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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지기 Oct 11. 2024

너무 잘 잊는다

예전을 추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생애가 찬란하였다 하더라도 감추어 둔 보물의 세목(細目)과 장소를 잊어버린 사람과 같다. 그리고 기계와 같이 하루하루를 살아온 사람은 그가 팔순을 살았다 하더라도 단명한 사람이다. 우리가 제한된 생리적 수명을 가지고 오래 살고 부유하게 사는 방법은 아름다운 인연을 많이 맺으며 나날이 적고 착한 일을 하고, 때로 살아온 자기 과거를 다시 사는 데 있는가 한다.   

  

피천득 작가의 수필집 「인연」 중 ‘장수(長壽)’라는 작품에 나오는 구절이다. 글을 쓰기 위해 이 구절을 찾는데, 어느 작품에 있었던 구절인지 잊어버려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좋은 부분이라고 생각했으면서도 밑줄을 쳐놓는 것도 잊어버렸었나 보다. 


나는, 너무 잘 잊는다.     


어제 친구랑 통화하다가 분리 수면 이야기가 나왔다. 친구가 여섯 살 딸과 분리 수면을 하고 싶은데 딸이 그 얘기만 나오면 딸이 대성 통곡을 한다고 했다. 딸과 같이 자면 중간 중간 자주 깨게 되어 통잠이 불가능해 너무 피곤하다고, 도대체 통잠은 언제부터 잘 수 있는 거냐면서, 친구가 우리 아이의 분리 수면 시기를 물어왔다.      


“우리 애? 으음....글세.....다섯 살인가? 여섯 살인 거 같기도 하고. 잘 기억이 안 나네.”     


그 말을 들은 친구는     


“야, 너도 참 무심한 엄마다. 그걸 기억을 못하냐? 분리 수면이 금방 돼서 기억을 못하는 건가?”     


그건 아닐 거다. 아이가 어느 순간 짠, 하고 따로 잔 것 같지는 않다. 일정 기간 적응 기간과 실랑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이가 나와 따로 잠을 자기 시작했던 나이도, 따로 잠을 자기 시작했던 그 중요한 장면도 말이다.  

    

친구는, 내가 친구의 딸보다 네 살 많은 아들을 키우고 있어서 아이의 어렸을 적 발달과정에 대해 자주 묻는다. 예를 들어 말은 언제부터 하게 됐는지, 한글 기역, 니은, 디귿 같은 건 언제 알게 됐는지, 영어 알파벳은 몇 살부터 기억하게 됐는지와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데 나는,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말은 빨랐던 것 같은데 정확히 몇 개월쯤 ‘엄마, 아빠’를 할 수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고, 한글은 다섯 살 때쯤 국기 카드를 가지고 놀면서 알게 된 것 같은데 구체적인 자음 모음을 알게 된 시기는 잘 모르겠다, 알파벳을 언제 기억했는지는 진짜 절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런 대답을 하면서, 어쩜 이렇게 다 잊어버릴 수가 있지? 스스로 의아하고 한심한 기분이 들었다.  

   

나에게 육아는 너무 고되고 외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반짝반짝 빛나던 순간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아이가 두 살 때 처음으로 한 걸음을 걸어와 나에게 안기던 순간, 네 살 때 어린이집 재롱잔치에서 귀여운 복장을 하고 깜찍한 율동을 하던 순간, 그런 순간들을 더 잘 기억하고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한다. 아이가 재롱잔치에서 어떤 귀여운 옷들을 입었고 어떤 노래에 맞춰 엉덩이를 씰룩거렸는지를 기억하고 있었다면 피천득 작가의 말처럼 더 오래 부유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가끔 내가 망각 능력이 뛰어나 다행이라고 느낄 때가 있다. 지금 현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구질구질하고 비루한 문제들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면 나는 딱,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잊어버리니까 그나마 버티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뛰어난 망각 능력 때문에 아이에 관한 것들도 너무 많이 잊어버리는 것 같아, 그게 문제다.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간 아이의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알아차렸더라도 기억하지 못하는 빛나는 순간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억하도록, 아이의 아름다운 시간들을 선명하게 기억하도록 노력해 봐야겠다. 실제보다 더 오래, 더 부유하게 살았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말이다.         



아이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말했다.     


“엄마, 나 수학 문제 다 틀렸어.”

“다?”

“응, 다섯 개 풀었는데 다섯 개 틀렸어.”

“뭐라구?”     


머리는 유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나 아들은 엄마 머리를 닮는다고 했다. 나는 국어와 영어는 어려워하고 잘하지 못했는데 수학, 과학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가 수학을 못하리라고는, 진심으로,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다.     


또 한번 깨닫는다. 아이는 나와 다르다. 내 배속에서 생겨났지만 나와 다른 존재이다. 


수학 문제를 다 틀렸다니, 심지어 초등학교 3학년 수학 문제를. 충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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