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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지기 Oct 15. 2024

귀찮다, 귀하지 않다

“아오, 귀찮아.”     


아이가 자주 하는 말이다. 사실 이 말은 내가 자주 하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정말 많은 것이 귀찮다. 신발을 가지런히 두는 것도 귀찮고 자고 일어나서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것도 귀찮고 벗은 옷을 옷걸이에 걸거나 세탁실에 가져다 두는 것도 귀찮다.     

 

그런 많은 귀찮은 일들을, 나는 주로 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는 편이다. 귀찮은 일들을 미루다 보면 집이 지저분해지지만 천성이 게으른 나는, 순간의 편리를 위해 집이 지저분해지는 것쯤은 충분히 견딜 수 있다.    

  

친정에 갔을 때 내 ‘귀찮다’는 말을 들은 엄마가     


“귀찮다는 말 좀 하지 마. 그거 니 아들이 다 배워서 따라 해.”     


라고 말씀하셨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가 그 말을 하고 몇 달 뒤부터 아이는 걸핏하면 귀찮다는 말을 한다.   

  

우리 아이가 ‘귀찮다’는 말을 할 때는 대부분 학원이나 학습지 숙제를 해야 할 때이다. 해야 하는 걸 알고는 있지만 최대한 미루고 나서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 그때 ‘아오, 귀찮아’라는 탄식 비슷한 표현과 함께 가방을 뒤적여 숙제할 책과 공책을 꺼내 든다. 막상 숙제를 시작하면 또 금세 끝내기는 하는데 그 시작을 힘들어한다. 책 읽고 저녁 먹고 샤워하고 또 책을 읽고 난 다음, 당장 시작하지 않으면 티브이 보는 시간이 줄어들거나 잠자는 시간이 늦어질 것 같을 때, 그때 억지로 숙제를 시작한다.     


아이는 자신이 읽은 책을 정리해야 할 때에도 ‘귀찮다’는 말을 자주 한다. 아이는 책을 읽고 식탁이나 소파, 거실 바닥, 침대 아무 데나 널브러뜨려 놓는다. 책을 찾아 읽기는 하지만 읽은 책은 거기서 끝이다. 정리할 줄을 모른다. 나도 원래 정리랑은 거리가 멀어 책이 아무 데나 굴러다니는 것에 크게 신경 쓰이지 않고 심지어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데 어느 순간, 책 때문에 소파에 앉을 자리가 없거나 식탁에 밥을 놓을 자리가 없어질 때 아, 지저분하구나, 라는 인식을 하게 된다. 그때 아이에게 책을 치우라고 하면 아이는 ‘아오, 귀찮아’하면서 굼뜨게, 그래서 보고 있는 사람 매우 답답하게 느릿느릿 책을 정리한다.     


‘귀찮다’는 ‘귀하지 않다’에서 온 말이다. ‘귀하지 않다’가 ‘귀치 않다’로 한 번 줄어들고, ‘귀치 않다’가 ‘귀찮다’로 다시 한번 줄어든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신고 있던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것, 자고 난 이부자리의 이불을 평평하게 펴놓는 것, 벗은 옷을 옷걸이에 걸어두는 것 따위를 귀찮게 생각한다는 것은, 그것들이 귀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이라는 인식이 있는 탓일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일상은 이러한 사소한 것들의 연속으로 굴러간다. 매일 매일 해야 하는 작은 일들, 그래서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귀하지 않게 여긴다면, 내 일상의 많은 부분을 귀하지 않게 여기는 셈이 될 것이다. 반대로 내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해야 하는 일들, 벗어놓은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벗어놓은 옷을 펼쳐 옷걸이에 걸고 자고 일어난 이부자리를 각을 맞춰 펼쳐놓은 것에 정성을 들인다면, 내가 살고 있는 그 순간에 정성을 쏟는 것이 될 것이다.     


이래서, 오늘부터는, 귀찮다는 말을 좀 줄이고 정성을 들인 일상을 살아볼까 한다. 그러면 우리 아이도 귀찮아하지 않고 숙제를 시작하고 읽은 책을 스스로 책꽂이에 꽂아두는 변화를 보이지 않을까? 우리 아이가 자신이 통과하고 있는 시간들을, 그 시간의 일상들을 귀하게 여겨 결국 귀한 삶을 살 수 있게 되길 바라본다.            

      



“엄마, 나 내년쯤에는 사춘기가 올 것 같아.”

“어떤 게 사춘기가 오는 건데?”

“으음, 그냥 엄마 말 안 듣고 말대꾸하고 그런 거? 그리고 나 내년쯤에는 여자 친구도 생기게 될 것 같아.”

“여자 친구? 마음에 드는 여자애 있어?”

“아니, 지금은 없는데 4학년이나 5학년 때쯤은 생길 것 같아. 그런데 그때 엄마한테 말 안 할 거야.”

“왜?”

“엄마가 헤어지라고 할 거 같으니까.”

“그리고 나 혼자 뭐든지 잘하면 4학년 때 혼자 기차여행 보내준다고 했던 거 잊지 마.”     


아이는 자꾸 커가는 자신을 상상한다. 커간다는 것은 부모로부터 점점 독립되어 가는 것, 그리하여 스스로의 의견이 생기고 부모 말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가끔은 비밀이 생기기도 하는 것. 아이가 자꾸 혼자서 뭔가를 하려고 해서 대견하고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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