력이 너에게 없다 하여 위축되거나 기죽지 말라고 용기를 주는 것. 그것뿐인 것 같다.
“엄마 캐나다 가고 싶어.”
“왜?”
“캐나다에 콜로세움처럼 생긴 도서관이 있대. 너무 멋있을 거 같아.”
“그래. 가자.”
“언제?”
“초등학교 졸업하기 전까지?”
“진짜?”
“노력해 볼게.”
아이는 많은 나라를 가보고 싶어 한다. 가서, 책에서 본 것들을 실제로 경험하고 싶어 한다. 나도 아이가 원하는 모든 곳을 데리고 가고 싶다. 하지만 시간이 없고 돈이 없다. 심지어 영어도 못 한다.
부족한 부모 때문에 아이의 시야가 더 이상 확장되지 않는 것 같아, 꿈은 꾸지만 그걸 실현시킬 기회를 자주 놓치게 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